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학생 ‘투사’들, 투쟁 주도하다
  • 모종혁│중국 통신원 ()
  • 승인 2014.10.14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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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시민이 주력인 홍콩 시위대…컨트롤타워 없어 동력 시들

지난 10여 일간 홍콩은 30도를 오르내리는 때아닌 늦더위로 무척이나 뜨거웠다. 하지만 더위보다 더 뜨거운 기운이 거리 곳곳에서 피어올랐다. 9월28일부터 완전한 직선제에 의한 행정 수반 선출을 요구하며 도로를 점거한 채 시위를 벌여온 홍콩인들이 분출한 열기다.

이들은 때때로 장엄한 노래를 부르며 서로를 북돋웠다. 베이징(北京) 표준어가 아닌 광둥화(廣東話)로 된 <물어보건대 아직도 깨닫지 않은 사람이 있나(試問誰還未覺醒)>라는 곡이다. 이 곡은 본래 영화 <레미제라블>의 주제곡 <사람들의 노래가 들리나>를 번안해 편집됐다. 인터넷에서 처음 불린 이후 입에서 입으로 퍼지면서 시위대의 애창곡으로 자리 잡았다. 시위대는 이 노래를 부르며 시민들에게 동참을 호소했다.

홍콩의 민주화 시위를 주도한 조슈아 웡(왼쪽에서 두 번째)을 비롯한 학민사조 멤버들이 10월9일 거리 연설을 하고 있다. ⓒ UPI연합
중·고생의 ‘학민사조’가 도심 점거 앞당겨

대중적인 데모 노래처럼 홍콩 시위대는 ‘무지개 시민연합’으로 이뤄졌다. 몇몇 주도 단체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이를 총괄하는 컨트롤타워는 없다. 과거 대다수 시민혁명은 유력 정치인이나 정당이 개입했거나 종교단체가 주도했다. 아랍 민주화의 첫 단추를 꿴 재스민 혁명과 무바라크의 30년 장기 독재를 끝낸 이집트 혁명이 대표적이다.

이에 반해 홍콩 민주화 시위는 철저하게 학생과 시민들이 주도하고 있다.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세 단체 역시 전적으로 순수 학생 및 시민들로만 구성돼 있다. 주축은 8개 대학 학생회의 연합체인 ‘홍콩전상학생연회(香港專上學生聯會·학련)’다. 학련은 1958년 설립된 홍콩 최대의 학생 조직이다. 과거 대륙을 광란으로 빠뜨린 문화대혁명을 지지하는 등 친중(親中) 성향을 보이기도 했지만, 1980년대 이래 중국과 타이완의 민주화 운동을 적극 지지하면서 홍콩인의 민주의식을 높였다.

9월22일 학련이 홍콩 내 24개 대학의 동맹휴업 투쟁을 선포하면서 도심 점거 시위가 촉발됐다. 홍콩 중문대 대학본부 앞에서 열린 선포식에서는 1만3000명의 대학생들이 모여 보기 드문 투쟁 열기를 분출했다.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 이래 학련이 주최한 대학생 집회에서 1만명 이상 모인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2012년 9월 홍콩 정부가 국민교육 도입을 추진하자, 이에 반대해 벌인 학련 집회에도 8000여 명이 모였을 뿐이다.

다른 한 축은 ‘센트럴을 점령하라(Occupy Central, 이하 센트럴 점령)’이다. 센트럴 점령은 지난해 3월 베니 타이(戴耀延·50) 홍콩 대학 법학 교수, 찬킨만(陳健民·55) 홍콩 중문대 사회학 교수, 추이우밍(朱耀明·70) 목사 등 3명이 주도해 설립한 시민단체다. 처음에는 2명의 지도자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일 정도로 종교적 성향을 지녔다. 그러나 지난해 6월 첫 집회에 각계각층의 시민 600여 명이 참여하면서 종교성을 탈색하고 대중조직으로 전환했다.

