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토끼 꽉 가둬놓고 산토끼 잡아먹고 싶은데
  • 김회권 기자 (khg@sisapress.com)
  • 승인 2014.03.18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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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프롬이냐, 크림반도냐 선택의 기로에 선 푸틴

지난해 3월 러시아 언론 ‘vestifinance’는 러시아 구직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어디에서 일하는 것을 꿈꾸고 있는가?’ 구직자들이 꼽은 선망의 직장 1위는 ‘가스프롬’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같은 조사를 2009년에 실시했을 때도 가스프롬은 부동의 1위였다. 2009년 33%였던 응답률은 이번 조사에서 44%를 기록했다. 세계 최대의 가스회사이자 거대 에너지 기업인 가스프롬은 러시아의 얼굴이자 상징이다.

구직자들만큼이나 가스프롬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두고 서방 세계와 갈등을 거듭하고 있는 푸틴 대통령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존재가 가스프롬이다. 우크라이나 해법을 두고 고민해야 할 장애물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푸틴의 최측근들이 장악한 가스프롬

가스프롬은 세계 최대의 천연가스 생산량을 자랑하는 회사다. 원래는 소련 가스산업자원부가 모태다. 소련의 석유산업자원부는 소련 붕괴 전후의 혼란 속에서 생산 공단 및 유전 광구를 해체했다. 반면 가스산업자원부는 석유와는 반대로 움직였다. 해체되는 것을 막아냈고 오히려 가스 산업의 통일성을 유지하려고 했다. 가스의 경우 석유와 달리 파이프라인이라는 수송망이 정비되지 않을 경우 수입도 수출도 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조직의 통일성이 그 어느 산업보다 중요했다. 가스산업자원부가 해체의 위기를 딛고 1989년 만들어낸 국책 회사가 바로 가스프롬이다.

세계 최대 천연가스 회사인 가스프롬(사진 배경)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정치적 도구로 활용돼왔다. ⓒ AP연합
1991년 소련은 해체됐고 러시아가 탄생했다. 이 혼란 속에서도 가스프롬은 조직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정국은 어지러웠지만 가스프롬이 유럽에 대한 천연가스 공급을 끊은 적은 없었다. 오히려 신생 러시아에서 외화벌이의 최선두에 섰다. 난세의 영웅으로 떠오른 가스프롬은 점점 영향력을 공고히 했고 러시아 내에서 ‘국가 안의 국가’가 되어갔다.

가스프롬과 푸틴 대통령은 뗄 수 없는 인연을 갖고 있다. 러시아는 예나 지금이나 천연자원에 의존하는 경제 구조다. 그것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푸틴 대통령이다. 강력한 러시아를 외치며 2012년 자신의 세 번째 대통령 임기를 시작한 푸틴에게 여전히 강력한 원군은 가스프롬과 상승하는 글로벌 원자재 가격이다. 유럽과 동북아시아에 가스를 보내면서 에너지 안보로 외교력을 강화할 수 있고, 가스 수출로 발생하는 수입은 국내적으로 볼 때 강력한 통치 기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푸틴이 가스프롬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러시아가 탄생한 이래 국가 안의 국가로 불리던 가스프롬은 크렘린궁을 위협할 만큼 권력이 막강했고 갓 크렘린궁의 주인이 된 푸틴에게는 최대의 정적이었다. 푸틴의 측근이자 부관이던 알렉세이 밀러는 39세의 나이로 가스프롬의 대표이사가 됐는데 이때가 2001년 5월이다. 가스프롬 이사회가 39세의 젊은 경제학자를 CEO로 맞은 것은 푸틴이 대통령으로서 첫 임기를 시작한 지 1년이 막 지났을 무렵이었다. 푸틴은 밀러에게 가스프롬의 개혁을 주문했다.

푸틴은 밀러의 개혁 작업을 통해 가스프롬을 장악해갔다. 밀러는 지금도 여전히 가스프롬의 CEO로 남아 있다. 2000년부터 가스프롬 이사회 의장이었던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는 이후 총리와 대통령 그리고 다시 총리 자리를 번갈아 맡으면서 권력 2인자로 군림하고 있다. 메드베데프가 떠난 가스프롬의 빈자리는 푸틴의 또 다른 측근인 빅토르 주브코프가 메웠다. 그는 가스프롬으로 들어가 공석인 이사회 의장 자리에 앉았다. 이처럼 가스프롬은 푸틴의 최측근들이 거치는 회전문 역할을 했다.

