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장’, 권력 암투 유탄 맞나
  • 이승욱 기자 (gun@sisapress.com)
  • 승인 2014.12.17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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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춘 실장, 국정 농단 의혹 미온 대처 의문…“비선 실세에 밀렸다” 분석도

서로의 빈틈을 찾아 찌르고 되받아치는 수(手) 싸움이 치열하다. 이른바 ‘비선(秘線) 실세 국정 개입 의혹’ 사건이 조응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 측과 정윤회-청와대(문고리 3인방) 측의 난타전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검찰 수사의 칼끝이 비선 그룹의 국정 개입 진위 여부를 비껴나 문건 유출 파문으로 옮겨가자 진실 공방은 더욱 가열되고 있다. 정씨와 청와대 측은 ‘정윤회 동향 보고서’ 작성과 유출 책임자로 이른바 ‘조응천 그룹’을 지목하고 있는 반면, 조 전 비서관 측은 ‘조작된 시나리오’라며 반박하고 있다.

비선 실세 국정 개입 논란의 중심에서는 다소 비켜 서 있는 듯하지만 주목해야 할 인물이 있다. 바로 청와대 비서실의 최고 책임자인 김기춘 비서실장이다. 김 실장은 청와대 안팎에서 벌어진 권력 암투의 길목마다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다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지금까지 드러난 정황으로 본다면, 김 실장은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던 권력 암투의 진행 상황을 대체적으로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기춘대원군’ ‘왕실장’으로 불리며 막강한 위세를 자랑하던 김 실장이 보여준 대응 조치를 두고 의문이 꼬리를 물고 있다. 김 실장은 평소 일처리가 꼼꼼하면서도 빈틈이 없다는 평가를 받아온 인물이다. 하지만 치열한 권력 암투 과정에서 그가 보여준 일처리에는 납득하기 힘든 대목이 많다. 비서실 내 인사들 사이에서의 불온한 움직임이나 자신의 거취를 둘러싼 의혹이 제기되는 마당에도 그는 너무나 느슨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올해 상반기 청와대 국무회의에서 정호성 제1부속비서관(왼쪽)과 대화하는 김기춘 비서실장. ⓒ 연합뉴스
우선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에서 작성한 ‘정윤회 동향’ 문건을 보고받은 후 김 실장이 보여준 사후 처리 과정이 의문을 낳는다. 지금까지 나온 청와대의 해명을 정리하면 김 실장이 보고를 받긴 했지만, ‘찌라시’(사설 정보지) 수준으로 보고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고를 하지 않은 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는 것이다. 청와대는 ‘당사자 확인을 거쳤다’는 단서를 붙이긴 했지만 공직기강비서관실에서 공식적으로 작성한 문건을 두고 상급자가 신빙성을 자의적으로 평가했다는 것은 적절한 조치가 아니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특히 검사 출신으로 법무부장관까지 지낸 김 실장이 의혹 당사자의 말만 듣고 이를 ‘사실 무근’이라고 결론 내렸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정윤회 보고서·문건 유출에 미온적 대응 의문

청와대 민정수석실 문건 대량 유출 사건과 관련해서도 김 실장의 대처 방식이 지적됐다. 최근까지 드러난 정황을 보면, 조 전 비서관은 지난 6월 청와대를 나온 이후 세계일보에 흘러간 청와대 문서 일부를 구했고, 이 문서를 유출 보고서에 첨부해 ‘3인방’ 중 한 명인 정호성 제1부속비서관에게 전달했다. 하지만 청와대는 ‘문건의 신빙성, 유출 경로나 출처가 명확하지 않다’며 조 전 비서관의 건의를 묵살했다. 문건 유출과 관련해서는 박지만 EG 회장도 남재준 당시 국정원장을 통해 적절한 조치를 요구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결국 청와대가 문건 유출 사건에 대해 전방위 확인 작업에 들어간 것은 조 전 비서관의 건의가 있은 지 6개월 만이다. 하지만 김 실장은 애초 조 전 비서관과 박 회장 등 다양한 루트를 통해 청와대와 국정원에 전달된 문건 유출 정황을 인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김 실장이 취임한 후, 청와대 안팎에서는 “청와대 군기는 제대로 잡을 것” “김 실장이 각별히 청와대 내부 정보 보안에 신경을 쓴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런데 김 실장이 청와대 내부 보안에 치명적인 구멍이 뚫린 상황을 인지하고도 문서 회수나 유출 경로 파악 등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은 석연찮다.

김 실장의 향후 거취 더욱 불투명해져

정치권 주변에서는 비선 실세 국정 개입 의혹과 권력 암투 과정에서 보여준 김 실장의 대응을 두고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우선 김 실장이 박 대통령 주변 인물들의 암투를 충분히 인지했지만, 박 대통령에 대한 심기 경호를 위해 “덮고 가는 것이 좋겠다”고 자체 판단을 했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는 조 전 비서관이 보고한 후 김 실장이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했다는 증언에서도 유추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은 이후 벌어진 상황을 살펴보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김 실장이 애초 상황을 무마하려 했다면, 양측의 불만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관련자들에 대한 인사 조치는 최대한 막았어야 했다. 하지만 ‘정윤회 동향 보고서’와 관련된 박관천 경정과 그의 상관인 조 전 비서관 등 한 축은 줄줄이 청와대를 떠났다.   

또 다른 분석은 김 실장의 미온적 대응이 고도의 정치적 판단에 따른 것이란 견해다. 양측의 팽팽한 갈등 구도 속에서 양쪽에 대해 우회적인 견제를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권력 암투의 중간지대라고 할 수 있는 김 실장이 논란에 직접적으로 발을 담그기보다는 상황을 적당히 컨트롤하는 선에서 사안을 마무리하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분석도 박 대통령의 친동생인 박지만 EG 회장이 여러 경로를 통해 직접적으로 문제제기를 하는 마당에 김 실장이 느긋하게 사태를 컨트롤할 상황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에 따라 김 실장이 비선권력의 위세에 눌려 스스로 자신의 역할을 최소화했거나 눈치 보기를 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김 실장이 언론 등 외부에 비쳐진 것과 달리 청와대에서 장악력이 그리 강하지 않았다는 정황이 곳곳에서 드러나면서 이러한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청와대 비서실 최상층부에 있는 김 실장이지만, 비선 그룹의 힘에 눌리는 상황에서 패배가 빤한 싸움을 하기엔 부담스러웠을 것이란 추측이다.

김 실장이 비선 국정 농단 의혹 사건과 권력 암투 과정 전반에서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는 점 때문에 향후 그의 거취는 더욱 불투명해졌다. 지금 당장은 박 대통령 및 비서관 3인방과 한배를 탄 ‘공동운명체’지만, 정권의 치명적인 위기 상황을 관리하지 못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김 실장의 청와대 장악력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강해진 마당에 청와대 안팎에서 그의 입지는 더욱 좁아들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권력 암투의 ‘유탄’을 왕실장도 피하기 힘든 정국이 펼쳐지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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