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사랑의 유토피아를 찾아서…
  • 김윤태│고려대 사회학 교수 ()
  • 승인 2014.04.16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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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공허함과 박탈감에 내몰린 4050세대의 일탈 욕구

“그렇다면 내게도, 나 자신 아직 미완성이던 그 시절을 되돌려주오. 나의 젊은 날을 되돌려주오!” 괴테의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문구다. 파우스트는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 인간의 ‘모든 삶의 충동을 억제하는’ 현실을 질타한다. 그리고 외친다. “도망치자! 일어나자! 저 바깥 넓은 세계로 나가자!” 파우스트는 중년이 된 괴테의 또 다른 자아인 동시에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현대 사회의 ‘중년’은 매우 독특한 삶의 중반부다. 괴테의 시대와 달리 고등교육 혜택으로 노인의 지혜를 일찍 얻는 동시에, 의학의 발전으로 젊은 활기를 유지한다. 중년은 노인과 청년 사이에 낀 세대가 아니라 인생 최고의 전성기다. 케임브리지 대학 생물학자 데이비드 베인브리지는 <중년의 발견>에서 동물과 달리 인간만이 중년의 시기를 갖는다고 했다. 인간은 중년기에 가장 지혜롭고, 마흔 이후에도 낭만적 사랑·섹스·출산 능력이 계속 유지된다. 중년은 어느 세대보다 부와 명예를 많이 가지고 있으며, 자유롭게 욕망과 쾌락을 추구할 수 있다.

가정과 직장에서 자기 존재감이 점차 위축됨을 느끼는 중년의 기혼 남녀들이 새로운 일탈의 유혹에 빠져들고 있다. 사진은 영화 의 한 장면.
그러나 한국의 중년은 다르다. 대중 교육 시대의 수혜자로 중산층이 되었지만 외환위기 이후 고용 불안에 직면했다. 고령화 시대에 노후 불안은 더욱 커졌다. 현재 4050세대는 노인 세대를 부양하는 동시에 젊은 세대의 도전에 직면하는 이중 부담을 갖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쌓아올린 모든 것이 무너지는 현실에 직면하고 있다. 한국의 중년은 불안하다.

4050 문화적 소비 논리는 ‘노스탤지어’

한국의 4050세대는 1950년대 중반 이후 1960~70년대에 태어난 ‘전후 세대’다. 이들은 고등교육 혜택을 받았으며, 상당수가 부모의 교육열로 세대 간 상향 이동을 경험했다. 대다수는 고졸 또는 대졸 학력으로 생산직·사무직에 진출해 급속한 산업화의 집중적인 수혜층이 되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20대 대학생과 30대 화이트칼라로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주도했다. 이들은 고도성장의 혜택을 받았지만, 군사정부의 압제에 저항했다. 최대 인구집단으로 부상한 이들은 1997년과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과 노무현을 지지하며 한국 정치를 바꿨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자신들의 삶도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자신들이 선출한 김대중 정권이 주도한 기업의 구조조정으로 일자리가 불안해졌다. 특히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아 정리해고와 명예퇴직으로 직장을 떠나야 했다. 노무현 정권이 들어선 후 정규직이 줄어들고 비정규직 비율은 더욱 높아졌다. 화이트칼라가 대세였던 중산층은 영세 자영업자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세계 최대 비율의 한국 자영업자들은 세계 최고 수준의 도산율에 직면했다. 반면에 자녀 사교육비, 등록금, 결혼 자금의 부담이 증가했다. 가계 대출로 빚더미는 커져만 갔다. 하우스푸어는 계속 늘어났다.

