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은 무<舞>로 시작해 무<無>로 끝난다”
  • 김진령 기자 (jy@sisapress.com)
  • 승인 2014.11.12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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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형식 <무용담> 공연 기획한 진옥섭 한국문화의 집 예술감독

진옥섭 한국문화의 집 예술감독은 춤판을 가장 많이 만든 전통 공연 기획자다. 특히 전통 춤 쪽에서 집요한 발품으로 초야에 숨어 있던 전통 춤꾼을 발굴해 중앙 무대에 널리 알린 것으로 유명하다. 최근에는 다섯 번의 팔무전 행사 사진을 모은 무형문화재 스토리텔링 사진전 <춤>을 열기도 했다.

몸에서 발견하는 무예, 춤, 굿 그리고 비움 

그가 이번엔 <무용담>이라는 강연 위주의 공연을 만들어 11월 한 달 동안 한국문화의 집에 올린다. 이때 ‘무용’은 ‘武勇’이 아니라 ‘舞踊’이다. 그는 춤에 집중하는 공연기획자로서의 이력을 네 개의 한문으로 정리했다. 무예 무(武), 춤출 무(舞), 무당 무(巫), 없을 무(無). 이 네 글자에 얽힌 설명을 들으면 춤과 전통예술에 대한 그의 생각을 알 수 있다.

10월22일 서울 인사동 아라아트센터에서 열린 무형문화재 사진전에서 진옥섭 연출가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시사저널 최준필
그가 사람의 몸짓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쏟은 것은 이소룡이 주인공을 맡은 영화 <당산대형>을 보고 나서다. 촌(전남 담양)에서 태어난 그가 1974년 가을, 10리 길을 걸어 40원을 내고 추석 특선 영화로 상영된 <당산대형>을 봤는데 그때 나이가 열 살이었다. 지금도 그는 “무술은 현란한 몸짓이다. 무술감독이 최고의 안무자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무술영화 때문에 무술에 심취했던 그는 1983년 국립극장 명무전에서 한진옥·문장원·장금도의 춤을 보고 “이것이로구나”라고 감탄하며 춤에 빠져들었다. 군대를 전역한 후 <월간객석>의 예술평론가상을 타며 무용평론가가 됐고 1993년 서울놀이마당에 들어갔다. 그 이듬해 6월 서울 정도 600주년 기념 ‘서울 재수굿 열두거리’를 무대에 올리기 위해 ‘왕십리 개미’로 통하던 만신 김유감을 찾아가면서 새로운 무(巫)의 세계에 눈을 떴다. “굿은 여기서부터 춤, 여기서부터는 사설이라고 구분하기 힘들게 섞여 있다. 닳고 닳은 몸짓, 익은 몸짓의 총합”이라는 것이다.

그는 1990년대 말부터 초야에 숨은 전통 예인을 찾아내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미 노쇠한 그들의 몸에서 군더더기를 다 털어내야 뻗어 올릴 수 있는 소매 끝자락과 단 한 발의 움직임에서 춤의 원형을, 우리 춤의 자산을 본 것이다. “춤이야 젊을 때는 화려하지만 나이 먹어서는 무념무상의 경지가 된다. 그게 춤이 아닌가. 정치 쪽에서 ‘비운다’는 말을 자주 하지만 비우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춤꾼은 마지막에 진짜 비워버린다. 결국 춤은 무(舞)로 시작해 무(無)로 끝난다.”

그는 자신이 겪고 지켜보고 만들어본 춤의 세계를 <무용담>을 통해 전달할 예정이다. “춤은 볼거리다. 보고 즐거워야 한다. 무대 퍼포먼스가 중요하지만 꼭 화려하고 세련된 것만이 춤은 아니다. 할머니들의 느린 몸짓, 마당에 있는 사람의 거친 몸짓도 다 춤이다. 팔무전에서도 4개는 기존에 춤이라고 여기던 것이고, 4개는 춤이 아니고 농악이라고 여기는 분들도 있다. 이런 생각은 관객이 판단할 문제다. 춤은 몸이고, 몸이 무대에서 벌이는 향연이 춤이다. 승무·태평무·살풀이만 춤이 아니다. 춤에 대해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끔 이야기를 할 것이다. 춤이 스토리 없이 진행되다 보니 판소리 등 다른 장르보다 대중성이 약하다. 그렇다 보니 춤 공연에 일반 손님은 안 오고 사제지간 손님들만 온다. 기획자의 입장에서, 춤을 좋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춤이 어떻게 가야 할까 고민을 하고 춤을 이야기함으로써 전통 춤이 재미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무용담>을 기획했다.”

