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칼날 위의 歷史] #2. 혁명 공신 처남 4명 사형시켜 법치를 세우다
  •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
  • 승인 2014.08.28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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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인척 관리 엄격했던 태종 이방원 오늘날에도 대통령 측근 관리 중요성 강조돼

제왕의 자질을 알아보는 중요한 잣대 중 하나가 친인척 문제다. 이 문제는 한 제왕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의 바로미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제왕의 공사(公私) 개념을 말해주는 첩경이기 때문이다. 제왕이 공(公)을 우선하면 친인척들이 발호하지 못하는 반면, 사(私)를 앞세우면 친인척들이 발호하고 세상은 시끄럽게 되는 간단한 이치다. 이는 지금의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역대 정권마다 대통령의 친인척들이 국정 농단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사례를 우리는 무수히 보아왔다. 현 정부에서는 대통령의 비선을 둘러싼 이야기들이 시중의 화제가 되고 있기도 하다. 

친인척 관리 가장 잘못한 임금은 선조와 영조

조선 스물일곱 임금 중에서 친인척 관리를 가장 잘못한 임금을 꼽으라면 조선 중기 선조(宣祖:재위 1567~1608년)와 조선 후기 영조(英祖:재위 1724~1776년)를 꼽을 수 있다. 선조는 아들들 관리에 실패했다. 영조는 어린 왕비 관리에 실패한 결과 사도세자 죽음의 비극을 초래했다. 영조의 사례는 잘 알려져 있지만, 선조는 그렇지 못하다. 방계승통(傍系承統:왕의 적자가 아닌 혈통)으로 왕위를 계승한 선조는 8명의 부인에게서 14명의 아들과 11명의 딸을 낳았다. 그래서 친인척 관리가 중요한 국사 중 하나였지만 선조는 공적 개념이 부족했다. 인빈(仁嬪) 김씨 소생의 정원군(定遠君)·임해군(臨海君)·순화군(順和君) 등은 백성들에게 악명 높은 세 왕자였다.

KBS 드라마 에서 이방원(왼쪽에서 두 번째)이 자신의 처남들 및 측근과 왕자의 난을 준비하고 있다.
임해군과 순화군은 임진왜란 때 백성들을 위로하고 근왕병을 모집하러 함경도에 갔다가 국경인(鞠景仁) 등 현지 백성들에게 체포돼 왜군에게 넘겨질 정도로 백성들에게 많은 행패를 부렸던 인물이다. 임해군은 여러 차례에 걸친 교섭 끝에 석방되었지만 전혀 반성하지 않았다. 임해군은 정원군과 함께 사노(私奴)를 잠상(潛商)으로 삼아 왜군과 내통하며 이익까지 취했다. 그래서 포도청은 선조 30년(1597년) 1월 정원군의 사노 희남(希男)을 간첩 혐의로 체포했는데, 정원군은 임해군과 함께 포도대장에게 서신을 보내 석방을 요구했다. 이를 안 사헌부에서 임해군·정원군의 파직을 요청했으나 선조는 들어주지 않았다. 선조는 전쟁 중에 간첩질까지 한 왕자들을 시종 옹호했다. 간첩질에 면죄부를 준 것은 계속 비리를 저지르라는 면허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해 6월에는 정원군의 하인들이 길을 다투던 좌의정 김응남(金應南)의 하인을 집단 폭행해 유혈이 낭자한 채 실려가는 사건도 발생했다. 9월에는 지방으로 행차한 정원군을 수행하던 하인들이 쇄마(刷馬:지방 관아의 말) 200필에 실을 정도의 금품을 갈취한 사건까지 발생했다. 사헌부에서 추고(推考:수사)를 요청하자 선조는 “주인이라고 하인들이 한 일을 다 안다고 할 수 없다”면서 거부했다. <선조실록> 35년(1602년) 6월조의 사관은 “여러 왕자들 중 임해군과 정원군이 일으키는 폐단이 한이 없어 남의 농토를 빼앗고 남의 노비를 빼앗았다”면서 “가난한 사족(士族)과 궁한 백성들이 토지를 잃고도 항의할 수도 없어 중외가 시끄러웠다”고 비난하고 있다.

