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세상 뜯어고치려면 저항하라”
  • 조철│문화 칼럼니스트 ()
  • 승인 2015.02.05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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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실 꼬집는 <비굴의 시대> 펴낸 박노자 교수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 한국학 부교수로 재직 중인 박노자 교수(42)가 근황을 알려왔다. 그는 “지금 노르웨이는 개강 철이라 학기 강의하면서 내년 초에 영어로 나올 <근대 조선인들의 타자관>이라는 저서를 준비하고 있을 뿐”이라고 전했다. 그에게 지면에 실을 사진을 요구했는데, 최근 고향인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다녀오는 길에 찍은 사진 몇 장을 보내왔다.

박 교수를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잘 아는 외국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오히려 그는 스스로 “난 한국인이다”고 주장한다. 2001년 한국인으로 귀화한 박 교수는 한국 사회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과 날카로운 논리로 지식인은 물론 일반 독자 사이에서 화제를 불러일으킨 바 있다. <당신들의 대한민국>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등을 펴내 ‘토종 한국인’보다 진한 애정으로 대한민국의 현실을 돌아보게 해줬다.

ⓒ 박노자 제공
자본계급이 대한민국을 배타적으로 지배

박 교수는 최근 <비굴의 시대>를 펴냈는데, 이 또한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인지 반성하게 하고 대안을 제시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그는 한국의 현실을 말하려 1990년 소련이 망해가던 시절 레닌그라드 대학교 교수가 한 말을 인용한다. 그 교수는 러시아인들이 모두 자본가가 되려고 앞 다투던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고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 역사에는 공포스러운 장면이 아주 많다. 그러나 현재처럼 이렇게 더러운 시대는…아마도 처음인 것 같다.”

‘전례 없이 더러운 시대’라는데, 여기서 말하는 더러움이란 무엇일까. 박 교수는 “사회적 연대 의식은 증발하고, 저마다 자신과 몇 안 되는 피붙이들의 잇속만 추구하고, 타자의 아픔에 대한 공감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각자도생의 사회를 그렇게 부르는 것이리라. 2014년 11월 현대자동차 비정      노조 조합원 한 명이 ‘드럽고 치사한 나라 살기 싫어 죽으려 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을 시도했다. 그가 말한 ‘드럽다’도 바로 그런 뜻이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대한민국 또한 ‘전례 없이 더러운 시대’를 맞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가 묘사하는 대한민국의 ‘더러운 현실’은 어떤 모습인가.

“대한민국은 ‘1등’만을 강요하는 세상이 됐다. 경쟁에 내몰린 아이들은 생존에 도움이 되는 사람만 골라 사귀고, 친구를 경쟁자로 여기며, 강자에게는 아부하고 약자는 짓밟으며, 동시에 절망의 발버둥을 친다. 개개인은 이렇게 비굴해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이 됐다.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사고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경쟁에 내몰린 아이들이 적자생존의 원리를 체득하며 괴물로 자라나 윤 일병을 구타한 가해자가 된다. ‘나만 잘살면 된다’는 의식이 세월호를 탈출한 무책임한 선원을 만든다.”

박 교수는 이런 사회에서 ‘비굴’은 자연히 삶을 지배하는 핵심 키워드가 된다고 설명했다. ‘냉소의 시대’가 이제는 ‘비굴의 시대’가 됐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자의 시각에서 보면 대한민국의 평균적 국민이 생각하는 사회적 정의란 억울하고 우스운 것이다. 사회주의자에게는 이건희나 이재용 같은 이들이 군대에 가지 않은 것보다도 삼성 일가를 위시한 자본계급이 대한민국을 배타적으로 지배하는 상황 자체가 문제다. 그런데 자산계급이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데 어찌할 수 있겠는가. 대한민국 인구의 90퍼센트는 중·하급 월급쟁이이거나 비교적 규모가 작은 영세한 업자들이다. 하지만 그들 대다수는 각자 그 생존을 도모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무조건 성공해야 한다는 자본 이데올로기를 공유한다. ‘각자가 생존을 도모한다’는 말은 우리의 국시 아닌 국시다. 애국이고 사회고 민족이고 뭐고 그 국시에 비하면 어디까지나 취미, 선택 사항, 장식품이다.”

박 교수는 “이 책을 쓰는 것으로 이런 분위기를 바꿀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다만 비굴하고 잔혹한 시대를 철저히 응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문제를 냉철히 진단하고 우리가 처한 상황과 자신의 모습을 세밀하게 들여다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각자도생의 시대에 최소한이라도 인간 본연의 의무를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비굴의 시대>에서는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정치·사회적 문제도 살폈다. 박 교수는 “지난 20년간 세계는 급격하게 돈과 시장에 그 중심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대신 인간은 사회의 주변으로 밀려났다. ‘사회 없는 사회’ 혹은 ‘인간의 주변화’로 요약되는 이러한 괴물성은 전 세계가 동일하게 겪는 문제다. 이는 필연적으로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몰락의 징후를 보이는 신자유주의 흐름, 미 제국의 약화, 아랍권과 우크라이나 혁명 등이 이를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괴물을 만드는 이 세상에서 과연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도무지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과연 출구를 찾을 수는 있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박 교수는 “그래도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가만히 있으라’는 지배층의 요구에 ‘조금이라도 대들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린다면’ 그것만으로도 상황은 조금 달라질 수 있다.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관심을 갖고 연대와 투쟁을 한다면 당장 문제가 깨끗이 해결되지는 않아도 미친 세상을 뜯어고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반성하지 않는 한 이 지옥의 삶은 무한히 반복된다. 스러져간 이들을 기억하고 고통의 실체를 정확히 이해할 때 비로소 새로운 길이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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