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은혜 갚아야 하고, 은혜 갚아야 사람이다”
  • 김진령 기자 (jy@sisapress.com)
  • 승인 2014.10.02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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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세 어머니 손수레에 모시고 1만2000㎞ 여행한 중국 효녀 스토리

 지난봄 중국의 모녀 이야기가 화제가 됐다. 교사 직을 은퇴한 63세 딸이 93세 노모를 손수레에 모시고 중국 전역을 여행한다고 방송에 소개된 것이다.

그 주인공인, 중국 강소성에 사는 셰수화(謝淑華) 씨와 그의 모친 셰쉬스(謝許氏) 씨가 한국에 왔다. 한국선플운동본부(이사장 민병철) 초청으로 9월23일 한국에 온 이들 모녀는 24일 라움아트센터에서, 그날 오후에는 서울예술고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효 실천’을 주제로 강연을 했다. 셰수화 씨는 강연을 통해 자동차·기차·비행기 등 문명의 이기가 발달한 이 시대에 왜 어머니를 손수레에 모시고 여행을 떠났는지, 어떤 동기가 있어서 그런 일을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한편의 소설과도 같은 그의 얘기를 들어보자.

9월25일 효 손수레의 주인공 셰수화 씨 모녀가 한국을 방문해 남산타워를 관광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중국 전역을 여행할 때 모습. ⓒ 시사저널 이종현·선플재단
“2013년 봄 인력거를 개조해서 ‘감은호(感恩號)’라고 이름 붙이고 수레의 또 다른 면에는 ‘효행천하(孝行天下)’라는 글씨를 쓰고 그 옆에 상하이-베이징-하이난-쉬저우 등 여정을 표시했다. 이 먼 여정을 수레를 끌며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했ㄷㅏ. 4월에 출발해 6월3일 베이징에 도착했다. 9월17일 베이징을 출발해 하이난을 거쳐 집에 돌아왔다. 하이난 루트를 택한 것은 어머니가 바다를 보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1만2000㎞를 걷는 동안 19개의 성을 거쳤고, 3개의 직할시, 560여 개의 도시를 지났다. 어머니를 모시고 100여 곳의 명승지를 봤고, 수천여 개의 언덕을 지났고, 황하와 양자강, 남령산맥을 넘었다. 꼬박 일주일을 걸은 적도 있고, 길에서 먹고 자면서 갖가지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이를 토ㅇ해 어머니의 소원을 성취해드렸다. 여행을 시작한 지 며칠이 안 돼 중국 국영방송 CCTV에서 취재를 나오면서 200여 개의 언론 매체에서 다뤘다. 하이난성을 여행할 때는 한국 방송사에서 7일간 따라붙어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내가 왜 ‘만리 효행길’을 걸어서 가는 걸 택했을까. 교통이 발달한 요즘 세상에 왜 손수레를 끌었을까. 그것도 어머니를 모시고.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어머니가 멀미가 심하다. 엔진이 달린 어떤 교통수단도 타지 못하신다. 둘째는 어머니의 은혜다. 어머니는 나를 대학생으로 키웠다. 그래서 인력거라는 방식으로 어머니의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려고 했다.

13억 중국인 감동시킨 효 실천 여행 

나는 시골에서 태어나 아주 어렵게 자랐다. 부모님은 여러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모든 사랑을 내 형제자매 6명에게 주셨다. 내가 학교 갈 나이가 되자 친척들의 반대에도 어머니가 학교에 보냈다. 우리 마을에 있었던 200명의 여자아이 중 내가 유일하게 학교에 간 여학생이었다. 행운아였다.

학교 등교 첫날, 어머니는 나에게 ‘얘야, 엄마가 아무리 힘들어도 죽지 않는 이상 너를 학교에 보낼 것이다. 너는 반드시 공부를 해서 출세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50여 년이 지났지만 어머니의 이 말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나는 열심히 노력해서 초등학교 때 좋은 성적을 올렸다. 전체 마을의 초등학생 모범생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내 이야기를 노래로 만들어 학교에서 공연한 적도 있다. ‘최고의 셰수화, 5학년 중 으뜸, 국어·수학 쌍백점, 윤리도 최고…’, 그런 가사였다. 이런 노력을 통해 나는 우리 마을에서 첫 번째 대학생이 됐다.