백성 억압해 노비로 만든 처남들 사형

조선에서 친인척 관리를 가장 잘한 임금은 태종(太宗:재위 1400~1418년) 이방원이다. 그에게는 그동안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군주라는 이미지가 붙어 다녔다. 그러나 이런 이미지는 대부분 양반 사대부들이 만든 것이었다. 역사 자료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문헌 사료로서 대부분 지배층이 만드는 것이다. 또 하나는 입으로 전해지는 구전(口傳) 사료로서 대부분 민중들이 만드는 것인데, 이 중 하나가 ‘태종우’(太宗雨) 고사다. 태종이 세상을 떠난 음력 5월10일에 내리는 비가 태종우다. 조선의 민간 풍습을 기록한 홍석모(洪錫謨:1781~1850년)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5월조에는 “태종이 임종할 때 (아들) 세종에게 ‘가뭄이 극심한데 내가 죽어서도 비록 알게 된다면 이날에는 반드시 비가 오게 하리라’라고 말했는데, 훗날 과연 그렇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필자는 태종이 세상을 떠나던 날의 여러 사료를 살펴봤지만 태종이 이런 말을 남기고 승하했다는 문적(文跡)을 찾지 못했다. 민중들의 구전이라는 이야기다. <승정원일기> 영조 36년(1760년) 5월10일자에 따르면, 영조는 “오늘은 성조(聖祖:태종)의 기신(忌辰:제삿날)이다. 이날은 매년 비가 와서 예부터 태종우라고 불렀다”라고 말하는 기사가 나온다. 조선 후기에는 국왕들도 태종우에 대해 믿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백성들은 왜 태종우라는 구전(口傳)을 만들었을까.

태종이 즉위 후 칼을 휘두른 대상을 살펴보면 그 답을 알 수 있다. 그 대부분이 친인척과 측근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태종은 재위 4년(1404년) 10월 이거이(李居易)와 그 아들 이저(李佇)·이백강(李伯剛) 등을 서인(庶人)으로 강등시키고 고향인 진주(鎭州:충청도 진천)에 안치했다. 이거이는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책봉된 정사공신(定社功臣)과 제2차 왕자의 난으로 책봉된 좌명공신(佐命功臣)에 거듭 든 겹공신이었다. 정사·좌명공신은 모두 이방원을 보위에 올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이른바 ‘혁명 동지’들이었다. 게다가 이거이의 아들 이저는 태조 이성계의 장녀 경신(慶愼)공주와 혼인한 부마였고, 이백강은 태종 자신의 장녀 정순(貞順)공주와 혼인한 부마였으니 왕실과 겹사돈이기도 했다. 이들의 죄목은 상왕 정종을 다시 추대하려고 했다는 혐의인데, 3년 전의 일을 가지고 왕실의 겹사돈이자 겹공신을 서인으로 폐하고 외방에 안치한 조치에 대해 조야가 놀란 것은 당연했다. 태종이 태상왕 이성계에게 이거이 사건을 보고하자 이성계는 하늘을 쳐다보고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회안(懷安君:이방간)이 이미 쫓겨나고, 익안군(益安君:이방의)은 이미 죽었는데, 상왕(上王:정종)은 출입하지 않으니, 친척 가운데 살아 있는 자가 몇 명이냐? 일이 이루어질 때에는 돕는 자가 많지만, 일이 패할 때는 돕는 자가 적다. 사생지간(死生之間)에 돕는 자는 친척 같은 것이 없다(<태종실록> 4년 10월20일).”

개국 군주 이성계는 아직 가족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악역은 늘 태종의 몫이었다. 재위 10년(1410년)에는 제주도로 유배 보냈던 처남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 형제를 사사(賜死)시켰는데, 이는 이거이·이저 부자 사건보다 더 큰 충격을 주었다. 민무구·무질 형제는 왕비 원경왕후 민씨의 친동생들이자 제1·2차 왕자의 난 때 직접 무기를 들고 싸운 혁명 동지들이었기 때문이다. 민무구는 정사·좌명 1등 공신이었으며 민무질은 정사 2등, 좌명 1등 공신이었다. 태종은 국가가 반석 위에 서기 위해서는 법 위의 존재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법치를 이룩하려면 공신이나 국왕의 친인척 같은 특권 집단을 법 아래의 존재로 만들어야 했다. 민씨 형제는 어린 세자를 끼고 정권을 장악하려 했다는 ‘협유집권(挾幼執權)’ 혐의를 받았는데, 그 구체적 죄상이란 태종 6년(1406년) 재변(災變) 때문에 태종이 세자 양녕대군에게 양위를 선언했을 때 “모든 신민들은 애통해했으나 민무구 형제는 화색을 띠었다”는 애매모호한 것이었다.

