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보’ 딱지도 못 뗀 2인자 어디 안대희뿐이랴
  • 김현일 대기자 ()
  • 승인 2014.06.03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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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돼도 총리 자리 앉기 쉽지 않아…대통령의 ‘착각’과 검증 소홀이 화 키워

국무총리 하면 얼핏 대통령 바로 아래 ‘2인자’ 같지만, 사실 대단한 자리가 못 된다. 행정부의 2인자일 뿐 국회의장·대법원장·헌법재판소장 다음의 의전 서열 5위 자리다. 물론 이도 높은 자리이긴 하지만 ‘거기까지’다. 건국 이래 지금의 42대 정홍원 총리에까지 이르렀지만, 역대 총리 가운데 퇴임 후 대통령에 오른 사람은 최규하 전 대통령 딱 한 명밖에 없다. 최 전 대통령도 사실상 1979년 총리였던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10·26 사건으로 갑자기 운명하는 비상 상황으로 인해 얼떨결에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고, 이후 10대 대통령으로 정식 취임했지만 유신 정권인 4공화국에서 새로운 5공화국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잠시 관리하는 임시 대통령 성격이 짙었기 때문에 ‘최규하 정권’으로 명명하기조차 어렵다. 실제 최 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가운데 10개월이라는 가장 짧은 재임 기간을 기록하고 있다.

‘변호사 수익금 11억 원 헌납’으로 성난 민심의 예봉을 피해보려던 안대희 국무총리 후보자가 여론이 되레 악화되자 5월28일 후보 사퇴를 전격 발표했다. ⓒ 연합뉴스
총리 후보자 낙마, 대통령 권위 실추로 직결

총리에 발탁되면서 차기 유력 대권 주자로 발돋움하는 이는 여럿 있었고, 실제 몇몇은 대권에 도전하기도 했지만 성공한 예는 없었다. ‘영원한 2인자’로 불린 김종필(JP) 총리가 그랬고, 이회창·고건·이해찬·정운찬 전 총리 등이 그랬다. 대개는 퇴임 후 국가 원로로 대접받는 정도다. 그렇다고 해서 재임 중 ‘법에 명시한’ 총리로서 제대로 기능했는지도 의문이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의 이해찬 총리를 제외하면 자기 책임하에 소신을 갖고 국정을 주도한 ‘책임 총리’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대개가 ‘의전 총리’ ‘대독 총리’였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JP도 ‘실세 총리’였는지 몰라도 책임 총리와는 거리가 다소 있다. 역대 다른 총리보다 행동반경이 넓었고, ‘차기’ 가능성 때문에 추종자들이 모여들기는 했지만, 서슬 퍼런 대통령 아래서 행동반경이 빤했다는 말이다.

김영삼(YS) 대통령 시절 이회창 총리는 청와대의 견제를 견디고 훗날 대권에 도전하긴 했지만 재임 중 굴신의 여지는 별로 없었다. 애당초 그를 총리로 발탁한 게 ‘까칠하게’ 구는 임기보장 감사원장을 현직에서 빼돌리려는 YS의 복안에 불과했던 비화가 말해주듯 총리라는 자리가 원래 소리만 요란한 것이라고 해도 과히 틀리지 않는다. 대통령에게 견마지로의 충성을 다했음에도 독자 세력을 키우다가 칼을 맞은, 이승만 대통령 시절의 족청(族靑·민족청년단) 우두머리 이범석 총리의 경우는 2인자의 한계를 웅변하는 전형적 사례다.

그러니까 총리 임면은 국정이란 큰 바둑을 두는 대통령의 행마(行馬)의 한 수쯤으로 봐도 무방하다는 얘기가 정치권에서 회자되는 것이다. 머리 큰 2인자를 좋아하는 1인자가 없을뿐더러, 비단 1인자에 의해서가 아니더라도 경쟁 세력에 의해 깊은 상처를 받기 십상인 것이다. 그래도 총리 자리에 무사히 오른 것만도 다행일 법하다. 그나마 ‘후보자’ 내지 ‘서리(署理)’에 그친 이도 꽤 많은 까닭에서다. 그동안 얼추 10명 정도가 총리에 지명됐다가 실제 취임도 못 하고 낙마했다. 제왕적 위세를 누리던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은 아예 해당 상황이 없다. 그때는 청문회도 없었고, 대통령이 임명하면 그만이었다. 따라서 청문회 도입 이후의 후보자를 제외한 이는 모두 건국 초기의 인물들이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 이윤영·신성모 총리서리, 2공화국 당시의 김도연 총리서리 등이다. 따라서 ‘총리가 될 뻔’하다 문턱에서 낙마한 서리 혹은 ‘후보자’에 대한 논의는 국회 인사청문회가 도입된 2000년 6월 김대중 정부 시절 이후부터를 따지는 게 맞다.

