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마리 용 승천시킨 조용한 책사
  • 김현일 대기자 ()
  • 승인 2014.06.18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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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기 국정원장 내정, 국정원 개혁 적임 기대 속에 불법 대선자금 전달 전력 시비도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 인사에 따른 파장이 워낙 거센 탓에 상대적으로 조명을 덜 받는 인사가 있다. 국정원장 후보자로 내정된 이병기 주일 대사가 그다. 이 대사가 국정원장으로 내정됐다는 소식에 여권과 외교안보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오랜만에 제대로 한 인사”라는 반응이 나왔다. 될 만한 사람이 자기 자리를 찾아갔다는 것이다.

이 후보자는 1974년 외무고시에 합격한 후 주케냐 대사관 1등서기관으로 근무하다 1981년 노태우 정무장관의 비서관이 됐다. 이를 계기로 그는 ‘노태우의 사람’이 되었다. 노태우 체육·내무부장관 비서관,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 비서실장, 민정당 총재 보좌역 등을 거쳐 1988년 대통령 의전비서관, 1990년 대통령 의전수석비서관 등 줄곧 노태우 전 대통령을 따랐다. 이후 외교안보연구원 연구위원으로 옮겼다가,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6년 안기부(국정원의 전신) 2차장을 지냈다. 그리고 2001년 이회창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 총재 안보특보, 2002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정치특보를 거친 뒤 2005년부터는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 고문으로 있었다. 외무공무원인 그가 외도를 하게 된 것은 군복을 벗고 정치인으로 변신하게 된 노태우 보안사령관으로부터 인재 추천을 부탁받은 당시 노신영 외무부장관이 그를 선뜻 천거해서였다.

이병기 국정원장 내정자. 외유내강의 이 내정자가 흔들리는 국정원의 재건과 개혁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어떻게 풀어낼지 주목된다. ⓒ 시사저널 박은숙
노태우·김영삼·박근혜 ‘킹메이커’ 역할

이병기 후보자는 일찍이 최고 권력자의 측근 중 측근이 됐지만 호가호위(狐假虎威)하지 않았다는 평가를 듣는다. 그는 43세 때 차관급인 대통령 의전수석비서관이 됐으나 거들먹거리는 치기를 보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친정인 외교부를 포함해 선배 공무원들이 마음 상할까 말투조차 가려가며 했던 그를 기억하는 관계자들이 많다.

1991년 한·중 국교 정상화가 이뤄진 직후 중국 특사가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 외교부 의전팀이 ‘타이완 국가’를 연주하는 황당한 사고를 저질렀다. 이때 기지를 발휘해 상대 특사를 마음 상하지 않게 무마하고 불똥이 외교부로 튀는 것을 차단했던 일화가 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역대 대통령 평가에서는 하위권을 맴돌지만 외교안보 부문에 대한 평가는 높다. 중국·소련과의 국교 정상화 등 이른바 북방외교를 성공시킨 업적 덕이다. 당시  전략 수립과 진행 단계의 아슬아슬한 고비에서 노 대통령을 보필했던 게 이병기 의전수석이었다.

1988년 2월26일 노태우 대통령은 취임 다음 날 손가방을 들고 청와대 집무실에 들어선다. ‘보통사람 시대’를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워 승리한 대통령다운 장면을 연출한 것이 이병기 비서관이다. 전두환 대통령의 절대권력하에서 2인자로 불렸던 장세동 안기부장은 차기 대권 라이벌이던 노태우 민정당 대표에 대한 ‘물 먹이기’ 공세를 전 방위로 가했지만, ‘이병기 보좌역’에 의해 차단되곤 했다. 장세동 부장의 안기부가 중앙일보 편집국장·정치부장·담당 기자를 남산 지하실로 연행하는 바람에 중앙일보 기자들이 이틀간 철야농성을 벌인 1985년의 ‘중앙일보 사태’도 한 생생한 사례다.