<태종실록> 8년(1408년) 10월1일자는 민무구 형제를 지방으로 귀양 보내면서 그 죄상을 열거한 교서를 싣고 있는데, 그중에 ‘민씨 형제가 양인(良人:자유민) 수백 구(口)를 억압해서 사천(私賤)으로 만들었다’는 대목이 있다. 양인을 억눌러 사노비로 만드는 것을 ‘압량위천(壓良爲賤)’이라고 하는데, 개국한 지 20년도 안 돼 노비로 떨어지는 양인들이 생겼다는 것은 조선 개국 이념에 대한 배신이었다. 고려가 멸망한 이유가 권세가들이 양인들을 사노비로 만들고, 농지를 빼앗는 겸병(兼倂)이 성행했기 때문이었다. 고려 말에는 이런 일을 당해도 하소연할 곳이 없었지만, 태종은 재위 1년(1401년) 8월 신문고(申聞鼓)를 만들어 백성들이 직접 하소연할 수 있게 만들었다.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이 해당 지방의 관청에 고소했는데도 처리해주지 않으면 직접 대궐 앞의 신문고를 쳐서 임금에게 알릴 수 있게 한 제도였다. 그러면 지금의 검찰 격인 사헌부에서 수사에 나섰다. 민무구·무질 형제에 의해 사노비로 전락한 백성이 신문고를 쳐서 이 사실을 알렸다. 신문고를 친 백성들의 처지에서 생각해보자. 임금의 혁명 동지이자 왕비의 친동생에 관한 비위 사실을 알렸을 때 임금이 처리해주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계속 그 집의 노비로 살아가야 하는 그 고초는 말할 수가 없을 것이었다. 지금 과연 대통령의 친인척이자 집권 공신에 대해 힘없는 국민이 검찰에 고발했을 때 현재의 대한민국 검찰이 어떤 태도를 취할지는 그간의 행적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백성들의 신문고로 이 불법 사실을 알게 된 태종은 이들을 내쳤고 끝내 사형시켰다. 이른바 혁명 동지들은 경악했겠지만 백성들은 어떻게 생각했겠는가. 백성들이 태종에게 보답한 것이 태종우 고사였다. 태종은 공신들의 이익과 백성들의 이익이 충돌할 때 백성들의 손을 들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5년 후인 태종 15년(1415년)에는 남은 두 처남 민무휼·무회 형제가 또 대상에 올랐다. 전 황주(黃州) 목사 염치용이 노비 소송에서 패해 노비를 빼앗기자 ‘태종의 후궁 혜선옹주(惠善翁主) 홍씨와 영의정 하륜 등이 뇌물을 받았기 때문에’ 패소했다면서 민무회에게 억울함을 호소했다. 민무회는 충녕대군(세종)에게 이를 알렸고,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던 충녕은 이 이야기를 부왕 태종에게 전했다. 충녕대군에게서 송사 이야기를 들은 태종은 “한낱 노비 소송에 임금을 연루시키는 법이 어디 있는가”라면서 불같이 화를 냈다. 태종의 이 이야기는 공적 문제를 사적 통로로 끌어들이지 말고 공적 시스템으로 해결하라는 이야기였다. 공적 문제가 사적 통로에 의해 처리되면 힘없는 백성들은 설 곳이 없게 되어 있었다. 결국 이 문제는 민무휼·무회 두 형제까지 사형당하는 것으로 매듭지어졌다.

박근혜 대통령이 8월11일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며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총애하던 자신의 딸도 궁에서 내쫓아

태종 자신은 권력을 이용하려는 문제에서는 칼날같이 대했다. 태종이 상왕으로 있던 세종 3년(1421년), 태종이 총애하던 숙공궁주(淑恭宮主)의 부친 김점(金漸)이 평안도관찰사 시절 수많은 재물을 수뢰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세종이 상왕의 눈치를 보느라 수사에 적극적이지 않자 태종은 “탐오(貪汚)한 사람의 딸을 궁중에 둘 수 없다”면서 출궁시키고 적극적으로 수사하게 한 후 다시는 숙공궁주를 궁내에 들이지 않았다. 그러니 모든 벼슬아치들이 법을 어기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 뽑는 21세기에 대통령의 측근을 둘러싼 이야기들이 시중의 화제라는 자체가 시대착오적 비극을 말해주고 있다. 대통령 자신이 선조의 사심을 버리고 태종의 공심(公心)으로 돌아가는 길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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