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김정은을 지렛대로 쓰려나
  • 이영종│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
  • 승인 2015.04.29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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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9일 러시아에서 회동 가능성…소원했던 관계 복원 나설 듯

3월 중순 서울을 방문한 류젠차오(劉建超) 중국 외교부 부장조리(차관보급)는 미국의 고(高)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인 사드(THAAD)의 한반도 배치 문제에 대해 거침없는 발언을 쏟아내 논란을 빚었다. 한·중 차관보 협의에서 사드 문제를 정식 거론해 우려를 표명했고, “중국 측의 (사드에 대한) 관심과 우려를 중시해줬으면 좋겠다”고 노골적으로 말했다. 게다가 나경원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을 만나“저희 둘이 함께 브리핑을 하면 기자들은 아마 위원장님을 자주 보고 싶어 할 것 같다. 미인이시니까…”라는 부적절한 언급까지 하는 바람에 구설에 올랐다.

5월 러시아에서 북·중 정상 회동 전망

언론이 류젠차오의 입에 주목하는 동안 외교 당국자와 대북 부처 관계자들은 또 다른 한 인물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수행원으로 함께 방한한 싱하이밍 외교부 아주사 부사장이었다. 몽골 주재 중국 대사로 내정된 것으로 알려진 상황에서 그가 부임 준비 대신 한국을 찾았다는 점에서였다. 류젠차오 일행이 돌아간 후 서울의 외교가에는 북·중 정상회담 개최설이 나돌기 시작했다.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만나기 위한 물밑 접촉이 시작됐다는 얘기였다. 아시아·아프리카회의(반둥회의) 장소인 인도네시아 반둥이나 베이징이 회담장으로 검토되고 있다는 구체적인 말도 흘러나왔다. 그 실무 역할을 책임진 인물이 싱하이밍이란 관측도 유력하게 제기됐다. 중국 측이 우리 정부에 북·중 관계와 관련한 모종의 귀띔을 해준 것이란 분석이 외교 소식통들 입을 통해 번져나간 것도 이때쯤이다.

오는 5월 러시아에서 회담할 가능성이 점쳐지는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왼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 조선중앙통신· EPA 연합
북·중 정상회담의 실타래는 다소 엉뚱한 곳에서 풀렸다. 러시아 모스크바에서의 만남으로 귀착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이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5월9일 러시아에서 열리는 제2차 세계대전 전승 7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로 결정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시진핑 주석과의 만남이 성사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얘기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외교담당 보좌관인 유리 우샤코프는 지난 4월22일 “김정은 제1위원장의 기념행사 참석을 북한 관리들을 통해 확인했다”고 밝혔다. 러시아는 이번 행사와 관련해 60여 개국 정상에게 초청장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해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한 항의 의미로 불참을 결정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비롯해 25개 나라 정부 대표가 참석할 예정이다.

김정은의 러시아행은 푸틴 대통령이 공들인 작품이다. 국제사회 제재 조치 등 고립 상황을 맞은 푸틴은 대북 문제를 발판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려 하고 있다.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시험 발사 등 도발 행동으로 시진핑 체제와 소원한 관계가 된 김정은을 끌어안음으로써 북·러 관계를 복원하겠다는 속내도 드러내고 있다. 김정은의 모스크바 방문이 가시화하면 푸틴은 정상회담을 통해 긴밀한 외교 관계를 구축하는 것뿐 아니라 러시아 천연가스 제공 같은 경제 협력 프로젝트도 진행할 수 있다. 무엇보다 집권 4년 차에 접어든 김정은 위원장의 첫 외교 무대를 모스크바에 차림으로써 상징적 의미를 과시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하지만 푸틴의 이런 구상은 김정은과 시진핑의 만남이 이뤄지는 순간 헝클어질 공산이 크다. 최근의 복원 노력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대북 영향력은 중국의 그것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게 사실이다. 잘못하면 잔칫상은 푸틴이 차리지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인공은 시진핑과 김정은이 될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북·중 정상의 만남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는 김정은 집권 이후 냉랭해진 관계 때문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한 2011년 12월 최고 지도자에 오른 직후 핵실험 등의 도발로 출범 초기의 시진핑 체제에 부담을 안겼다. 유엔과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에 동참한 중국을 향해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는 등 비난까지 퍼부으면서 베이징 지도부를 경악하게 했다.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기를 거치며 ‘산과 물이 잇닿은 인방(隣邦)’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혈맹 관계를 유지했지만 김정은 시기에 접어들며 망가진 것이다. 여기에 2013년 말 친중파의 핵심이라 할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을 김정은이 처참하게 처형함으로써 중국 영도 그룹은 완전히 등을 돌리는 모습을 보였다.

김정은은 이후에도 ‘국산품 애용’을 강조하며 중국 상품에 대한 거부감을 보였다. 또 지난해 11월에는 평양 순안비행장 터미널 공사장에 들러 중국식으로 인테리어가 이뤄진 데 대해 불만을 나타내며 책임자인 마원춘 국방위 설계국장을 숙청했다. 미국 의회 소속 미·중경제안보검토위(USCC)가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북·중 간 고위층 교류는 10회에 그쳐 2009년 이래 6년 만에 최저치로 떨어졌다. 북한 노동당과 중국 공산당 간 교류도 2013년과 지난해에는 단 한 차례도 없었다는 것이다. 지난 3월31일자 로동신문이 리진쥔 평양 주재 중국 대사의 부임을 신문 귀퉁이에 자그마하게 전한 것도 예전과 달라진 분위기를 단적으로 드러낸다는 평가다.

김정은, 첫 외교 무대 데뷔 앞두고 저울질

김정은과 시진핑 간 정상회담은 그동안 소원했던 관계를 복구하는 데 초점이 맞춰질 것으로 보인다. 물론 김정은 위원장이 북핵 문제 등에서 중국의 요구 상황을 파격적으로 수용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또 전통적 우호 관계에 비춰볼 때 베이징 등을 먼저 찾지 않은 데 대한 중국 지도부의 불쾌감은 여전할 수 있다.

하지만 중국도 김정은 체제의 북한을 어떤 식으로든 껴안고 가야 하는 상황이란 점에서 일정 수준의 해법을 마련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또 박근혜 대통령이 시진핑 주석을 통해 김정은에게 남북 관계 진전과 관련한 모종의 메시지를 전달할 가능성도 점쳐진다.

김정은 위원장은 중국과 러시아로부터 동시에 러브콜을 받는 상황에서 첫 외교적 데뷔를 앞두게 됐다. 중국과 러시아 방문 때 열차를 이용했던 아버지 김정일과 달리 김정은은 전용기를 이용한 이동을 선호한다. 신속한 이동이 가능하고 그만큼 동선 파악이 쉽지 않을 것이란 얘기다. 김정은이 막판까지 초읽기를 하며 몸값 높이기를 시도할 것이란 관측도 제기된다. 베일에 싸인 최고 지도자로서 첫 데뷔 무대를 다자 외교 테이블로 잡은 김정은의 선택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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