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의 앙금까지 덮을 순 없다
  • 김재태 | 편집위원 ()
  • 승인 2014.12.25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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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호를 낸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송년호입니다. 울며 분노하며 지치며 한 해가 훌쩍 지났습니다. 그런데 새해를 앞두고 희망에 부풀어야 할 세밑 풍경이 잔뜩 그늘져 춥고 어둡습니다. 당장 국제 유가 하락으로 러시아의 국가 부도설이 나돌고 국내 경제의 미래를 비관하는 위기론이 여기저기서 대두됩니다. 정치 상황은 또 어떻습니까. 스스로를 ‘야인’이라고 칭하던 사람이 국정을 농단했다는 의혹을 받고, ‘십상시’니 ‘7인회’니 야릇한 말들이 정국을 어지럽히며 여전히 나라를 휘청이게 하고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온갖 희한한 일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터지는 모양새가 정말 가관입니다. 대한민국 권부가 온통 ‘아수라 정글’이 되어버린 느낌입니다.

정부·여당은 국가를 통째로 흔든 이른바 ‘정윤회 문건’ 파동을 검찰 수사로 서둘러 봉합하려 하지만 이마저도 간단치 않습니다.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국민 다수가 이미 수사 결과와는 상관없이 이번 사건을 권력 내부의 파워게임으로 보고, 비선 실세의 국정 개입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입니다. 문건에 적힌 내용이 사실일 것이라고 답한 국민이 반수를 넘습니다. 검찰 수사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한 국민도 64%에 이릅니다. 청와대가 아무리 사태를 빨리 덮으려 하고, 집권 여당이 맞장구를 치며 거들어도 국민들의 마음까지 움직이지는 못했음을 방증하는 수치들입니다. 이런 민심은 이번 사태가 아무리 권부의 의지에 의해 일찍 마무리된다 하더라도 두고두고 국정의 발목을 잡는 요소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신뢰를 잃으면 다 잃는 것이고, 끝을 내도 끝난 게 아닙니다.

기묘하게도 문건 파동에 대처하는 청와대와 정부·여당의 자세는 최근 ‘땅콩 회항’으로 여론의 질타를 받는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사건과 자연스레 겹쳐집니다. 조 전 부사장 측은 사건이 알려진 후 15시간이 지나서야 사과문을 발표했는데, 이 사과문이 오히려 긁어 부스럼을 냈습니다. 진정성이 담긴 사과보다는 사건의 당사자인 승무원과 사무장에 대한 책임 떠넘기기에 더 많은 부분을 할애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조 전 부사장의 아버지인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왜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오도록 누구 하나 사실대로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느냐”며 임원들에게 호통을 쳤다고 합니다. 어떻게든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에만 급급했던 허술하고 얄팍한 대응이 더 큰 화를 불러온 것입니다.

‘문건 파동’을 대하는 정부나 ‘땅콩 회항’을 대하는 대한항공이나 모두 당당하지 못한 대응으로 신뢰를 잃었다는 점에서는 다를 것이 없습니다. 어설프게 발을 빼려 하다가는 더 크게 물릴 수 있다는 교훈을 잊은 것이 불행의 근원입니다.

요즘 <미생>이라는 드라마가 큰 인기입니다. 드라마 속 ‘미생’들이 ‘완생’으로 나아가는 길은 멀고도 험합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잘못을 고치고 배워나가지 않으면 영원히 ‘미생’으로 남을 수밖에 없음을 알려줍니다. 정부나 기업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배우고 고치지 않으면 한 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습니다. <논어>에도 이런 말이 나옵니다. “참으로 잘못된 것은 잘못인 줄 알면서 반성하지 않고 또 고치지 않는 것이다.” 환골탈태까지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주머니 속 송곳만 빼내도 큰일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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