4050세대의 위기는 중산층의 위기다. 1997년 외환위기 이전에는 전체 가구의 70% 이상이 스스로 중산층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2013년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중산층은 40% 수준으로 내려간 반면, 서민층이라고 생각하는 비율이 50%에 육박하고 있다. 한국의 번영을 상징하던 중산층의 생활수준은 점점 하락했다. 세계 금융위기 이후 4년 동안 실질임금은 마이너스로 추락했다. 성장의 과실이 가계보다 기업 소득으로 더 많이 분배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2014년 통계청이 발표한 2013년 실질 가계 소비는 마이너스 성장으로 내려갔다. 한국의 중산층은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4050세대는 산업화의 수혜를 누리는 마지막 세대가 되었지만, 정보화 시대를 여는 새로운 세대이기도 하다. 컴퓨터의 대중화와 인터넷 사용은 엄청난 기회를 제공했다. 한컴·네이버·다음 등을 창업하며 수많은 신화를 남겼고, 2000년대 벤처 열풍을 주도했다. 지금 대권 주자로 자리매김한 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도 그 대열에 있었다. 영화감독 박찬욱·봉준호는 새로운 문화 아이콘이 되었다.

최근 한국 대중문화에 빅뱅이 일어났다. 연간 4만건의 공연, 2000건의 뮤지컬이 무대에 올라가고, 6만종의 책이 서점에 나온다. 해마다 700여 편의 영화가 개봉되고, 영화 관람자 수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기술과 자본의 결합으로 한류는 세계적 진출을 꾀하는 산업이 되었다. 한류를 대표하는 걸그룹 마니아에는 4050세대가 자리 잡고 있다. 씨스타는 4050세대에게 가장 사랑받는 아이돌 그룹이며, 직렬5기통 춤으로 인기를 끈 크레용팝은 ‘팝저씨’ 팬을 몰고 다닌다. 그뿐이 아니다. 4050세대가 주도하는 인문학 열풍, 고전 열풍이 뜨겁다. 이러한 4050세대의 문화적 소비에 숨겨진 논리는 바로 ‘노스탤지어(향수)’다.

인터넷 ‘밴드’에 빠져 동창회 열풍 부활

최근 인터넷 ‘밴드’ 열풍이 뜨겁다. 스마트폰을 든 4050세대가 밴드 열풍에 빠져들었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와 달리 폐쇄형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로 동창회 모임이 활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2030세대 시절 ‘아이러브스쿨’을 통해 일어났던 동창회 열풍이 재연되고 있다. 폐쇄형 SNS는 아는 사람만 그룹을 만들어 소통한다. 여기에다 동창 찾기 기능까지 추가돼 4050세대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카톡·카톡스토리에도 4050세대가 대거 몰린다. 인터넷 시대의 첫 세대인 이들이 SNS에서 과거의 인연을 찾는 것은 아이러니다.

전자문명이 만든 가상 네트워크는 개인과 개인의 관계, 사회적 유대를 형성한다. 우리는 가상적 관계가 실제적 관계를 능가하는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실제로 만나서 대화하는 시간보다 SNS를 통해 소통하는 시간이 훨씬 많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더 외롭다. 수많은 사람과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지만,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이 훨씬 늘어나는 현실은 매우 역설적이다. 인터넷에서 이뤄지는 소통은 지속적인 우정이나 사랑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연결되는 만남에 불과하다. 폴란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서 현대인들이 트위터 팔로어를 늘리는 동안 진정한 인간관계를 잃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유동하는 세계에서 모든 관계는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한국의 중년은 인터넷에서 잃어버린 자아를 찾으며 마음속의 노스탤지어를 쫓는다. 

최근의 밴드 열풍은 우리네 직장 문화의 변화와 대조된다. 우리는 점차 모든 조직이 네트워크로 바뀌고, 유연한 노동시장이 확장되며, 자주 직장을 옮겨야만 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미국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뉴캐피탈리즘의 문화>에서 미국의 자유시장경제 체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점차 다른 사람을 대하거나 평가할 때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는 관심이 없고, 그 사람의 잠재력만 계산할 뿐이라고 지적했다. 1990년대 후반 한국 사회도 급진적으로 미국화되면서 비슷한 조직 문화가 출현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가까워지면 얼마나 이득을 얻을 것인지만 생각한다. 우리의 인간관계는 장기적 관계보다는 단기적 관계 중시로 이동한다. 회사의 업무는 효율성에 집중하는 대신, 다른 사람을 깊이 이해하려는 문화는 사라진다. 다른 사람의 과거에 대한 관심이 없다는 것은 자신의 과거에 대한 자부심도 사라진다는 의미다. 스펙을 통해 내가 가진 효용성을 입증하는 것만 중요하고, 자신의 인생은 망각한 채 살아간다. 결국 자신의 인생에 관한 이야기는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다.

