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성룡 신드롬, "정승된 자는 1인자 아닌 백성의 종이다"
  • 하재근│대중문화평론가 ()
  • 승인 2015.03.05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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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대하사극 <징비록>으로 본 류성룡 신드롬

KBS 대하사극 <징비록>이 시작됐다. 한동안 명맥이 끊기다시피 했던 대하 정통 사극의 맥을 이은 것이 <정도전>이었다. <징비록>은 <정도전>에 이어 KBS 대하 정통 사극 부활 제2탄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어서 시작부터 관심을 모았다.

이 작품은 선조가 득의양양했던 순간부터 시작됐다. 명나라의 법전인 <대명회전>엔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이며 고려 공양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돼 있다. 조선은 국초 이래 이 내용을 바로잡아달라고 계속 명나라에 요청했지만 명나라가 받아들이지 않아 왕조의 근심거리가 됐다. 그런데 선조 대에 이르러 마침내 이 요청이 받아들여져 내용이 바로잡혔고 이는 조선의 경사이며 선조 개인적으로도 중대한 사건이었다. <징비록>은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KBS 대하 사극 에서 류성룡 역을 맡은 김상중. ⓒ KBS
류성룡의 설득과 통합의 리더십

선조는 조선 최초의 방계 출신 임금으로 자격지심, 열등감, 신하에 대한 두려움 등에 짓눌려 살아왔다. 신하들이 정통성 없는 자신을 보위에 올려준 것이기 때문에 언제든 신하들에 의해 내쳐질 수 있다는 걱정을 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조 개창 이래 가장 문제가 돼왔던 왕조의 근심거리를 해결했다. 이것은 선조의 정당성을 세워준 사건이며 선조 스스로도 한껏 자부심을 느낄 만한 경사였다. 이렇게 선조가 가장 빛나던 순간에서부터 시작된 극은 이내 동인과 서인의 당쟁과 왜의 준동으로 위기 국면에 빠져든다. 앞으로 선조의 위신이 지속적으로 추락하는 과정, 그런 선조를 받들고 명나라의 패악을 관리하며 전쟁을 지휘하는 류성룡의 지난한 싸움이 그려질 것으로 예상된다.

KBS 사극 제작진은 왜 정도전 다음으로 류성룡을 선택했을까. 일단 지도자 중에서 골랐을 것이다. 과거엔 먹고살기는 힘들었어도 목표가 확실했고 거기까지 가는 길도 확실한 것 같았다. 허리띠 졸라매고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는 믿음이 있었다. 이 시대의 문제는 지향점 자체가 사라진 것 같은 혼란스러운 국면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국민은 강력한 지도자를 갈구한다. 우리의 나아갈 길을 밝혀줄 지도자 말이다. 사극은 바로 그런 국민의 염원을 반영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대표적인 지도자 중에서 주인공을 물색했을 것이다.

지도자도 평시의 지도자가 아닌 위기를 헤쳐나간 지도자, 국난 극복의 지도자 중에서 골랐을 것이다. 많은 국민이 현재의 상태를 위기 상황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의 지도자들에 대한 불신과 실망이 극에 달했기 때문에 대안적인 모습을 보여줄 지도자를 찾았을 것이다.

이럴 경우 1순위는 단연 이순신 장군이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지난해에 <명량>으로 신드롬을 일으켰고 KBS도 <불멸의 이순신>을 재방송한 바 있다. 그런 데다 바로 이어 이순신 장군을 내세우는 것은 부담이 있기 때문에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극복한 또 다른 영웅 류성룡이 낙점된 것으로 보인다.

최근 한국은 정승(총리)감을 찾지 못해 홍역을 치렀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홍원 총리가 사상 최장수 기록을 세우겠다는 자조까지 나왔다. 비교적 무리가 없을 것 같다는 이완구 총리마저 까면 깔수록 양파 속껍질처럼 연이어 나오는 의혹 때문에 위신이 구겨졌다. 이완구 후보자 인준이 가능했던 것은 순전히 이번마저 낙마하면 정권이 위험하다는 정치적 계산과 지역감정 선동 때문이었다. 이렇게 구차하게 총리가 임명되는 상황에 류성룡은 진정한 정승의 상을 제시하는 롤 모델이 될 것으로 보인다.

