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시대를 증언하다] 고속버스 안내양이 스튜어디스보다 인기
  • 정준모│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 ()
  • 승인 2014.05.28 17:4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속도로·고가도로·육교…토건 시대의 상징

얼마 전 서울 풍경의 한 축을 이루던 아현고가도로가 사라졌다. 한때 ‘번영’과 ‘발전’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것이 고속도로·고가도로·육교·지하도였다.

도시 풍경은 1966년 4월1일 김현옥이 서울시장에 취임하면서 급속도로 변했다. 여의도 개발, 남산 제1·2호 터널, 영동지구(지금의 강남) 개발, 세종로 지하도 건설 등 주요 토건 사업이 그의 재임 시 벌어졌다. 이 ‘불도저 시장’은 1970년 와우아파트가 붕괴되면서 사임한다.

당시 서울은 효율성과 속도를 중시하는 도시였다. 청계천고가도로는 ‘선진화’ ‘세계화’된 서울의 상징이었다. 극장에서 영화가 상영되기 전 울려 퍼지던 애국가의 배경화면과 교과서에 청계천과 ‘마천루’ 삼일빌딩이 교차하는 사진이 실릴 만큼 중요하고 자랑스러운(?) 풍경이었다. 공사 시작 당시에는 ‘삼일고가도로’라 불렀던 청계고가도로는 청계천 복개 과정에서 생겨난 산물이다. 1967년 8월15일 중구 광교에서 동대문구 용두동까지 갈이 6991m, 폭 16m의 고가도로 공사가 시작돼 1971년 8월15일 완공됐고, 1976년 8월 태평로, 즉 청계천로 입구까지 연장됐다. 공사 시작은 청계고가도로가 먼저였지만 1968년 2월3일 착공해 그해 9월19일 준공된 아현고가도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가도로다.

1970년대 청계고가도로와 삼일빌딩(오른쪽). ⓒ 정준모 제공
아현고가, 우리나라 최초의 고가도로

1967년 1월 착공해 그해 12월 완공된 삼각지 입체 교차로는 한강과 서울역·용산·이태원 4방향으로 통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입체 교차 시설이다. 1085m 길이에 폭 7.5~15m의 4차로로 준공식에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참석할 만큼 중요한 사업이었다. 지방에서 온 관광버스가 방향을 잃어 다른 방향으로 내려갔다거나 버스가 한 바퀴 돌 때마다 1년씩 수명이 연장된다는 속설이 있을 만큼 유명세를 치렀다. 게다가 가수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로 인해 더더욱 유명해졌다.

고가도로는 교통체증을 해소했다는 평가와 도시 경관을 해치고 정체와 사고를 일으킨다는 극과 극의 평가가 있지만, 시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닐까. 육교도 마찬가지다. 당시에는 교통량이 늘어나면서 많은 사람이 자신의 동네에 육교 개설을 희망했다. 하지만 유모차나 휠체어가 다닐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는 법이다.

1968년 4차로의 경인고속도로에 이어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일제가 군사용·침탈용으로 닦았던 ‘신작로’는 고속도로 이미지로 대체된다.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은 서독 방문에서 독일의 아우토반을 보며 고속도로 건설을 결심한 것으로 전해진다. 들끓는 반대 여론에도 1968년 2월1일 착공한 경부고속도로는 불과 2년 5개월 만에 완공된다. 고속도로 개설로 전국이 ‘1일 생활권’으로 묶였다. 수도권과 영남을 잇고, 수출입항인 인천과 부산을 잇는 ‘산업 대동맥’이 생긴 것이다. 왕복 4차로로 총 416㎞에 달하는 경부고속도로의 총 건설비는 384억5600만원, 용지비 20억100만원, 부대비 25억1600만원을 포함해 429억7300만원, 연 인원 900만명이 동원된 대역사였다. 1970년 7월7일 대구에서 준공식을 가진 후 5개월 뒤 상행선 추풍령휴게소에 경부고속도로 준공 기념탑을 세운다. 당시 서울대 미술대학 교수 송영수 작품으로 당시 시대적인 아이콘으로 등장했던 네 잎 크로버 형태의 인터체인지 모양을 차용해서 ‘세계 고속도로 건설 사상 가장 짧은 기간에 이뤄진 이 고속도로를 자랑하기 위해’ 서울-부산 간 고속도로의 중간이며 가장 높은 추풍령에 높이 30.8m의 탑을 세웠다. 기념탑 정면에는 공사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부조로 새겨져 있고 ‘서울-부산 간 고속도로는 조국 근대화의 길이며 국토 통일에의 길이다’란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과 이한림 당시 건설부장관의 축사 일부가 새겨져 있다. 경부고속도로 공사에서 사고 등으로 사망한 이는 77명에 달했다. 이들을 기리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순직자 위령탑’은 금강휴게소에 세워졌다.

ⓒ 정준모 제공
양택식 서울시장, 지하철 건설 밀어붙여

호남고속도로 완공 기념탑은 조각가 이일영이 맡아 1975년 섬진강휴게소에 높이 25m로 세워졌다. 경인고속도로 개통은 길이는 짧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고속도로로 고도성장 시대를 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경인고속도로는 서울에서 인천까지 1시간이나 걸리던 이동 시간을 18분대로 단축시켰다. 경부고속도로에 이어 호남·영동고속도로도 공사에 착공해 1970년 대전에서 전주 구간, 신갈에서 새말 구간이 완공되고 1973년 11월 호남고속도로의 나머지 전주에서 순천 구간과 남해고속도로가 완공됐다. 영동고속도로도 1975년 새말에서 강릉 구간이 개통돼 고속도로의 시대를 열면서 접근이 어렵던 동해안과 설악권에 관광객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열차 중심의 이동과 여행 패턴도 고속버스로 대체된다. 많은 고속버스 회사가 설립돼 전국을 이었다. 이때 등장한 신종 직업이 고속버스 안내양이다. 고졸 이상의 학력을 갖추고 어려운 시험과 엄격한 선발 과정을 거친 안내양은 스튜어디스 이상의 인기 직종이었고 자부심도 강했다. 이들은 버스 안내는 물론 특히 자동차 여행에 익숙하지 않아 차멀미를 하는 손님들을 돌보는 것이 주 업무였다. 고속버스가 각 도시를 운행하면서 시외버스정류소를 새로운 고속버스터미널이 대체하고 부도심으로 정착하면서 도시의 이미지를 바꿨다. 고속도로 건설 과정에서 습득한 토목 기술은 해외 건설 진출로 이어졌다.

서울 시내를 운행하던 전차는 1968년 11월30일자로 운행을 중단한다. 1973년 핵 대피소를 겸해 개통된 평양지하철 완공 소식과 500만명에 육박할 만큼 급증한 서울 시민의 대피시설 필요성으로 인해 1970년 4월 서울시장으로 부임한 양택식은 지하철 건설을 계획한다. 철도청장을 역임한 그의 지하철 계획은 당시 경제기획원장관 김학렬의 극심한 반대에 부닥쳤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지하철 건설 쪽에 손을 들어줬다. 1971년 4월12일 공사에 들어간 서울역에서 청량리역까지 7.8㎞ 구간(지하철 1호선)은 3년 후인 1974년 8월15일 완공됐다.

오늘날 총 거리 327.2㎞의 지하철 1~9호선은 수도권 전철과 이어지면서 오늘의 수도권 여객 운송의 대부분을 감당하고, 산업화의 상징이던 청계고가도로는 헐리고, 삼일빌딩은 고만고만한 서울 시내 빌딩으로 전락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