그런 가스프롬과 우크라이나 역시 밀접하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두고 ‘천연가스 전쟁’으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유럽연합(EU)은 가스 공급의 약 30%를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다. EU가 러시아에서 수입하는 가스의 절반은 우크라이나 영토를 통과한다. 이 때문에 EU는 우크라이나 사태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볼 수 없다. 미국 정치권 안팎에서는 “EU에 미국의 천연가스 수출을 허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데 이것 역시 이번 사태의 핵심 키워드를 ‘가스’로 읽고 있기 때문이다.

“가스 공급 중단하면 가스프롬도 경영난”

만약 크림반도에서 군사 충돌이 일어난다면 러시아는 다른 파이프라인을 통해 가스를 수송해야 한다. 이럴 경우 1차적인 피해는 우크라이나가 입게 된다.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천연가스 통행료를 못 받기 때문이다. 투자회사인 캐피털 이코노믹스의 자료에 따르면, 우크라이나가 채무 상환을 위해 필요한 자금은 약 250억 달러다. 러시아 역시 이를 잘 알고 있다. 가스프롬이 3월2일 “우크라이나가 15억5000만 달러의 가스 대금 체납액을 갚지 않는다면 가스 공급을 할인 가격으로 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은 우크라이나의 약점을 공격한 발언이었다. 축출된 빅토르 야누코비치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러시아로부터 150억 달러의 재정 지원을 받기로 합의했다. 여기에는 천연가스 가격의 30% 인하도 포함돼 있었다. 이를 두고 많은 우크라이나인은 “우크라이나가 EU에 포함되는 것을 포기한 대가를 러시아가 지급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야누코비치가 우크라이나에 없는 지금, 러시아는 가격 인하 조치를 4월부터 당장 폐지하겠다는 엄포를 놓은 것이다.

러시아 역시 피해를 피할 수는 없다. ‘동유럽 가스(East European Gas)’의 미하일 코르쳄킨 대표는 “천연가스 공급을 중단할 경우 가스프롬은 200억 달러의 손실을 입게 되며 러시아도 약 60억 달러의 관세가 사라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200억 달러의 손실은 가스프롬의 경영을 어렵게 할 만큼 큰돈이다.

우크라이나를 우회해 천연가스를 수송할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수송 용량이 우크라이나를 통과하는 것보다 적다. 전문가들은 “우회 파이프라인을 쓸 경우 러시아는 EU와 계약한 가스량의 3분의 2 정도만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는 러시아 국내총생산(GDP)의 약 8%를 차지하는 가스프롬이 곧바로 위기에 처하게 된다는 뜻이다.

우크라이나의 친EU파는 천연가스의 흐름에 주목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경제가 받는 타격이 크지만 푸틴 대통령이 ‘크림반도보다 가스프롬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할 것이 분명하다고 이들은 내다보고 있다. 코르쳄킨 대표 역시 “그렇기 때문에 푸틴 대통령이 지금의 급박한 긴장 상태를 풀기 위해 움직일 것”이라고 예측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 가스프롬은 국제 사회의 제재를 받을 수도 있다. 이럴 경우 러시아에서 흑해를 통해 불가리아에 직접 닿는 ‘사우스스트림 파이프라인’ 같은 대형 프로젝트에 해외 투자나 대출을 끌어들이기 어렵게 된다. 가스프롬은 최근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셰일가스가 출현했고 러시아 내부에서도 다른 에너지 기업들이 경쟁 체제를 갖추면서 독점적 지위가 무너졌다. 그런 가스프롬에 사우스스트림 파이프라인은 우크라이나를 경유하지 않는 새로운 수출 루트이자 도약을 위한 사업이다. 이런 도전이 실패할 경우 푸틴이 정치적 도구로 이용해온 가스프롬의 영향력은 약해진다. 우크라이나를 보면서 가스프롬을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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