‘비박’ 주자들, 왕당파 향해 진군 나팔 울리다
  • 이승욱 기자 (gun@sisapress.com)
  • 승인 2014.03.18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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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지방선거 주도하며 목소리 높여…‘중진 차출론’ 펴다 되치기당한 친박 당권파

“비박(非朴)? 지금 우리 쪽에 구심 역할을 하는 인물이 어디 있어? 없잖아.”

지난해 9월께 국회의원회관에서 기자와 만난 한 새누리당 비주류 인사는 기자에게 퉁명스러운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기자의 ‘비박’이란 표현이 마땅치 않다는 투였다. 그는 이른바 비박의 대표 인사로 거론되는 이들을 일일이 거명하며 “한때 친이계 좌장 역할을 한 이재오 의원은 뒷방 노인네 신세가 돼 개헌 이야기는 메아리로밖에 안 들리고, 정몽준 의원은 대권 후보로만 거론됐지 실제 당내 지분이 하나도 없지 않으냐”며 “이른바 쇄신파로 통하는 비박들도 당내에서 존재감이 없어 말발이 통하지 않는 실정”이라고 토로했다.

반년 만에 상황이 급변하고 있다. 당내 영향력이 약했던 대권 주자 정 의원은 지금 유력한 ‘소통령’(서울시장) 후보로 부각되고 있다. 존재감이 없다던 쇄신파들도 경기도지사·제주도지사 등에 잇따라 출사표를 던지며 지방선거 판세를 뒤흔들고 있다. 덩달아  이재오 의원은 현 정부를 향해 날 선 비판의 소리를 높이고 있다.  

새누리당 ‘비박(非朴)’ 후보들이 6·4 지방선거에서 당의 전면에 나서고 있다. 정몽준 서울시장 후보, 원희룡 제주도지사 후보, 남경필 경기도지사 후보(왼쪽부터). ⓒ 연합뉴스
지방선거 판 키운 친박 ‘역풍’

6·4 지방선거를 바라보는 여권의 당초 분위기는 여유만만이었다. 집권 2년 차에 접어들어서도 여전히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 지지도가 50~60%대의 안정세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역대 지방선거가 ‘여권의 무덤’이 된 전철을 이번만큼은 밟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팽배했다. 내분에 빠져 스스로 헛발질을 거듭하는 민주당 지지율은 바닥을 기었고, 한때 바짝 긴장했던 안철수의 ‘새 정치’ 바람도 잦아들었다. 기자와 만난 당 관계자들도 입을 모아 “지방선거는 별 걱정이 없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다녔다.

친박 핵심이 포진한 이른바 ‘당권파’는 지방선거의 판을 키우려고 고민했다. 이는 ‘중진 차출론’으로 가시화됐다. 차출 대상은 주로 비박 중진 정치인에 쏠렸다. 대표적인 게 서울의 정몽준, 경기의 김문수 출마 시나리오였다. 두 사람 모두 지난 2012년 박 대통령에 맞서 대선 후보로 출마한 ‘잠룡’들이다. 2017년 여권의 차기 유력 대권 주자로 거론되는 이들이다. “친박의 의도가 뭐냐”는 비박 진영의 의심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지방선거 출마로 대권 도전의 싹을 자르겠다는 의도라는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중진 차출론이 현실화되자 상황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정몽준 후보의 서울시장 출마 선언에 이어 남경필 후보 역시 김문수 지사를 대신해 결국 경기도지사 출마 요구를 수용했다. 3월14일 현재 원희룡 전 의원도 제주도지사 출마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6·4 지방선거에서 최대 접전지로 꼽히는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중진 차출론이 현실화하면서, 친박을 제치고 비박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지방선거의 주도권이 친박이 아닌 비박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형국이 돼버린 것이다.

중진 차출론이 애초 거론될 때만 하더라도 당권파 내부에서는 비박이 이렇게 존재감을 키울지 예상치 못한 분위기다. 당권파 측 관계자는 “중진 차출론이 나온 건 비박을 지방선거의 희생양으로 삼겠다는 전략적인 차원은 아니었다”며 “당권파 내부에서는 중진 차출론이 현실화돼도 친박이 주도하는 선거 구도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비박 후보들이 전쟁터에 나가더라도 당에 남는 사령부는 친박 일색이다. 지방선거 후 당권 경쟁에서 친박이 헤게모니를 쥘 것이라는 걸 의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선거용 넘어 연대전선 만드는 비박

