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속의 국기
  • 김재태 | 편집위원 ()
  • 승인 2015.03.12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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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대나무로 유명한 지방의 한 도시를 여행하던 중 ‘튀는’ 풍경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어른 몸보다 큰 돌덩이가 길가에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거기에 쓰인 글자가 뜻밖이었습니다. ‘바르게 살자’. 비석처럼 서 있던 그 돌 위에 새겨진 문구가 그랬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이 비석 속의 구호를 따라 얼마나 바르게 살고 있을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1960~70년대를 떠오르게 하는 훈계 조의 비석 문구만큼은 생경하고 강렬한 인상으로 뇌리에 남았습니다.

지난 3월1일은 올해 들어 처음 맞은 국가 기념일이었습니다. 역사 속 그날 그랬던 것처럼 전국 각지에서 태극기가 펄럭였습니다. 오랜만에 거리를 덮은 태극기를 바라보며 가슴속 깊이 뭉클함을 느낀 사람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한국인으로서의 긍지를 상징하는 그 태극기가 최근 뜨거운 논쟁에 휘말려 있습니다. 국기 게양률이 저조하다는 이유로 정부가 국기 관련법을 개정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방송과 민간 기업, 노인, 학생 등을 동원한 태극기 달기 운동도 추진하기로 한 것으로 알려져 큰 논란이 일었습니다. 정부는 “광복 70주년인 올해 선열들의 위업을 기리고 분단 극복의 의지를 다지기 위해서”라고 설명했지만 그 저의를 의심하는 시선이 강합니다. 국민이 국기를 다는 행위에까지 정부가 개입해야 하느냐는 비판이 곳곳에서 쏟아집니다. 게다가 정부의 방침이 영화 <국제시장>과 관련해 나온 박근혜 대통령의 언급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말 핵심 국정과제 점검회의에서 “영화에도 보니까 부부싸움을 하다가도 애국가가 퍼지니까 국가배례를 하더라. 그렇게 해야 나라라는 소중한 공동체가 건전하게 발전해나가지 않겠느냐”고 애국심을 강조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국기를 소중히 여기며 애국심을 다지는 것은 국민으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누가 시켜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우러나오는 것이 마땅한 마음 혹은 행위입니다. 정부의 방침을 두고 일각에서 ‘독재국가적인 발상’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것은 그런 마음까지 강제할 수 있다고 믿는 정부의 오만에 대한 거부감의 표출인 것입니다.

국민을 가르쳐야 할 대상으로 보는 시대착오적인 계몽주의 발상이 여전히 아무렇지 않게 돌출하는 국가는 이미 그 자체로 낡은 국가이자, 그 국가의 구성원인 국민 개개인을 부끄럽게 하는 국가입니다. 국민을 무시하고 국민을 부끄럽게 만든 처사에서는 최근 ‘김영란법’ 졸속 처리로 자신들의 이익은 굳건히 챙기고 다수의 국민을 실험 대상으로 전락시켜버린 국회도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바르게 살자’라는 비석을 엄청난 크기로 세운다고 마을 사람들이 다 바르게 살게 되리라 장담할 수 없듯이 국가가 애국심을 주입한다고 해서 모두를 애국자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국민에게 애국심을 조르기에 앞서 국민 스스로 사랑하고 자랑스러워 할 정부와 국가를 만드는 일이 우선입니다. 국가가 잘하면 애국심은 저절로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그런데도 국가가 계속 국민을 계몽하려 든다면 국민들은 그런 국가가 부끄러워 견딜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국민의 수준을 낮춰 보고 무시하는 국가의 수준이 어떨지는 새삼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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