사진전 개막전 때 팔무전에 등장한 이애주·채향순·진유림·박경랑·하용부 등 춤 명인이 임이조와 정재만의 넋을 위로하는 즉석 살풀이 춤판을 벌였다. ⓒ 시사저널 최준필
숨어 사는 명인 찾아 무대에 올려

풍물놀이에 섞인 몸동작도 춤이라는 그의 말은 그의 춤관(觀)에서 비롯된다. “일본 춤이 손의 수식이라고 하면 한국 춤은 발의 오금질이 핵심이다. 그것이 가장 도드라지게 아직도 남아 있는 게 풍물 농악판이다. 무대화되면서 이것저것 섞여 무용이라는 장르가 탄생했지만 고유한 형태의 한국 춤 습관은 굴신굴신 일어났다 섰다 하는 오금질이다.”

그는 지난여름 별안간 세상을 버린 정재만 전 숙명여대 명예교수 이야기도 했다. “임이조 선생이나 정재만 선생은 모두 발디딤으로 큰 분이다. 이분들 이야기도 할 것이다.” 무형문화재 살풀이 이수자인 임이조는 지난해 11월 말에, 무형문화재 승무 보유자인 정재만은 지난 7월 세상을 뜨기 전 모두 팔무전에 등장해 춤사위를 보여줬고, <춤> 사진전에 사진으로 나왔다.

그의 <무용담>에는 숨어 사는 명인을 찾는 이야기도 등장한다. 산업화하면서 전통 예인들은 마이너 중의 마이너로 전락했다. “지금은 우리가 전통 춤이나 소리를 예술이라고 부르지만 전통 기예를 권번에서 익힌 분들은 이를 ‘그짓거리’라고 여긴다. 그분들 삶의 얼룩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게 찬란한 문양이다. 그래서 숨어 있는 분들을 찾으러 다녔다. 안 나오겠다고 손을 젓는 분을 찾아가는 과정은 금과 은을 찾는 것과 같다. 보석을 찾는 기대감이 있다. 그렇게 장금도 선생과 조갑녀 선생을 무대 위로 다시 불러 올렸다. 아쉬운 것은 내가 무대에 진작 모셔야 했는데 너무 늦게 찾아가서 무대에 세우지 못한 분들이다. 심화영 선생이 그런 예다. 그 사람들이 무대에 서면 어떤 이의 80년 세월을 다 바친 무대를 보는 것이다.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면 좋은 열매가 땅에 떨어져 사라지는 것과 같다. 간신히 무대에라도 서면 볼 수 없는 것을 보여주신 분들, 그게 나의 행복이고, 이런 사무친 이야기가 있어서 <무용담> 자리를 만들게 됐다.” 열정적으로 무대를 만드는 그도 못 만드는 무대가 있다. “판소리도 일찍부터 열심히 했지만 내가 가장 열심히 하던 것은 굿과 광대놀음이었다. 내가 좋아하던 분들이 사라지면서 굿도 사라지고 있다. 유랑광대 놀음은 커플로 짝을 맞추던 손해천 옹이 별세하니 강준섭씨가 짝이 없어서 못 올리고, 진도 다시래기도 짝이 없어서 못 올리고 있다. ‘유랑광대계’는 없지만 ‘무용계’는 있다. 제자도 두고 시스템도 있고. 내가 춤도 좋아해서 춤 공연을 많이 올리지만 풍물 명인이나 유랑광대 명인, 굿의 명인들이 돌아가셔서 그분들 공연을 못 올리는 게 안타깝다.”

