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윽한 ‘한국의 미’, 한가위를 비추다
  • 조은정│미술평론가 ()
  • 승인 2014.09.02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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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 뷰티:두 개의 자연> <백자 예찬, 백자 미술을 품다> 등 다양한 전시

근대 한국 미(美)의 특성을 찾는 일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찾는 것과도 같다. 일본 관학파인 세키노 다다시는 한국미가 중국 미술의 모방에 빠져 문약하고 규모도 작고 섬교화욕(纖巧華縟)의 폐단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광화문이 외양이나마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진 데는 ‘오오 광화문이여!’라는 야나기 무네요시의 애절한 호소의 글 덕도 있다. 하지만 그는 또한 한국의 미를 비애의 미, 애상의 미라고 했다. 풍토가 민족의 감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굳건한 믿음 아래 일본인 학자는 국가의 식민지 경영에 협조하는 의미에서건, 휴머니즘에서건 오리엔탈리즘을 기반으로 한 타자적 시선을 숨기지 않았다. 고유섭은 이러한 시대에 대장간의 헤파이토스처럼 조선백자를 벼려 ‘무기교의 기교, 구수한 큰 맛’이라는 한국의 미를 규정하는 방패를 만들어냈다.

ⓒ 서울미술관 제공
근대 일제 강점기에 조우한 ‘한국미의 특성’이라는 논의는 민족국가 만들기라는 세계의 흐름 안에서 창출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좀 더 구체성을 띠고 한국의 미를 규명하기 위해 증거 자료로 채택된 게 조선백자였다. 후일 미술사학자 최순우가 “한국의 흰 빛깔과 공예 미술에 표현된 둥근 맛은, 한국적인 조형미의 특이한 체질의 하나”라고 규정함으로써 백자에 한정돼 있던 흰빛과 달과 같은 둥근 맛은 한국 미술의 특성으로 안착됐다. 동시대의 김환기·도상봉 등이 이를 공유하고 있지만 실은 이미 일제 강점기에 보편적으로 내면화된 한국인의 미의식이기도 했다. 식민지 시기에 탄생한 담론 아닌 담론은 이후 한국 미술을 말할 때 스스로 검열대에 오르게 하는 족쇄가 됐다.

자연에 대한 감동과 조화가 한국의 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코리안 뷰티(Korean Beauty)’전이 눈길을 끌었던 것도 순전히 전시명 때문이었다. ‘소장품전’이라는 작은 글씨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거의 100여 년 동안 논의해온 이 문제를 어떻게 전시에 담아냈을까. 그런데 전시는 ‘두 개의 자연’이라는 부제에 따라 <자연 하나:울림> <자연 둘:어울림>으로 구분돼 있다. 전시 개념에 따르자면 자연에 대한 감동과 조화가 한국의 미로 표상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전시명은 <소장품전>이었어야 했다. 자연과 인간, 상념으로서의 미적 지표가 산재한 공간에서 자칫하면 ‘코리안 뷰티’라는 너무 큰 봇짐은 걸음을 휘청거리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말 그대로의 ‘자연’을 다루는 작품을 통해 한국 현대미술의 독자성을 찾아보려는 시도가 여전히 우리 내부의 시선임을 확인하게 되는 것은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한국적 미’가 여전히 먹과 붓과 도자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확인하는 것까지 포함하여. 서울미술관의 <백자예찬> 부제는 ‘미술, 백자를 품다’이다. 한국미의 상징인 백자가 어떻게 미술 작품에서 구현되고 있는가를 보여주겠다는 의도로 파악할 수 있겠다. 전시는 다시 소재로서의 백자는 ‘백자, 스미다’로, 백자를 미적 특성으로 파악해 영역을 확장한 작품들은 ‘백자 번지다’로, 현대 백자는 계승이란 의미에서 ‘백자 이어지다’로 소개되고 있다. 한국적 미의 상징으로 제시된 ‘백자’는 전통·포용·부드러움 등의 기호로 존재하고 있다. 이 강한 지시성에 맞서기 위한 작가의 고투를 지켜보게 하고 그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견디기 위해 감수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전시였음에도, 여전히 김환기와 도상봉의 백자는 아름다웠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적 미라는 정신적 차원의 논의는 미의 표상 과정을 거쳐 물질적 차원으로 정착한 듯 보인다. 최근 다시 담론의 장을 넓혀가는 단색화가 그것을 증명한다. 커다랗고 무표정한 화면의 단색화는 미술관에서부터 갤러리에 이르기까지 지금 어딘가에서 전시되고 있을 정도로 지금의 미술 소비자에게 사랑받고 있다. 백자와 짝을 이룰 때 단색화는 완벽한 한국미의 표상이 되는데, 지난 6월 상하이를 시작으로 세계를 돌고 있는 <텅 빈 충만-한국 현대미술의 물성과 정신성>전은 이러한 모든 것을 만족시키는 듯이 보인다. 종교적 완결의 장면, 특히 선(禪)을 상징하는 ‘텅 빈 충만’은 모든 것을 내려놓음으로써 얻은 어떤 경지를 상징한다. “한국 문화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절제된 미술과 한국 현대미술의 큰 축인 단색 회화의 아름다움을 조명함으로써 서구의 미술 사조와 달리 다소 소박하고 단아한 우리 한국 선비문화를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해 기획되었다”는 취지는 이 전시가 한국 홍보의 한 차원으로서 해외 순회전용으로 기획된 것임을 알리기도 한다. 한국미가 가장 잘 표상된 미술의 한 상징으로서 단색화가 선택됐고 그것은 절제·소박·단아로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 국립현대미술관ㆍ서울미술관 제공
절제와 결핍의 수평선에 놓인 정신성

세부적 표현에 대한 의식이 결핍이냐, 과잉의 미에 집착하지 않는 절제냐 하는 것은 백자를 이해하는 시각의 저울이기도 하다. ‘절제’로 파악되는 단색화가 정치적 발언을 용납하지 않던 시대에 나타난 양식 중 하나라는 점에서 절제와 침묵의 어느 곳에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미술사적 평가는 달라질 것이다. 그럼에도 이 양식의 존재 방식은 백자와 짝 지워져 정신의 물질화라는 숙명적 과업을 수행해갈 것이라는 점 또한 의심하지 않는다. 한국적 미란 이런 것이라며 들이대지 않는 세련된 매너, 그것은 <텅 빈 충만-한국 현대미술의 물성과 정신성>이 지닌 미덕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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