주류인 친박과 비주류인 비박의 힘의 균형이 달라진 양상은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과 관련한 국정원의 증거 조작 의혹에 대한 비박 진영의 공세 움직임에서도 엿보인다.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은 3월10일 “증거 위조 논란에 대해서는 국정원장이 책임지고 사퇴하는 것이 국민에 대한 공직자의 바른 자세”라며 “국정원장이 사퇴하는 것이 대통령의 유감 표명에 상응하는 처사”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김용태 의원 역시 이 의원이 남 원장의 사퇴를 공식 거론한 직후인 11일 CBS 라디오에 출연해 “살이 부르르 떨린다”는 격앙된 표현까지 써가면서 “(이번 사건은) 국정원장이 대충 송구하다고 넘어갈 문제는 아니다. 국정원장이 스스로 판단해서 대통령에게 누가 되는 일을 (하지) 않도록 결정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이 의원과 김 의원은 정몽준 서울시장 후보를 지원하는 비박 핵심 인물이다. 정 후보 역시 “(남 원장 사퇴는) 오래전부터 해왔던 이야기”라고 가세했다.

국정원 증거 조작 의혹이 계속 확산되면 아직 80여 일 정도 남아 있긴 하지만 지방선거에서 여당 후보에게 상당한 악재가 될 전망이다. 전쟁터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비박으로서는 당연히 사태 해결을 촉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단순히 이들의 주장을 지방선거에만 국한해 바라보는 이는 많지 않다. 여당 내에서 전략가로 통하는 한 인사는 “비박이 남 원장의 사퇴를 촉구한 모양새지만, 사실상 박 대통령을 향해 사태를 ‘바로잡으라’고 신호를 보낸 것”이라며 “지금까지 비박이 조직적으로 청와대를 향해 목소리를 낸 적이 있느냐. 지방선거를 통해 비박이 부쩍 힘을 키운 게 실감 난다”고 말했다. 쇄신파의 상징으로 통하던 남경필·원희룡 후보도 이번 선거 결과에 따라서는 단숨에 여권의 ‘대권 주자’로 부상하면서 박 대통령 및 친박 핵심과 맞설 힘을 갖게 된다.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이 2월28일 국회 본회의에서 특별감찰관제 제정안에 대해 반대 토론하고 있다. ⓒ 연합뉴스
친박과 비박의 본격적인 세 겨루기는 서울시장 후보 경선장에서 불꽃을 튀길 전망이다. 현재 가장 유력한 두 후보인 정몽준 의원과 김황식 전 총리가 비박과 친박의 대표 주자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친박 내부의 움직임도 예사롭지 않다. 경선이 시작되기도 전에 일각에서 정몽준·이혜훈 후보의 ‘빅딜설’이 나돌고 있어서다. 이 후보가 올해 1월 정 후보의 지역구인 서울 동작을로 이사한 것이 최근 화제가 되면서, 정 후보가 서울시장 선거 출마로 의원직을 사퇴하면 그 지역구를 이 후보가 이어받을 수 있을 것이란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두 후보 모두 빅딜설을 부인하고 있지만, 당내 일각에서는 두 사람의 행보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두 사람이 손을 잡는다면 사실상 서울시장 후보 경선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지방선거 이후 7월 전대가 최대 격전장 

예상치 못할 정도로 비박이 몸집을 키우는 양상이 되자, 친박 당권파 사이에서도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당내 경선 룰을 두고 잡음이 일고 있는 부산시장 선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새누리당 내에서는 친박인 서병수 후보와 비박인 권철현 후보가 후보 자리를 두고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일부 부산시장 적합도 여론조사에서 권 후보가 서 후보를 앞지르는 결과를 보이면서 두 후보는 우위를 가리기 힘든 양상이 됐다. 권 후보는 ‘50% 여론조사 경선’을 요구하며 한때 “무소속 출마도 불사하겠다”고 저항했지만, 당 지도부에서는 원래 경선 방식(여론조사 20% 반영)을 고수했다. 당내 일각에서는 “여론 주목도가 높은 수도권 주요 단체장과 텃밭인 부산시장 선거마저 비박 후보로 채워지는 것을 피하기 위한 친박 당권파의 고육책”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친박과 비박의 갈등은 지방선거를 넘어 향후 7월의 당권 경쟁으로 더욱 격화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다. 새누리당은 지방선거에 앞서 현 당 지도부의 임기 만료(5월15일)에 맞춰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을 새 원내대표를 선출할 예정이다. 차기 원내대표 선거는 현재 정갑윤 의원(울산 중)과 이완구 의원(충남 부여·청양)의 양강 대결 구도가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두 의원 모두 친박계로 분류되지만, 정 의원이 당권파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과 달리, 이 의원은 비박 진영의 김무성 의원과 교감하고 있다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당권 경쟁의 전초전이 될 수 있는 차기 원내대표 경선을 앞둔 상황에서, 김무성 의원이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부산시장 선거를 비롯한 지방선거와 관련해 최대한 목소리를 자제하고 있는 것도 향후 당권 경쟁을 향한 ‘명분 쌓기’라는 분석이 당내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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