 


ⓒ KOUS
■ 허종복(1930~1995년)

고성오광대놀이는 농부의 춤이다. 허종복은 1976년 이후 고성오광대놀이 전수에 매진했다. 농사꾼이 춤추러 다니니까 논에서는 피가 자랐고, 허종복은 달밤에 논에서 피를 뽑았다. 덕분에 동네에선 귀신 소동이 일고 그에겐 ‘온 만신의 피’라는 별칭이 붙었다. 진옥섭은 “허종복은 훤칠했고 흔쾌히 뛰쳐나가는 도약이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하는 춤꾼은 보지 못했다. 탈춤을 추는데 ‘탈속(脫俗)’의 춤이었다”고 평했다.

 

■문장원(1917~2012년)

부산 동래의 마지막 한량으로 불리는 그는 젊은 시절 ‘함께 춤추며 놀았던 동래권번의 기생 200명 명단을 갖고 있을 정도’로 한량이었다. 86세 되던 해 예술의전당 <전무후무> 무대에 오르면서 다시 조명을 받았다. 지팡이를 짚고 무대에 등장한 문장원은 그 순간부터 춤꾼이었다. 2011년 동래민속관에서 아흔넷의 나이에 마지막 춤을 보여주고 이듬해 세상을 버렸다.

 

■ 김유감(1924~2009년)

서울 새남굿 기능보유자인 김유감은 ‘왕십리 유개미’로 통했다. 개미처럼 작고 춤을 너무 잘 춘다 해서 ‘개미 위에 개미 없고 개미 아래 개미 없다’는 소리를 듣던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존재였다. 멍석을 밟기만 해도 춤이 번졌고 외씨버선이 화문석을 밟자마자 춤이 스며 나왔다. 춤도 대단했지만 소리도 대단했다. 그의 노래는 수도꼭지 터지듯, 맑디맑은 헤비메탈이었다.

 

■ 심화영(1913~2009년)

충청도 지역의 판소리인 중고제의 마지막 소리꾼으로 불렸던 심화영은 철저히 잊혔다가 2000년대 들어 재조명됐다. 일반인에게는 심수봉의 고모로 알려져 있다. 심씨는 서산 지역에서 유명한 소리꾼 집안 후손이다. 심화영은 노래방을 너무나 이상하게 생각했다. ‘대놓고 노래 부르라면 어쩌라는 것이냐’는 속뜻이 들어 있다. 자신이 광대, 마이너라고 생각했다. 소리나 이런 것은 죄스러운 일이고 밥 먹기 위해 하는 일로 생각했다. 진옥섭은 “1998년 심화영 선생을 찾아갔지만 결국 무대에 못 세웠다. 판소리는 앉아서 할 수도 있는데 춤은 길게 할 수 없었다. 그때 차라리 무대에 말뚝을 박아놓고 모셨다면 그 손놀림, 발놀림을 볼 수 있었는데…. 손끝 이게 기가 막혔는데, 내가 그때 왜 그 생각을 못했는지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다. 몇 점의 사진을 통해 두세 가지 동작이 남아 있다”고 진한 아쉬움을 표했다.

 

■ 유금선(1931~ )

무형문화재인 동래학춤의 구음 보유자인 유금선은 구음의 대가다. 진옥섭은 “구음을 잘하면 누운 소가 돌아보고, 더 잘하면 헛간의 도리깨도 일어나 춤을 춘다고 한다. 더욱 잘하면 송장도 일어나 춤을 춘다. 이분의 춤소리가 그렇다”고 극찬했다. 소리는 통한다고 2009년 LG아트센터 공연에서 유금선은 앙코르로 <여자의 일생>을 불러 엄청난 박수를 받았다.

 

■ 김금화(1931~)

황해도 신을 모시고 남으로 와서 굿을 하는 김금화는 만신이다. 진옥섭은 “이분의 제석춤은 입에다 함이라는 종이를 물고 추는데 위대한 침묵이자 3000년 정도 되는 몸짓이다. 제석이 ‘인드라’라는 힌두의 신인데 이게 한국에 와서 무속의 신이 됐다. 현대에는 이게 무녀의 몸짓에 남아 있는 것이다. 이게 춤의 고고학, 몸의 고고학이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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