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통장에 돈 넣었다간 떼이기 십상
  • 조재길│한국경제신문 기자 ()
  • 승인 2014.10.30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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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8일 금융실명제 개정안 시행…모든 차명거래 원천 봉쇄

#1. N증권 직원 A씨는 배우자 이름으로 차명계좌를 개설해놓고 주식 매매를 한 혐의가 적발돼 10월17일 금융감독원으로부터 문책을 당했다. 그는 직무상 얻은 정보를 이용해 3000만원의 이득을 챙겼다가 과태료 2500만원도 내게 됐다.

#2. 사업을 하는 B씨는 큰 고민거리가 생겼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딸 이름으로 은행 3곳에 총 3억5000만원을 예금해놓았는데, 그 때문에 자칫 형사처벌까지 받을 수 있다는 은행 프라이빗뱅킹(PB)센터 직원의 얘기를 들어서다.

요즘 금융권 최대 화두는 금융실명제다. 오는 11월28일부터 차명 거래를 원천 봉쇄하는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시행되기 때문이다. 자녀 등 가족이나 친인척 이름을 빌려 금융 거래를 했던 사람들은 당장 자신의 이름으로 계좌를 다 바꿔야 한다.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처벌을 피하기 어렵다.

금융실명법은 김영삼 정부 때인 1993년 대통령 긴급명령권으로 발동됐다. 하지만 모든 차명 계좌를 막은 게 아니다. 계좌의 실소유자와 명의 대여자 사이에 일정한 합의가 있다면 처벌할 수 없었다. 거액 자산가들이 절세 수단으로 가족이나 친인척, 지인 등의 차명 계좌를 적극 활용해온 배경이다. 금융실명법이 지하경제의 숨통을 틔워줬다는 지적도 꾸준히 제기됐다. 이 같은 허점을 막자는 취지로 시행되는 게 이번 금융실명법 개정안이다.

ⓒ 일러스트 최길수
그동안 차명 거래가 활발했던 건 제도의 허점 외에 증세와도 맞물려 있다. 개인들이 한 해 동안 벌어들이는 금융소득이 2000만원을 넘으면 금융소득종합과세 대상으로 분류된다. 최고 41.8%에 달하는 누진세를 내야 하기 때문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

차명 계좌는 고율의 세금을 피할 수 있는 수단으로 활용됐다. 여러 사람 이름으로 자산을 분산해놓으면 종합소득세를 낼 필요가 없다. 금융소득에 대해 일반과세(이자·배당소득세 15.4%) 적용을 받는다.

앞으로는 이 같은 편법이 금지된다. 자녀나 배우자의 이름도 쉽게 빌릴 수 없다. 처벌은 매우 세졌다. 금융실명법을 위반하면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지금까지는 차명 거래로 회피한 세금만 더 내면 됐는데 이제는 징역형까지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공소 시효가 없기 때문에 수십 년 후 위법 사항이 드러나 처벌을 받을 위험도 있다. 한 번 처벌받고 끝나는 것도 아니다. 차명 건수가 발견될 때마다 매번 별도의 처벌을 받게 된다.

차명 거래를 중개한 금융회사 역시 종전에는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내면 끝이었다. 앞으로는 건당 3000만원 이하의 ‘과태료 폭탄’을 맞을 수 있다.

차명 거래를 선호해온 거액 자산가들에겐 이보다 큰 위험도 있다. 재산의 소유권 문제다. 금융실명법은 차명 계좌의 재산을 모두 명의자 재산으로 추정한다는 조항을 넣었다. 실소유주가 자신의 재산권을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예외적인 경우가 있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가족 간 증여 행위에 대해선 탈법으로 보지 않는다. 범죄 목적이 아닌 가족 간 ‘선의의 차명 거래’는 허용한다는 것이다. 계좌 분산으로 세금의 변화가 없을 때가 대표적이다.

