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시인 시바타 도요는 아흔이 넘은 나이에 처음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허리가 아파 취미였던 일본무용을 할 수 없게 되면서다. 낙담한 그녀에게 아들이 시 쓰기를 권했다. 시를 쓰며 자신이 살아온 평생을 돌아봤다. 그리고 알게 됐다. 인생에 괴롭고 슬픈 일만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가족·지인 등 수많은 인연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관심 덕에 지금의 내가 있다는 것을. 이런 마음을 따뜻한 성찰과 격려의 언어로 담아냈다. ‘나도 괴로운 일 / 많았지만 / 살아 있어 좋았어 // 너도 약해지지 마’(시 <약해지지 마> 중). 노(老)시인이 인생의 끝자락에서 남긴 시들은 독자의 가슴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최규엽 여사는 펜 대신 붓을 잡았다. 지난해 8월의 일이다. 여든을 넘기고서 처음으로 수채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세상을 떠난 남편의 빈자리를 캔버스에 채우고 싶었다. 평생의 동반자였던, 한국 언론계에 큰 족적을 남긴 ‘영원한 저널리스트’ 박권상 전 KBS 사장이 지난해 2월 타계했다. 사별의 고통이 최 여사를 휘감았다. 낙담한 그녀에게 큰딸 박소희씨가 그림 그리기를 권했다. 손녀뻘 되는 미술교사를 데려왔다. “나이 여든한 살에 뭔가를 새로 시작한다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한 수채화 그리기가 이제는 내 삶에 위로가 되고, 힘을 준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데 용기를 준다.” 최 여사는 그림을 그리며 남편과의 평생을 애틋하게 돌아볼 수 있었다.
최규엽 여사는 전시회를 여는 소감을 박 전 사장에게 띄우는 편지로 갈음했다. 종이 두 장을 빽빽하게 채운 손글씨 편지였다. 대학 4학년 졸업반 시절 처음 남편을 만나 짧은 연애를 했던 기억, 결혼 직후 미국 유학을 떠난 남편과 20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키워나간 사연 등을 회고했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쁘게 살아가는 기자로 돌아가버렸다. 꿈에도 나타나던 그립고 보고 싶던 내 님은 신문사와 독자의 차지가 돼버렸다”며 젊은 시절 남편의 정력적인 언론인 활동을 떠올렸다.
최 여사는 박 전 사장과의 결혼생활을 돌아봤을 때 드는 첫 번째 감정으로 ‘자랑스러움’을 언급했다. 박 전 사장이 50세를 갓 넘긴 1980년 당시 군사정권의 압력에 의해 ‘해직 기자’가 된 일, 영국 유학 후 1989년 귀국해 시사저널을 창간하며 언론계에 복귀한 일, 70세 무렵인 1998년 KBS 사장으로 취임해 언론인으로서의 마지막 꿈을 불태웠던 일 등이 최 여사의 기억에 선명하게 각인돼 있었다. “항상 정권의 표적이 되다시피 했던 언론인 남편을 둔 아내로서 남편이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일 하지 않고 열심히 자기 일 좋아하며 살아가고, 그런 아버지의 등을 보면서 아이들도 일찍부터 철이 들었던지 아빠가 해직된 시절에도 잘 커주어서 항상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최 여사는 남편과 주고받았던 편지를 언급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평생에 걸쳐 자주 편지를 써줬던 남편, 그중 몇 통엔 ‘사랑한다’는 표현이 담기기도 했다. 말로는 감정 표현이 서툰 남편이었지만, 편지의 행간에는 지극한 사랑과 존중의 마음이 배어 있다고 느꼈다. 남편이 떠나고 난 뒤, 평생 마음속 감정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다 지나고 나면 이렇게 허무한데 살아 있을 때 더 잘해줄 걸 하는 후회가 든다.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난다면 얘기도 부드럽게 해보고 싶고, 애교도 부려보고, 손도 잡아달라고 말해보고 싶다. 이제라도 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꼭 해보고 싶다.”
전시를 기획한 정희남 대담미술관장은 그림에 담긴 ‘진심’이 프로 작가들에게도 귀감이 될 만하다고 평가했다. “전시작을 보면 가슴이 따뜻하고 뭉클해진다.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소중한 사람을 향한 따뜻한 마음을 그대로 풍경으로 옮긴 듯하다. 노인이 되면 자기 할 일이 다 끝났다고 생각하게 되기 쉽다. 나이가 들어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최 여사의 작품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82세 늦깎이 화가의 데뷔작들 속에는 참 언론인으로 살다 간 남편을 향한 ‘은빛 그리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