인터넷에서 만나는 사람도 현재의 욕망을 채워줄 상대만 찾을 뿐이다. 또는 다시는 만나지 않을 상대에게 욕설을 퍼부어 상처받은 감정을 배출한 채 사라진다. 어차피 그들은 다시는 만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년 기혼 남녀의 운명적 사랑을 그린 영화 은 국내에서도 개봉돼 큰 반향을 일으켰다.
‘사랑 없는 결혼’ 자리에 ‘결혼 없는 사랑’ 위치

남녀 간의 사랑에서도 점점 낭만적 사랑보다 차가운 계산이 지배한다. 결혼정보회사의 연봉에 따른 회원 등급은 돈이 지배하는 사회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대신 잃어버린 사랑의 유토피아를 되찾기 위한 상업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다. 미국 사회학자 에바 일루즈는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에서 미국의 중간 계급이 노동 계급보다 소비자본주의가 제시하는 낭만적 사랑의 이미지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사랑은 초계급적이거나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소비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각본 속에서 불평등하게 소비된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중간 계급의 전유물로 간주된 낭만적 사랑은 광고, 로맨스 판타지, 여가산업, 이벤트업체, 결혼정보회사, 미디어를 통해 지속적으로 상업화되고 대중화된다. 사랑은 기획상품이 되고 이벤트가 된다. SBS <짝>처럼 사랑은 게임이 되고 리얼리티쇼가 된다. 제조화된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불안한 현실의 신속한 탈출구가 된다. 나아가 사랑은 마치 종교 또는 주술과 같은 신비한 힘을 갖는다. 다른 한편 벤저민 플랭클린이 말한 대로 ‘사랑이 없는 결혼’이 있는 곳에 ‘결혼이 없는 사랑’이 등장한다. 결국 안방극장의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소설, 영화에 이르기까지 불륜이 단골 소재로 떠오른다.

최근 40대 여배우 김희애를 주인공으로 기혼 여성의 불륜을 다룬 드라마 <밀회>의 인기가 치솟고 있다. 간통죄가 존재하는 한국 사회에서 불륜은 역설적으로 혐오감을 주는 범법 행위가 아니라 대리만족을 제공하는 가상 상황이 되었다. 급기야 최근 유부남·유부녀를 대상으로 온라인 데이트를 알선하는 웹 사이트가 등장했다. 2001년 캐나다에서 시작한 ‘애슐리 매디슨’은 지금 전 세계 35개국에 진출한 다국적 기업이 되었다. 불륜을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지만, 한국에서도 대규모 회원 모집에 성공하고 있다. 부부 갈등과 이혼 위기가 급증하는 현실에서 낭만적 사랑은 또 다른 노스탤지어의 분출구가 되고 있다.

“내 가슴속에 아아! 두 개의 영혼이 깃들어서 하나가 다른 하나와 떨어지려고 하네. 하나는 음탕한 애욕에 빠져 현세에 매달려 관능적 쾌락을 추구하고, 다른 하나는 과감히 세속의 티끌을 떠나 숭고한 선인들의 영역에 오르려고 하네.” 괴테의 파우스트가 외친 말이다. 불안한 현대인은 두 개의 영혼에 사로잡혀 있다. 파우스트는 ‘마법의 외투’를 얻기를 바랐지만, 한국의 중년에게 마법의 외투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텔레비전, 영화, 소설, 광고는 우리를 노스탤지어로 이끈다. 온라인 데이트 회사 애슐리 매디슨은 불안한 대한민국의 중년들을 이렇게 유혹한다. “인생은 짧다. 연애하라.” 아 참, 여기에 빠져 있는 한마디! “그러면 우리는 돈을 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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