센트럴 점령은 타이 교수가 “중국이 홍콩기본법에 따른 보통 선거권을 부여하지 않으면, 홍콩 금융가인 센트럴을 점거해 도시를 마비시키자”며 주창한 불복종 운동 방침을 밀어붙여왔다. 지난 6월20일부터 10일간 행정장관 선거 후보자 추천 방식을 놓고 비공식 국민투표를 주관했는데 78만7000명이 참여했다. 홍콩 반환 17주년이 되는 7월1일에도 시위를 주도해 51만명을 거리로 끌어들였다.

이번 점거 시위에서 가장 전투적인 단체는 뜻밖에도 중·고등학생 조직인 ‘학민사조(學民思潮)’다. 2011년 5월 홍콩 정부는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학과 과정에 국민교육 과목을 신설하려 했다. 홍콩 학생들은 중국공산당이 정치 세뇌를 시도한다며 크게 반발했다. 당시 15세였던 조슈아 웡(黃之鋒)은 학우들을 규합해 학민사조를 설립했다.

같은 해 8월 학민사조의 첫 시위에는 중·고교생 1000명이 참여해 홍콩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학민사조가 주도한 국민교육 반대 캠페인에는 무려 12만명이 호응했다. 2012년 7월 일반 시민이 참가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자, 홍콩 정부는 과목 신설 계획을 철회해야만 했다. 그 후 학민사조는 각종 민주화 운동에 꾸준히 참여했다. 지난 9월26일에는 중·고등학생의 동맹휴학 투쟁을 주도해 본래 10월1일로 예정됐던 도심 점거를 앞당겼다.

같은 날 웡군은 대학생들과 함께 3m 높이의 철문을 넘어 홍콩 정부 청사에 진입하려다 경찰에 체포됐다. 그는 체포되기 전 “10년 후 초등학생이 홍콩 민주화를 위해 시위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고 외쳐, 청사 밖에 있던 수천 명의 시민과 학생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다. 10대 학생이 민주화의 영웅으로 떠오르자, 이에 부담을 느낀 경찰은 이틀 뒤 웡군을 풀어줬다. 그는 석방되자마자 “시위대와 함께하겠다”며 현장에 복귀했다.

이 세 단체가 이끌었지만, 시위대의 중심은 언제나 학생과 시민 개개인이었다. 낮에는 중·고교생과 대학생 및 일반 시민이, 저녁에는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점거 시위에 참가했다. 이들은 평화롭고 질서정연하며 수준 높은 시위문화를 보여줬다. 학생들은 아침에 집으로 돌아가 세수와 샤워를 한 후 거리에 나와 공부와 숙제를 했다. ‘불편을 끼쳐 죄송하다’며 행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쓰레기를 언제나 분리 수거하는 등 타인에 대한 배려와 위생에 각별히 신경 썼던 것도 홍콩 시위대의 특징이다.

홍콩인의 중국인 인식 비율 최저치 기록

그러나 강력한 컨트롤타워가 없다 보니, 투쟁의 동력은 곧 시들해지고 말았다. 10월7일 학련과 센트럴 점령이 홍콩 정부와 접촉해 10일부터 공식 대화를 갖기로 하면서 시위 참가자는 줄어들었다. 공무원과 교사들은 업무에 복귀했고, 대다수 학교가 정상 수업을 재개했다. 8일부터는 시위대 수가 급격히 감소해 정부 청사 주변 애드미럴티(金鐘) 일대에서만 300~400명이 점거를 이어갔을 뿐이다.

앞으로 한동안 학생·시민 대표와 홍콩 정부 간에 대화가 지속될 듯하다. 그에 따라 점거 시위도 일부 도로에서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당초 시위대가 성취하려 했던 완전한 행정장관 직선제를 쟁취하긴 어려울 전망이다. 10월4일 중국 정부는 당 기관지 인민일보를 통해 “이번 시위는 ‘색깔 혁명(정권 교체)’을 위한 불법 시위”라며 “홍콩의 법치를 단호히 견지한다”고 선언했다. 홍콩 정부도 친중 성향의 언론 매체를 앞세워 경제 위기설을 퍼뜨리면서 시위대를 고립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번 시위가 홍콩인으로서의 정체성 강화 현상을 낳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지난 6월 홍콩 대학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자신이 중국인이라고 인식한 비율이 1997년 이래 최저인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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