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는 건 좋다, 그런데 꼭 ‘쇼’를 해야 하나”
  • 파주=이규대 기자 (bluesy@sisapress.com)
  • 승인 2014.11.06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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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르포]대북 전단 살포로 ‘생존권 위협’ 받는 접경 지역 주민들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남북 관계에 ‘삐라’가 핵심 이슈로 등장했다. 북한이 남한 민간단체들의 대북 전단 살포를 구실 로 대남 관계를 냉각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10월10일 북한은 경기 연천 지역에서 남측 대북 전단을 향해 수 발의 고사총 사격을 가했다. 10월30일 열릴 예정이던 2차 고위급 접촉도 대북 전단 살포를 문제 삼으며 무산시켰다. 겨우 트이기 시작했던 대화의 숨통이 ‘삐라’를 계기로 조여드는 형국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새롭게 나타난 현상이 있다. 대북 전단이 남북 관계 경색을 넘어 남남(南南) 갈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등장했다는 점이다.

현재 대북 전단을 살포하는 보수 성향의 단체, 그리고 접경 지역 주민 및 진보 성향 단체 사이에 갈등의 골이 깊다. 양측의 대립은 지난 10월25일 절정에 달했다. 경기도 파주의 임진각과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대북 전단을 살포하려는 보수단체와 이를 저지하려는 접경 지역 주민 및 진보단체 사이에 극한 대치가 빚어진 것이다. 고성이 오가고 몸싸움이 벌어진 끝에 전단 살포는 저지됐다. 그러나 보수단체들은 이후 김포의 한 야산으로 장소를 옮겨 대북 전단을 살포했다고 밝혔다. 민간단체들이 대북 전단을 살포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유독 최근 들어 남한 내부에서 ‘삐라 갈등’이 격렬하게 나타나는 까닭은 무엇일까. 갈등의 진원지인 경기도 파주 일대를 찾아 그 이유를 확인해봤다.

보수단체가 대북 전단 살포를 예고한 10월25일 경기도 파주시 임진각에서 주민들이 도로를 트랙터로 막고 있다. ⓒ 연합뉴스
“조용히 잘 알려지지 않게 뿌리는 분도 많다”

10월29일 방문한 임진각은 조용했다. 평일인 탓에 그 수가 많지는 않으나 국내외에서 온 안보 관광객 상당수가 여전히 이곳을 찾았다. 겉으로만 봐서는 갈등의 흔적을 감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임진각에서 상점을 운영하는 지역민들과 접촉해본 결과 최근의 대북 전단 논란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이들의 말 속에는 대북 전단 살포를 공개적으로 강행하는 일부 보수단체들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다. 살포 자체보다는 그 방식 혹은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모자 가게를 운영하는 한 아무개씨(46·여)는 “뿌리는 건 좋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은 요령이 없다. 지금 남북 관계가 많이 어수선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좀 조심할 필요도 있는데 무조건 밀어붙인다. 특히 이번(25일)에 하신 분들은 너무 ‘쇼’를 하려고 해 부담스럽다. 조용히 잘 알려지지 않게 하는 분도 많다. 그런 것이 정말 진정성 있는 것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일부 단체에서 임진각이나 통일전망대처럼 잘 알려진 장소를 고르고, 장소 및 시간을 사전 예고하는 것 등이 주민들에게는 과도한 ‘언론플레이’로 비친다고 한다. 상인 윤상효씨(55·여)는 “평소 조용히 진행하는 건 그냥 두는데, 오죽 심하게 하면 이렇게 막으려고 하겠나. 가뜩이나 장사가 잘 안 되는데 이런 일 한번 있고 나면 관광객도, 매상도 뚝 떨어진다”고 하소연했다.