예컨대 성년 자녀에게 5000만원, 미성년 자녀에게 2000만원까지 주는 행위는 위법이 아니다. 그 액수만큼이 자녀 증여세 면제 한도이기 때문이다. 배우자에 대한 증여세 면제 한도는 6억원이다. 따라서 6억원까지 배우자 명의로 돼 있는 재산에 대해선 차명 거래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가족에 대한 증여 면제 한도는 10년마다 부활한다. 10년에 걸쳐 반복적으로 증여세 면제 한도만큼 차명 거래가 가능하다. 고등학교 동창회 총무가 회비를 관리하려고 자기 이름으로 동창회 회원들의 계좌를 만들었더라도 형사처벌 대상에서 제외된다.

거액 자산가들 ‘쩐의 이동’ 시작됐다

은행·증권사·보험사 PB센터마다 금융실명법 개정안과 관련된 문의가 빗발치고 있다. PB센터들도 편법적으로 세금을 아낄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사라진 만큼 다양하게 분산돼 있는 차명 계좌를 실명으로 전환할 것을 권하고 있다.

자산가들이 우선 눈여겨보는 쪽은 비과세 상품이다. 실명으로 전환해 투자하더라도 세금이 늘어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상품이 국내 주식 및 국내 주식형 펀드다. 국내 주식이나 주식형 펀드의 경우 개인투자자들이 거둬들인 자본 차익에 대해선 세금을 떼지 않는다. 코스피지수가 충분히 떨어졌다는 평가도 증시로의 자금 유입을 부추기는 배경이다. 10월 들어 코스피지수가 약세를 보인 가운데서도 국내 주식형 펀드엔 이례적으로 많은 자금이 유입됐다.

10년 이상 투자하면 비과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저축성 보험도 자산가들이 선호하는 금융상품이다. 저축성 보험의 경우 5년 이상 납입하고 10년 이상 유지하기만 하면 이자소득에 대해 세금을 낼 필요가 없다. 일시납의 경우 2억원까지 비과세된다.

증권사 PB센터는 브라질 국채 가입도 많이 권유하고 있다. 브라질 국채는 표면금리가 연 10~11%로 높다. 한국과 브라질 간 조세 면제 협정에 따라 배당소득세를 낼 필요가 없다. 수익금이 종합과세와 관계가 없다는 얘기다. 차명 계좌에 넣었던 재산을 빼 자신의 이름으로 투자할 때 브라질 국채만큼 유리한 상품이 없다는 게 증권사들의 설명이다.

다만 일각에선 부정한 방법으로 축재한 사람들이 현금이나 금 등을 대거 사들이면서 자금 추적을 원천 차단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한다. 개인금고업이나 대여금고업이 갈수록 활황세를 띠는 게 대표적인 사례다. 차명 재산을 현금화한 뒤 금고에 쟁여놓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3분기(7~9월) 4조9410억원어치의 5만원권이 발행됐지만 19.9%(9820억원)만 환수됐다. 5만원권 환수율이 10%대로 떨어진 건 발행 첫해인 2009년을 빼놓고는 이번이 처음이다. 금융실명법 시행을 앞두고 지하경제가 커지고 있는 것으로 의심된다.

“법 시행 전에 명의 변경하라”

사업상 차명 거래를 해온 사람들은 어떻게 대응하는 게 좋을까. 우선 차명으로 돼 있는 계좌를 모두 가려내 법 시행 이전에 명의를 바꾸라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법이 시행된 이후엔 금융회사들이 계좌주의 실명뿐만 아니라 실소유주의 신원까지 까다롭게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게 된다. 금융 당국은 고객 확인이 제대로 안 될 때는 금융 거래를 중개해선 안 된다고 못 박고 있다.

더 큰 문제는 법 시행 후 원래 재산을 되찾아오는 게 훨씬 어려워질 것이란 점이다. 가족이 아닌 지인의 이름을 이용했다면 돈을 떼이기 십상이다. 또 11월28일 이후 명의를 바꾸면 차명 계좌를 이용했다는 점이 인정되기 때문에 이에 따른 추가 세금까지 납부해야 한다.

배우자와 자녀 등 가족에게는 합법적으로 증여하는 방법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자녀에 대해선 최고 5000만원, 배우자에게는 6억원, 기타 친족에게는 1000만원까지 증여세를 물지 않고 증여할 수 있다. 비과세 증여 금액은 원금 기준이기 때문에 증여받은 가족이 이 돈을 투자 상품으로 굴려 수익을 낸다면 각자의 재산을 더욱 불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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