부모의 사랑이 없었다면, 부모가 자식의 미래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자랑스러운 교사가 될 수 있었을까, 국가 공무원이 될 수 있었을까,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오늘날 내가 누리는 모든 행복은 부모님이 주신 것이다. 부모님이 나이를 드셨는데 (수레를 끌고 여행을 다니는 게) 뭐가 어렵겠나. 부모님이 내ㄱㅔ 주신 사랑에 비하면 어려움도 아니다.

초등학교가 집에서 6㎞ 떨어진 곳에 있는데 어머니가 매일 데려다주셨다. 등·하교를 따지면 12㎞를 매일 걷는 것이다. 1학년 때부터 6학년 때까지 어머니가 나 때문에 매일 12㎞를 걸으셨다. 총 2만5000㎞에 달한다. 이번 여행에서 1만2000㎞를 걸었는데, 내가 보답한다고 걸었던 거리도 어머니가 나를 위해 걸으셨던 것에 비하면 절반도 안 된다. 그 2만5000㎞의 은혜에는 보답을 못한다. 어머니의 은혜는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다.

“어머니 은혜는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다”

부모님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굶주림 속에서도 나를 키워주셨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 집에는 시계가 없었다. 그래서 아침에 별이나 달을 보고 시간을 짐작했다. 어느 겨울 날, 밖이 온통 하다. 어머니는 날이 밝았다고 생각하고 나를 학교에 데려다주셨다. 아주 추운 날이었다. 눈은 30cm 정도 쌓였고, 바람은 거셌다. 우리 모녀는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헤치고 학교에 도착했다. 빨리 교실에 들어가 얼은 몸을 녹이고 싶었지만 학교에 도착하니 문이 잠겨 있었다. 어머니는 ‘혹시 일요일 아니니?’ 하고 물었다. 그날은 일요일이 아니었다. 교문 밖에서 오래 서 있자 학교 종소리가 들렸다. 새벽 두 시를 알리는 종소리였다. 어머니는 추울까 봐 나를 품에 안고 4시간이나 더 보호했고 학교 문이 열리자 나를 들여보내곤 집으로 돌아가셨다. 그때 어머니가 돌아서서 가시는 모습을 보니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그때 다짐했다. 어머니 은혜에 반드시 보답하겠다고.

한번은 비가 오는 날이었다. 어머니가 우산을 들고 학교로 나를 데리러 오셨는데 서로 못 보고 길이 엇갈렸다. 어머니는 그날 완전히 젖고 입술도 파랗게 돼 있었다. 어머니는 내 학업을 위해 새벽부터 밤까지 일했다. 낮에 나가서 일을 하고 밤에는 천을 짰다. 학비가 없어서 나는 주판이 없을 정도였다. 준비물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니까 선생님은 야단을 치고 학교 친구들은 무시했다. 내가 집에 와서 우니까 어머니도 같이 우셨다.   

할머니가 닭을 쳐서 달걀을 팔아 학비를 보태주셨고 오빠는 내가 우는 것을 보고 10전을 줬다. 이렇게 해서 학비와 책을 살 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먼저 세상을 뜬 오빠에게도 이 자리에서 다시 감사 인사를 올린다. 어머니는 이렇게 내가 학업을 완성할 수 있도록 애쓰셨다. 어머니의 연세가 이제는 많다. 하지만 어머니의 오랜 소원, 세상을 보고 싶다는 소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오늘 이렇게 기회가 있어서 한국에도 같이 왔다. 나는 보답하고 싶었다. 살면서 은혜를 갚아야 하고, 은혜를 갚아야 사람이다. 까치도 부모에게 보은한다고 한다. 인간으로서 부모의 ㅇㅡㄴ혜에 보답해야 한다. 나는 예전의 기억·추억을 다 갖고 있다. 어머니의 소원을 꼭 이뤄드리고 싶었다. 내가 73세라도, 움직일 수만 있다면 어머니에게 더 큰 웃음을 드리고 싶다.

100가지 선행 중에 효가 으뜸이다. 자녀로서 돈이 많더라도, 관직이 높더라도 부모를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 어떤 아쉬움도 남겨서는 안 된다. 그분들에게 더 많은 즐거움과 기쁨을 안겨드려야 한다.”

셰수화 씨는 인터뷰에서 “부모님에 대한 효도를 위해 젊은이들에게 내 경험을 나ㄴㅝ주려고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강연 다음 날 이들 모녀는 중국인 관광객이 즐겨 찾는 경복궁과 청와대 앞을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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