10월25일 보수단체들이 살포하려 했던 대북 전단. ⓒ 연합뉴스
임진각으로부터 약 2㎞ 떨어진 마정리 소재의 한 마을을 찾았다. 주민들은 막바지 추수 작업에 한창이었다. 농사를 짓는 이들에게는 요즘이 가장 바쁜 시기라고 한다. “이렇게 바쁜 때 (주민들이) 트랙터를 끌고 항의하러 갔을 정도면 얼마나 화가 나서 그랬겠나.” 이장 김인태씨(66)의 말이다. “여기 사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불안하고 무서울 수밖에 없다. 북한에서 저렇게 반응하는 걸 보면 좀 자제해야 하는데, 왜 쓸데없는 짓을 자꾸 하느냐는 말이 주민들 사이에서 나온다. 삐라 뿌리는 사람들 아무리 저지하고 설득하려 해봐도 소용없다. 정부에서 어떻게든 대책을 마련해 우리를 보호해줘야 할 것 같은데 그냥 방치한다.” 주민 이정숙씨(60·여)는 “삐라 뿌리는 사람들 때문에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다. 그렇게 하고 싶으면 아무도 모르게 감쪽같이 하지, 왜 이렇게 시끄럽게 다 떠들면서 뿌리는지 모르겠다. 자꾸 그러니까 북한에서 폭격한다고 난리 치지 않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취재진과 만난 파주 주민들은 10월 초에 있었던 연천 총격 사건을 자주 언급했다. 10월10일 당시 파주 북쪽의 오두산에서도 북한군의 총격이 들렸음이 뒤늦게 확인되기도 했다. 이렇듯 대북 전단을 직접 조준 타격하는 북한의 군사행동이 상당한 심리적 압박으로 다가온다는 것이 주민들의 공통된 반응이었다. 오두산 통일전망대 인근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송태선씨(60)는 “대북 전단 살포의 취지는 인정한다. 하지만 얼마 전 연천에도 총알이 떨어지지 않았나. 총알이 포탄이 될지, 언제 어디로 떨어질지 누가 알겠나. 북한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걱정이 많다”고 말했다.

민간단체들이 대북 전단을 살포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4년부터다. 남북 장성급 회담을 통해 정부 차원의 대북 전단 살포가 사라진 때다. 이에 반발하는 일부 보수 세력 및 탈북자단체가 민간 차원의 살포를 시작했다. 북한은 이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남한 당국에 중단시킬 것을 반복적으로 요구해왔다. 하지만 군사행동을 경고하는 수준의 강경 대응은 김정은 체제가 들어선 이후 본격화됐다는 것이 주민들의 증언이다. 김정일 사후 체제 결속에 민감해진 북한이 ‘삐라’에 더욱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파주 지역에서 8년째 가게를 운영 중인 하성환씨(38)는 “삐라 관련 갈등이 불거지기 시작한 건 2012년부터다. 그전까지는 북한에서 위협만 줬지 실질적인 군사행동을 암시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최근 김정은 체제가 불안해서인지 북한이 점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느낌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북 전단으로 북한을 자극하면 ‘제2의 연평도 사건’이 터질까 두렵다”고 말했다. 김정은 체제 이후 대북 전단을 향한 북한의 위협이 실체화하면서 ‘생존권’에 대한 주민들의 위기의식을 자극했고, 그 결과 대북 전단을 뿌리는 민간단체들과의 갈등도 고조됐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지난 2012년 10월, 대북 전단을 계기로 상당한 군사적 긴장 국면이 조성되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의 일이다. 일부 탈북자단체들이 임진각에서 대북 전단을 살포할 것이라 예고하자 북한이 “삐라 살포 시 임진각과 그 주변을 직접 조준 격파하겠다”며 초강경 대응에 나선 것이다. 김관진 당시 국방부장관이 “북한이 전단 살포 지점에 포격한다면 원점 지역을 완전히 격멸하겠다”고 맞불을 놓으며 갈등은 극한으로 치달았다. 당시 상황은 임진각 현장에 출동한 경찰의 통제로 해당 단체들이 목적 달성에 실패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이들은 대신 강화도 지역으로 이동해 대북 전단을 날렸다.

“‘제2의 연평도’ 사건 터질까 두렵다”

박근혜정부는 남한 내 갈등 국면에 대해서 발을 빼는 모양새다. 대북 전단 살포 단체들의 활동을 제한하는 등 조치를 취하지 않겠다는 기존 방침을 최근 재확인했다. 통일부 관계자는 10월26일 “헌법상 가치인 표현의 자유를 존중해야 하므로 민간단체의 자율적인 대북 전단 살포를 제한할 법적 근거와 관련 규정은 없다”고 밝혔다. 과거 주민의 신변 안전 우려 등으로 경찰이 필요한 조치를 취한 적은 있으나, 이것은 대북 전단 자체를 막은 것이 아니라 충돌을 막는다는 개념이었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서울에서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선전물 배포를 막아섰던 것과 비교하면 형평성이 없는 논리라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접경 지역 주민들은 대북 전단 살포 단체들의 ‘표현의 자유’가 자신들의 헌법상 기본권인 생존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파주 주민 하성환씨는 “대북 전단과 관련해 남북 갈등이 불거지면 가게를 찾는 손님이 절반 이상 줄어든다. 주민들의 생존이 걸린 문제 앞에서 표현의 자유를 내세울 수 있나. 지금 주민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가 보수와 진보라는 정치적 대립 구도에 묻히는 듯해 걱정이 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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