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야속하다
  • 김태일 | 영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
  • 승인 2015.04.23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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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완종 리스트’ 사태가 어디로 흘러갈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대통령은 잰걸음으로 남미행 비행기에 올랐다. 분노와 의구심에 가슴을 떨고 있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그는 표표히 사라졌다. 그가 남긴 말은 다녀와서 보자는 것이었다. 이미 예정된 일이고 가야 할 일이라고 짐작하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허탈하다. 대통령이 야속하다. 그가 탄 비행기를 속절없이 쳐다본다.

박근혜 정부에서만큼은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대통령이 국민과 소통을 잘하지 못하고 어떤 일의 결정을 제때 내리지 못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적어도 돈을 둘러싼 추문만큼은 없을 것이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대통령 자신이 분명한 원칙이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박근혜 정부의 심장부에서 부패 스캔들이 터져 나왔다. 전·현직 청와대 비서실장의 이름이 입에 오르내리고 현직 국무총리가 의혹의 한가운데 서 있다. 세월호에 버금가는 참사다. 정치권력의 정당성 자체가 무너져 내리는 대형 사고다.

걱정스러운 것은 진실이 제대로 밝혀질 것인지,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어떤 집단적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인지가 확실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 일도 별 볼일 없이, 흐지부지 끝날 가능성이 크다. 검찰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있는 건 알지만, 글쎄다. 성완종이라는 사람을 어떻게 믿느냐는 얘기를 누군가가 솔솔 흘리는 것만 봐도 그렇다. 정치권을 넘나들면서 궂은일 마다하지 않고 커온 사람인지라 그런 말을 들을 법도 하다. 그러나 자기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한 이야기를 가벼이 다룰 일은 아니다. 한 언론인이 어떤 수사관의 말을 인용하면서 거짓말하고 남을 속이는 사람은 자살을 하지 않는다고 한 지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검찰이 비장한 각오로 칼을 뽑아들었다가 흐지부지한 것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니다. 그러다가 증거가 없네, 공소시효가 지났네, 증인이 입을 열지 않네 하면서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이 일도 그렇게 끝날 가능성이 크다. 그러다가 반대 세력에도 돈 받은 사람이 있느니 없느니 하면서 정치적 물타기를 하는 것도 상투적으로 있는 일이다. 빤하고 진부한 결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공소시효 핑계도 댈 수 없는 ‘뜻하지 않은’ 증거라도 나오면 그때는 대가성 어쩌고저쩌고하는 핑계를 대면서 죄가 성립되네 마네 할 것이다.

이제는 제발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한 번 본 영화를 또 보는 것처럼 지겨운 일이다. 정치인들이 만드는 이런 종류의 영화는 대개 특검으로 엔딩을 장식한다. 이런 싸구려 영화를 만들지 않으려면 대통령이 빨리 결단해야 한다. 다녀와서 보자고 할 일이 아니다. 통합진보당 문제는 해외 순방 중에 전자결재까지 하지 않았던가. 권력 심장부의 부패 스캔들은 그보다 몇 곱절 중요한 일이다. 국무총리, 전·현직 비서실장, 그리고 수 명의 권력실세들이 자진해서, 앞장서서 실체적 진실을 밝히도록 조치를 해야 할 것이다. 대통령 자신도 이번에는 남의 말 하듯이 말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최소한 국무총리는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진실 규명에 임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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