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가슴에 손을 얹을 뿐
  • 김인숙 | 소설가 ()
  • 승인 2014.05.07 16:2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화를 보다가 눈물을 흘려본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법하다. 손등으로 닦아서 아닌 척할 수 있는 정도의 눈물이 아니라 걷잡을 수 없이 울음이 터진 적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영화관이 밝아진 후에도 고개를 숙인 채 흐르는 눈물을 감춰야 했던 그런 경우들 말이다. 책을 읽다가는 어땠을까. 소설을 보다가 울음이 터져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했던 경험이 몇 번 있다. 밝은 낮의 도서관에서 난데없이 울음이 터져 칸막이도 없는 책상에 엎어져 한동안 눈물을 참고 있어야 했다. 권정생의 동화집을 읽던 중이었다. 제목은 <하나님의 눈물>. 토끼 한 마리가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를 못하는데 그 이유가 풀이나 꽃잎을 아프게 할 수 없어서다. 이 짧은 동화를 이토록 건조한 줄거리로 소개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안타깝다. 오늘 같은 날은 쓸데없는 소리 다 관두고 그 착한 토끼 이야기만 전부 인용해도 좋을 텐데. 토끼의 마음이 너무 깊어서 심지어는 하나님까지 눈물짓게 한 그 이야기를 말이다.

그 이야기를 읽다가 울음이 터졌던 것은 대학생 때였다. 부끄러움이 뭔지 지금보다 더 많이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더 깊게 느끼던 시절이었던 것만큼은 사실이리라. 한 마리 토끼보다도 사랑을 모르고 슬픔을 모르는 내가 부끄러워서, 당시에는 데모의 현장으로 더 많이 구실했던 도서관에서 혼자 울었더랬다. 세상이 바뀌고, 부조리도 없어지고, 정의가 당연한 세상이 되면, 아니 그 모든 거창한 말들은 다 관두고라도 그저 상식이 상식대로만 통하는 세상이 되면, 이 이야기도 이렇게 마음이 아프고 이렇게 나를 부끄럽게 하지는 않으리라 여겼었다.

바스콘셀로스의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도 그 시절에 읽었던 책이다. 가난한 소년 제제가 주인공으로, 아버지만큼이나 나이가 든 어른인 뽀르뚜까와의 우정과 사랑을 그리고 있다. 뽀르뚜까가 사고로 죽었을 때 제제는 깊은 병에 빠진다. 마음과 몸이 같이 아파서 거의 죽음에까지 이른다.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보지 못한다는 것은 개구쟁이 소년에게마저 그토록 깊은 상실인 것이다. 아프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슬픔인 것이다.

에밀 아자르로도 알려진 로맹가리의 <자기 앞의 생>을 보다가도 울음이 터졌었다. 창녀에게서 태어나 창녀에게 버려진 고아 소년 모모와 늙은 창녀 로자의 이야기다. 로자의 마지막을 지키고, 죽음까지 지키는 모모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의 마지막 문장은 ‘사랑해야 한다’로 끝이 난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누군가를 지키는 것이고, 그 지키는 마음은 풀잎 한 잎 아파하는 것조차 못 견딜 정도의 마음이다. 이 소설은

고등학교 때도 읽었고, 대학교 때에도 읽었고, 그 후 10년, 20년이 지난 뒤에도 다시 읽었다. 그사이에 나는 어떻게 나이가 들었을까.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부끄러워서 울음을 터뜨릴 줄 알았던 스무 살 대학생이 대학을 졸업한 딸을 두게 될 때까지는 이 세상은 얼마나 많이 떳떳해지고, 얼마나 많이 정의로워졌을까.

미안하다는 말이 요즘처럼 미안한 때가 없다. 말이 그것밖에 없어서 그렇게밖에는 말할 수 없는 것조차 미안하다. 시론의 한 칸을 맡았다고 무슨 말을 더 덧붙이랴.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조차 미안한 이날들에. 진도 앞바다가 아니라 우리들 모두의 가슴에 묻힌 수백 명의 아이들을 생각하며, 그저 가슴에 손을 얹을 뿐이다.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