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반기 정국 ‘개헌 블랙홀’에 빠져든다
  • 양정대│한국일보 정치부 기자 ()
  • 승인 2014.08.05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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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보선 압승 거둔 여당 지도부 “개헌 필요”…당·청 간 갈등 불씨 될 수도

“이제 진짜로 개헌 논의에 불이 붙을 것 같다. 물론 당장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연말을 넘기지는 않을 듯하다. 한마디로 ‘개헌 정국’의 서막이 열렸다고 할 수 있다.”

7·30 재보선이 새누리당의 압승과 새정치민주연합의 참패로 끝난 다음 날, 한 새누리당 중진 의원에게 앞으로의 정국 상황을 예상해달라고 했더니, 대뜸 ‘개헌론’을 꺼내들었다. 그가 제시한 가장 큰 근거는 새누리당 지도부 대다수와 국회의장이 개헌론자라는 점이었다.

사실 정치권에서 개헌 문제는 여차하면 언제든 현안이 될 수 있는 ‘휴화산’이나 마찬가지다. 이른바 ‘1987년 헌법 체제’가 대통령 직선제라는 당시의 열망을 반영했지만, 21세기 지금의 사회 전반의 변화를 수용하기엔 태부족이라는 학계 비판에 직면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실제 ‘개헌 추진 국회의원 모임’에는 19대 여야 국회의원 중 절반이 넘는 151명이 회원으로 가입돼 있다. 새누리당 주호영 정책위의장, 새정치연합 박영선 대표 직무대행 등 각 당 지도부 인사들도 대거 참여하고 있다.

7월31일 국회에서 열린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의에서 김무성 대표가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 시사저널 이종현
김무성 대표 취임 일성 “권력 분산 개헌 필요”

이미 개헌의 필요성과 방향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일정하게 형성돼 있고, 본격적인 논의를 위한 국회 차원에서의 준비도 상당 부분 진행됐다. 18대 국회 후반기에 국회의장 직속으로 구성된 개헌자문위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5%가량이 개헌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문재인 여야 대통령 후보도 앞 다퉈 개헌 공약을 제시했다. 국회의장실 관계자는 “누군가 라이터로 불만 붙이면 활활 타오를 수 있을 정도로 개헌 논의를 위한 준비는 다 되어 있다”면서 “특히 20대 총선 전까지 앞으로 1년 8개월 동안 큰 선거가 없는 만큼 이 시기를 놓쳐선 안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동안 개헌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적은 거의 없었다. 논의를 위한 실질적인 동력이 확보되려면 국회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집권 여당이 움직여야 하는데, 아무래도 개헌 논의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청와대의 뜻을 따르는 여당 지도부가 번번이 제동을 걸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점에서만 보면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김무성 대표를 비롯한 새누리당의 새 지도부 가운데 적극적 개헌론자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 대표와 함께 김태호·이인제 최고위원 등은 전당대회 과정에서 사실상의 조기 개헌을 주장했고, 서청원 최고위원도 중·장기적으로 통일헌법을 위한 개헌 준비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특히 김 대표는 대표 취임 일성으로 개헌론을 들고나오기도 했다. 시점을 특정하지는 않았지만 언제든 개헌론 점화를 시도할 것임을 보여주는 시그널로 읽힌다.

김 대표는 대표로 선출된 후 첫 언론 인터뷰에서 “과도한 권력 집중에 따른 문제가 많고, 세상이 너무나 넓고 커지고 복잡해져서 대통령 한 사람에게 모든 게 집중되면 물리적으로 이런 것들을 수용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권력 분산을 위한 개헌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국민 여론조사 결과 3분의 2 이상이 4년 중임 정·부통령제를 선호하는 것으로 조사됐는데 나도 그 입장에 찬성하는 한 사람”이라고 했다. 다만 개헌 착수 시점에 대해선 “워낙 폭발성이 크기 때문에 시점에 대해선 잘 상의해서 하겠다”며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국회 차원의 논의를 총괄해야 할 정의화 국회의장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개헌론자다.

2012년 12월27일 국회 의정관에서 열린 ‘개헌 추진을 위한 국회의원 워크숍’에서 여야 의원들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 뉴시스
청와대 견제·차기 잠룡 입장이 걸림돌

7·30 재보선 이후 예상되는 정치권, 특히 야권의 지각변동을 감안하더라도 개헌 논의에 탄력이 붙을 가능성은 상당하다. 이번 재보선에서 궤멸적 참패를 당한 새정치연합은 당분간 정국 주도권을 쥐기 어려운 상황이고, 앞으로 18개월간 큰 선거가 없다는 점에서 수권 정당으로서 국민에게 인정받을 모멘텀을 만들어내기도 쉽지 않다. 개헌론자인 새정치연합의 한 중진 의원의 말이다.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를 거쳐 새 지도부가 들어서더라도 여권으로 넘어간 정국 주도권을 되찾아오기 쉽지 않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다 보면 2016년 총선과 2017년 대선에 대한 기대 역시 잦아들 수밖에 없다. 결국 여권에서 권력을 나눠 갖자고 하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개헌 논의가 본격화하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몇 가지 있다. 당장 ‘현실 권력’인 청와대에서 이를 반길 리 없다. 이미 박근혜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개헌 논의를 ‘블랙홀’에 비유하며 부정적인 입장을 분명히 했다. 자신의 임기 중에 레임덕을 자초할 상황을 용인할 수 없다는 의미다. 이 때문에 여권 내에선 “새누리당 지도부가 개헌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시점이 당·청 갈등의 도화선에 불이 붙는 때일 것”(청와대 관계자)이란 말까지 나온다. 그렇잖아도 껄끄러운 박 대통령과 김 대표의 관계가 개헌을 매개로 폭발할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미래 권력’을 꿈꾸는 잠룡들의 이해관계도 걸림돌일 수 있다. 물론 김무성 대표와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남경필 경기도지사, 정몽준 전 의원, 문재인·안철수 의원과 박원순 서울시장, 안희정 충남도지사 등 대권 후보로 거론되는 이들 중 명시적인 개헌반대론자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4년 중임 정·부통령제야 다른 차원이겠지만 분권형 대통령제에 대해선 정치적 기반과 입지에 따라 생각이 다를 수 있다.

특히 분권형 대통령제의 경우 기존에 내각제를 선호하는 흐름과 적잖이 겹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아직까지 ‘포스트 박근혜’가 뚜렷하게 등장하지 않은 여권 내 친박계, 정세균·박지원 의원 등 당내 기반에 비해 국민적 지지도가 높지 않은 야권 중진 그룹 등의 이해가 일치하는 지점이다. 실제 국회 차원의 논의는 이들을 중심으로 돌아갈 가능성도 상당하다. 여기에 김 대표 측에서도 “내년 1년간 국민적 평가를 받아본 뒤 대권 도전의 여러 방안을 검토해볼 것”이라며 분권형 개헌에 대한 여지를 남겼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여당 지도부와 국회의장이 개헌에 적극적이란 점에서 과거와 다른 환경이 조성된 것만은 분명하다”면서 “개헌을 하되 적용은 차차기 대통령 임기부터 하거나 통일헌법을 마련하는 차원으로 논의를 진행하는 등의 절충점을 찾아간다면 실질적인 개헌 논의가 가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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