유순한 풍모이고, 실제 온화한 성품이지만 임무에 돌입하면 매서운 사자로 변한다는 평을 듣는다. 노태우 정부의 ‘부통령’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실세였던 박철언 장관을 정면으로 견제한 이가 이병기 의전수석이었다. 박 장관의 위세에 눌린 민정비서실마저 손을 놓고 있을 때 관련 비위 자료를 노 대통령에게 직보한 것이다. 이런 그에게 주변에서 심한 음해가 이어졌고, 여기에 근거해 이 수석을 추달하던 노 대통령이 진실을 확인하고는 정색하며 사과한 일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92년 대선을 앞두고, 김영삼(YS) 민자당 대표최고위원과 박태준·이종찬 등 민정계 중진들 사이에는 대선 후보 자리를 둘러싼 알력과 갈등이 팽배했다. 소위 노심(盧心)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민정·민주·공화 3당 합당으로 생겨난 민자당이었기에 후계 구도가 더욱 복잡·치열한 것은 정한 이치였다. 이때 순리를 강조하며 노 대통령으로 하여금 YS를 선택하도록 강력 주장한 그룹에 이 수석이 있었다. 이후 대통령이 된 YS는 그에게 외교부 차관 자리를 제의했으나 “선배들이 국장급인 마당에 당치 않다”며 외교안보연구원을 택했고, 나중에 안기부장 특보로 지금의 국정원과 연을 맺는다. 1997년 황장엽 전 북한 조선로동당 비서의 망명 사건 때 공작을 총괄했다.

지난 4월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 서류 조작과 관련해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한 남재준 국정원장. 박근혜 정부 첫 국정원장인 그는 만신창이가 돼 씁쓸하게 퇴장했다. ⓒ 연합뉴스
“국정원장은 국민과 소통하는 자리”

1998년 안기부 2차장에서 물러난 후 일본 게이오 대학 객원교수로 있던 이병기 후보자는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 후보 정치특보로 정계에 들어왔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후폭풍으로 공황 상태에 빠진 한나라당의 구원투수로 등장한 박근혜 대표의 참모가 되면서 그는 ‘친박’ 대열에 합류한다. 2004년 총선에서 다 쓰러져가던 한나라당을 소생케 한 이른바 ‘천막당사’는 이 후보자의 아이디어였다. 박대통령이 그에 대한 신뢰를 더욱 굳히는 계기였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때 ‘박근혜 후보’의 선대위 부위원장이었으나, ‘이명박 후보’에게 패한 이후엔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 고문이 돼 뒷전으로 물러났다. 이처럼 노태우·김영삼·박근혜 등 3명의 대통령 당선에 기여한 이 후보자지만 막상 본인이 선거에 나선 적은 한 번도 없다. 2002년 이회창 대선 후보 특보 당시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패한 이인제 의원을 한나라당에 끌어들이기 위해 이 의원 측에 ‘5억원을 전달한 사건’은 이 후보자에게 지금까지 ‘정치인 매수 공작’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있다. 이로 인해 그는 2004년 총선 비례대표 공천을 거부당하는 쓴맛도 봤다.

친박계 외교안보의 좌장 격으로 박근혜정부 초기 중용이 예상됐던 그가 주일 대사를 맡아 일본으로 떠나게 되자 의외라는 반응이 많았다. 국정원장이나 외교부장관이 될 것이란 하마평이 무성했기 때문이다. 윤병세 외무부장관은 “선배님께서 이 자리에 계셔야 되는데…”라고 말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이 후보자의 재산 증식 부분과 불법 대선 자금 전달 전력을 문제 삼을 방침이다. 특히 불법 자금 전달 전력이 있는 인사가 어떻게 국정원 개혁을 수행할 수 있느냐는 지적이다.

역대 국정원장 여러 명이 퇴임 후 감옥에 가는 등으로 대북 정보망은 와해되고 구성원들 사기도 바닥을 헤매는 국정원이다. 국정원 본연의 기능을 회복하고 정치적 독립성을 확보하는 일은 지난한 과제로 남아 있다. 전임 남재준 원장 시절 지나친 경직성과 공안 정국을 주도한 과다한 정치 개입으로 국정원의 대국민 신뢰는 한껏 추락했다. 그래서일까. 국정원장 내정 통보를 받은 직후 도쿄 특파원들과의 간담회에서 이 후보자가 피력한 “국정원장도 결국 국민과 소통하는 자리”라는 말은 그래서 더 솔깃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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