김대중(DJ) 대통령은 2002년 장상 이화여대 총장을 후보로 지명했다. 여소(與小) 국회의 약점을 헌정 사상 첫 여성 총리라는 점을 내세워 돌파하려 했으나 위장전입과 부동산 투기, 허위 학력 기재, 아들의 이중 국적 문제가 터져나오면서 임명 동의 벽을 넘지 못했다. 다급해진 DJ는 장대환 매일경제신문 사장을 후보로 지명했으나, 그 역시 부동산 투기 의혹과 자녀 위장전입 등이 거푸 터져나오면서 낙마했다. 장 후보의 경우 대구를 출생지로 표기해왔으나 전남 나주가 고향인 장지량 전 공군참모총장의 아들로서 DJ와 특수관계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더욱 거친 질문 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두 총리 후보의 연이은 낙마에다 권력형 비리와 관련한 아들들의 구속 사태가 벌어지면서 DJ는 걷잡을 수 없이 레임덕에 빠져들었다.

ⓒ 시사저널 이종현·임준선
김용준 이어 안대희까지…박 대통령 위기

역대 첫 호남 출신 총리는 전두환 대통령 시절의 김상협 총리(전북 부안)였다. 이후 진의종·황인성·고건 총리가 나왔으나, 이들은 모두 전북 출신이다. 이명박(MB) 정부 시절 김황식 총리가 전남(장성) 태생의 첫 총리였다. 당시 MB가 김 총리를 후보로 내세운 주요한 배경의 하나가 고향이었는데, 야당의 검증 공세를 무디게 하려는 이 전략은 주효했다. 세종시 문제로 안팎의 시련에 직면했던 MB는 김황식 총리를 내세우기 전 ‘40대 김태호 총리’ 카드로 일대 국면 전환을 시도하려 했다. 차기 대권 카드를 써서 판을 근본적으로 흔들려는 다목적 수순이었으나 되레 화를 키웠다. 거기에 김 후보의 ‘박연차 게이트’ 관련 해명이 거짓으로 드러나면서 아예 본회의 표결에도  못 가는 망신을 당했다.

난국에 처했을 때 역대 대통령이 구사하는 가장 큰 카드 중 하나는 개각이요, 총리 지명은 그 하이라이트다. 그런 만큼 계산이 어긋나면 후폭풍은 더 강하게 마련이다. 5년 단임제 대통령의 경우는 곧장 레임덕에 빠져들 위험성이 다분하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의 경우엔 지난해 첫 총리 내정자인 김용준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이 아들 병역 문제, 내부 정보를 통한 부동산 매입 의혹 등으로 5일 만에 사퇴해버렸다. 클린 이미지를 강조한 김 내정자의 낙마로 박 대통령은 첫걸음부터 인사 패착 시비에 휘말렸다. 박 대통령은 이후 국방부장관 임명 등에서 숱한 실수를 연발, ‘제 식구만 싸고도는’ 독선·불통 대통령이라는 딱지를 붙여야 했다. 이런 마당에 이번에 ‘안대희 파동’이 돌출했다. 1년 3개월 만에 똑같은 검증 실패가 일어나면서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을 비롯한 청와대 참모진은 물론 대통령의 관(觀) 자체에 문제가 크다는 비난이 가중되고 있다. 한마디로 대통령이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이른바 ‘관피아’로 불리는 전·현직 공무원의 부패 고리를 혁파한다면서 ‘관피아’의 원조 격인 ‘법피아’의 그릇된 행태를 시현한 장본인을 내정한 처사가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안대희 지명은 청와대의 자기모순 내지 부정의 결정판이라는 지적이다.

청와대가 사실상 낙점한 것으로 알려진 인사들이 지방선거 공천 경쟁에서 잇따라 패퇴하고, 황우여 전 새누리당 대표의 국회의장 도전이 무위로 돌아가는 등 대통령의 권위 퇴색이 확연한 지금이다. 역대 대통령 모두 자신의 권력이 공고하다는 착각 속에 살다가 흉한 모습으로 퇴장해야 했다. 역사에는 예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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