선조가 호국 영웅을 주살하면서 자기 권력에만 집착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서민의 고충을 헤아리려 한 류성룡과 대비된다. 이런 대비를 통해 이 작품은 자연스럽게 ‘중요한 것은 1인자의 권력 보위가 아니라 백성의 안위다. 무릇 정승 된 자는 1인자가 아닌 백성을 지켜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게 될 것이다.

에서 선조 역을 맡은 김태우. ⓒ KBS
500년 전 류성룡의 고뇌 아직도 유효

임진왜란 당시 류성룡은 천인(노비)에게도 군역을 지우고 전공을 세울 경우 벼슬까지 주는 개혁을 실시했다. 이것은 부자 양반의 반발을 초래했다. 사노비가 사유 재산이었기 때문이다. 양반의 반발에 대해 류성룡은 양반까지도 군역을 져야 한다고 응수했다. 양반과 그 영향 아래 있는 사노비가 군역을 피하는 상황에서 일반 서민에게만 나라를 지키라고 하는 것은 정당성이 없었다.

류성룡은 또 특산물을 바치는 공납을 쌀로 바치도록 하는 개혁도 실시했는데 이것은 대동법의 선구적 역할을 한 것이었다. 대동법은 광해군 때부터 조선의 가장 핵심적인 논란이 된 사안이다. 부자 양반들은 대동법이 아닌 기존의 공납제도를 선호했다. 류성룡의 공납 개혁은 서민을 위한 것이었다.

이런 점으로 봤을 때 류성룡은 부자 양반의 특권을 제한함으로써 부자와 서민으로 양극화된 조선을 통합해 국난을 극복한 통합의 리더였다고 할 수 있다. 이것도 류성룡이 정도전에 이어 대하 사극의 주인공으로 낙점된 이유일 것이다. <징비록>은 앞으로 류성룡이 전란 극복을 위해 양반의 기득권을 제한하면서 사대부와 갈등하는 모습을 그릴 것으로 보인다. 조세 문제(공납 등)와 병역(군역) 등이 갈등의 중심에 설 것이다.

류성룡과 갈등하는 사대부는 서인으로 그려질 것이다. 이미 방영 초기부터 서인은 류성룡을 숙청하라며 선조를 압박하는 집단으로 등장했다. 송강 정철을 필두로 한 서인은 기축옥사 사건으로 수많은 동인을 도륙하고 집권한 당파였다. 극 중에서 온갖 음모로 정적을 제거해 권력을 독점하려는 서인에게 류성룡은 끝없이 인내하면서 대화로 타협을 시도한다. 류성룡은 정적을 제거하려고 하지 않고 국익의 관점에서 대승적으로 화합하려 한다. 피아를 가리지 않고 적재적소에 인재를 쓰려고 한다. <징비록>은 이러한 류성룡의 설득과 통합의 리더십을 강조하면서 극한 대결과 ‘자기 사람만 쓰기’를 일삼는 현재 정치권을 경계할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초기 조선은 허망하게 무너졌다. 명나라가 깜짝 놀라 조선이 왜에 일부러 져주며 길을 열어준 것 아니냐고 의심할 정도였다. 조선은 양극화와 당파 싸움 등으로 제풀에 쓰러졌다. 류성룡은 훗날을 경계하기 위해 <징비록>을 썼지만 왜란 이후에도 조선의 병증은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오늘날 다시금 양극화, 병역, 조세 문제 등으로 민심이 흉흉하다. 류성룡의 고뇌는 아직도 유효하다. 500년 전 류성룡의 고민을 오늘에 죽비 소리로 전하는 것, 그것이 <징비록>의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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