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것의 아름다움, 그 찬란한 빛이여!
  • 정준모│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 승인 2015.05.21 16:1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호림박물관 신사분관 <조선의 나전-오색찬란> 전시

지금은 보기 힘들어졌지만 1970년대만 해도 대개의 가정에는 자개로 만든 장롱이나 문갑, 화장대 등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눈부신 화려함이란 신비에 가까운 것이었다. 조개를 머금었던 소라·전복 등 패류의 껍데기에서 빛을 반사해내면서 드러나는 영롱한 오색은 실로 아름답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검박한 집안의 세간 중에서도 작은 자개로 만든 함이라도 하나 놓일라치면 이내 방 안이 환해지는 느낌이 들면서 빛으로 가득 차곤 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 바쁜 일상 중에서도 틈이 나면 자개장을 닦아 윤을 내는 일을 하셨다. 이렇게 우리 생활 속에서 귀하게 다루어지고 쓰이던 세간들이 호마이카 제품이나 철제 캐비닛으로 대체되면서 점점 자취를 감추더니 이제는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는 물건이 되고 말았다. 이는 우리의 삶이 물질적으로 나아졌다고 하지만 문화적으로는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삶과 함께해온 전통 공예가 명맥을 잇지 못하고 세상에서 사라져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아름다움’과 ‘쓰임’이라는 공예의 본질적 가치에서 이제는 완상용 아니면 과시용으로 집 안의 장식장에 들어앉아 있는 공예품들이 대부분이다. 그것도 서양 제품들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다.

①나전매죽조문상자, 18세기, 27.7×27.7×10.0 ② 나전모란당초문상자, 19세기, 41.5×23×16.5 ⓒ 정준모 제공
1970년대부터 전통문화 박제화

이렇게 우리의 전통적인 공예가 쇠퇴한 이유를 찾아보면 여러 가지가 있을 터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전통 기법과 재료에 매여 오늘이라는 시대를 반영하지 못한 탓이 크다. 이는 ‘보존’을 우선시하는 문화재 보호법 때문이다. ‘계승’과 ‘발전’이라는 중요한 가치가 무시되면서 새로운 도구와 기계들, 재료들이 등장하는데도 조선시대 말의 기법과 방식에 매달려 있었던 탓이다. 게다가 ‘전통’이라는 개념이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일제가 지배국으로서 문화적 우위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이른바 자신들의 전통을 ‘창조’하는 한편 피지배국 대한민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희석시키고 문화적 열등감을 조장하기 위해 한국의 ‘전통 지우기’를 시도했다. 그 결과 광복 후 과도하게 전통을 복원하고 지키려는 열정이 민족적인 목표로 강하게 자리 잡으면서 변화보다는 전통을 고수하려는 흐름이 강해졌다. 1970년대에 특히 ‘민족’을 강조하면서 국민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한 전략의 하나로 ‘전통문화’를 ‘국가 공식 기억화’하려는 시도와 맞물려 전통문화가 오히려 박제화한 셈이다.

자개는 순수 우리말이다. 한자로는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도 소라 라(螺), 비녀 전(鈿)자를 써서 나전이라 부른다. 사실 자개는 나무에 직접 새겨 상감을 할 때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나무 바탕에 칠을 올린 후 자개를 붙이고 다시 칠을 올리고 그다음 표면을 연마해서 자개 무늬가 드러나게 하기 때문에 통상 나전에는 칠기라는 말이 붙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나전칠기, 즉 자개 작품이 나오려면 솜씨 있는 목수와 재주 좋은 칠 장인, 그리고 자개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사람이 삼위일체를 이루어야 한다. 물론 거기에 좋은 칠과 나무, 자개는 필수다. 자개를 사용해서 아름다운 빛의 예술로 승화시킨 유물들은 이미 가야에서 발굴됐으며, 옻칠함 등이 낙랑 고분에서 발굴되고 있는 것으로 미뤄 우리나라의 칠과 자개의 역사는 결코 만만치 않다. 특히  빛에 따라 다양한 색을 투사하는 청록 빛깔을 띤 전복 껍데기를 주로 사용해 그 발색이 유난한 것이 특징이다.

① 나전화조어해문문갑, 19세기, 88.6×31.0×42.1 ② 화각사령문함, 19세기, 24.9×16.7×16.7 ③ 나전호작문베갯모, 19세기, 각 지름 22.0 ⓒ 정준모 제공
가야시대나 신라시대의 자개도 매우 아름답지만 고려시대에 들어서는 더욱 정교하고 아름다우면서 화려해졌다. 하지만 불가에서 사용하는 경함이나 염부합, 향갑, 유병 등 총 15점 내외가 국내에 남아 전해지는데 대부분은 일본을 비롯해 외국에 반출된 상태다. 고려시대의 자개가 표면을 덮는 형태였다면 조선시대의 자개는 칠이 주가 되고 자개의 양이 줄어 공간과 여백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이런 자개 작품은 여염집보다는 주로 왕실에서 사용되었다. 이후 19세기 조선조 말에 들어서야 일반 백성들도 손에 넣을 수 있는 귀한 것이었다. 수요가 많아지면서 기법도 다양해지고 산수나 풍경을 담은 일상적인 묘사가 주를 이루지만 한편으로는 귀갑문 같은 기하학적인 문양을 기물 전체에 씌우는 경우도 있다. 이는 조선 후기 중인 계급과 상인들이 신흥 상업자본층을 형성하면서 그들의 취향이나 교양에 맞는 제품을 만들게 되고 장인들 역시 양산을 위해 공정을 다변화하면서 생겨난 결과다.

자개 예술의 정수 모아 전시

이런 역사와 전통을 지닌 아름다운 자개도 이제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가고 있다. 아마도 우리 세대를 지나면 그 맥이 끊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점에서 호림박물관 신사분관에서 마련한 <조선의 나전-오색찬란>

전은 반갑기 그지없다. 사실 한국의 전통미술은 그간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 1889~1961)가 주장한 ‘소박’이나 ‘무기교’ 등으로 일반화돼왔다. 하지만 우리의 자개 예술이나 나전칠기를 보면 그의 말이 결코 우리 전통문화와 예술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채 결론에 이르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자개 예술은 발전을 거듭하면서 화각과 거북의 등껍질, 상어 가죽을 사용해 기물을 장식하기에 이른다.

자개 예술의 정수만을 모아 안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전통을 살펴보면서 새롭게 우리 자개 공예의 현실을 돌아보게 된다. 이러한 기교와 아름다움이 할아버지 시대의 것이 아닌 우리 시대의 자개 예술은 어떤 것이고 어떠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되묻게 해준다. 날이 좋다. 많은 사람이 야외로 나가지만 거꾸로 가족들과 박물관에 들러 옛것의 아름다움과 전통을 이야기하고, 이것을 어떻게 우리 시대의 것으로 만들지를 놓고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눈다면 이것이야말로 창의적인 일이 아닐까.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