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칼날 위의 歷史] #41. 권력 단맛에 취해 초심 잃고 말아
  •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
  • 승인 2015.06.09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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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구대신 전횡 질타하고 개혁 부르짖은 사림, 집권 후 변질

조선 후기의 문신 이건창(李建昌·1852~1898년)은 조선 당쟁사를 담은 <당의통략(黨議通略)>을 집필했다. <당의통략>은 조선 당쟁에 대한 서술을 이준경(李浚慶·1499~1572년)의 경고로 시작한다. 조선에서는 대신이 죽음에 임하면 임금에게 유서 형식의 차자(箚子·조선 시대에 일정한 격식을 갖추지 않고 사실만을 간략히 적어 올리던 상소문)를 올리는 전통이 있었는데, 선조 5년(1572년) 이준경은 죽음을 앞두고 “지금 사람들이 고상한 이야기, 훌륭한 말들로 붕당(朋黨)을 결성하는데 이것이 결국에는 이 나라에서 뿌리 뽑기 어려운 커다란 화근이 될 것입니다”라는 유차(遺箚·유서 형식의 차자) 글을 올렸다는 것이다.

심의겸과 김효원의 인사 갈등으로 사림 분당

<당의통략>에 따르면, 율곡 이이는 자신이 이준경에 의해 붕당을 만들 인물로 지목된 것으로 알려지자 이에 반발하는 상소를 올렸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이는 “조정이 맑고 밝은데 어찌 붕당이 있겠습니까? 사람이 장차 죽을 때는 그 말이 착하다고 했는데 이준경은 그 말이 사납습니다”라고 반박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이이를 지지하는 삼사(三司:사헌부·사간원·홍문관)에서 일제히 상소를 올려 이준경의 관작 삭탈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때 서애 류성룡이 “대신이 죽음에 임해서 임금에게 올린 말이 부당한 것이 있으면 물리치는 것은 옳지만, 죄를 주기까지 한다면 너무 심한 것 아닌가”라고 반대해 삭탈관작까지 이르지는 못했다고 <당의통략>은 전한다. 당시 이이가 반박 상소를 올린 것은 자신은 붕당을 결성할 생각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후 실제로 붕당이 생기자 이이는 이준경의 예언이 맞았다고 인정하고 당론 조제(調劑·조정)를 자신의 임무로 여겼다.

 

선조가 서인과 동인으로 갈라진 대신들에게 당파 싸움을 벌이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는 KBS 사극 의 한 장면. ⓒ KBS 제공

당시 이준경을 공격한 세력이 ‘사림(士林)’인데, 사림 세력에서 이준경을 공격했다는 자체가 이미 사림은 정상 궤도에서 이탈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준경은 중종 때 관직에 진출해 각종 요직을 역임하고 명종 13년(1558년) 우의정에 올랐다가 좌의정과 영의정까지 거친 원로였다. 또한 선조 1년(1568년)에는 사림의 정신적 지주였던 조광조(趙光祖)를 영의정으로 추증하는 데도 앞장섰던 인물이다. 그럼에도 죽음을 앞두고 붕당의 화를 우려하는 유차 한 장을 올렸다가 사림들이 포진한 삼사에 의해 삭탈관작의 위기에 몰렸던 것이다.

성종 무렵부터 조정에 포진한 사림은 기존 집권 세력인 ‘훈구(勳舊)’들의 전횡을 공격하다가 사대사화(四大士禍)로 불리는 정치 보복을 당했다. 그중 마지막 정치 보복은 명종 즉위년(1545년)의 ‘을사사화’ 및 명종 2년(1547년) ‘양재역 벽서 사건’이었는데, 명종의 모후이자 중종의 계비였던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尹元衡)이 주도한 것이었다. 윤원형은 명종 18년(1563년) 영의정에 올랐다가 명종 20년(1565년) 문정왕후가 죽은 후 실각했다. 이때 훈구의 공세로부터 사림을 보호하고 등용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 명종비 인순왕후의 동생이었던 심의겸(沈義謙)이었다. 심의겸은 인순왕후의 부친이자 자신의 외삼촌인 이량(李樑)이 사림을 제거하려 하자 그를 탄핵해 평안북도 강계로 유배 보냈다. 이로써 심의겸은 사림의 보호자라는 명성을 얻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사림은 선조 집권 전반기 실권을 장악했다. 선조 1년(1568년) 사림의 영수였던 퇴계 이황은 송나라 정이(程?·정자)의 ‘사물잠(四勿箴)’과 주희(朱熹·주자)의 글·그림 등에 자신의 글과 그림을 덧붙여 설명한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선조에게 올렸다. 선조는 이를 병풍으로 만들면서 “좌우에 두고 아침저녁으로 바라보며 성찰하겠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성학(聖學)은 사림의 이념인 성리학을 뜻하는 것이었다. 조광조 때까지만 해도 화태(禍胎·재앙의 근원)라고 여겨졌던 성리학은 이제 임금이 병풍으로 만들어 아침저녁으로 외울 정도로 조선의 이념이 되었다. 사대사화를 겪었음에도 사림은 조정의 여당이 되었던 것이다.

“이조가 어찌 외척집 물건이냐”

그러나 사림의 집권은 곧 분당으로 이어졌다. 그 계기가 심의겸과 김효원(金孝元·1542~1590년)의 갈등이었다. 조선은 대신들의 전횡을 방지하기 위해서 ‘이조전랑(吏曹銓郞) 자천제(自薦制)’라는 독특한 제도를 두었다. 조선의 대간(臺諫), 즉 삼사(三司) 관원들은 백관에 대한 탄핵권이 있었다. 대간의 탄핵을 받으면 탄핵 내용이 사실이든 아니든 무조건 사임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만큼 대신의 처신은 어떤 시비에도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대간은 또한 대신은 물론 임금에게도 모든 정사 현안에 대해 옳고 그름을 시비할 수 있는 간쟁권(諫爭權)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직급은 그리 높지 않지만 맑고도 중요하다는 뜻에서 ‘청요직(淸要職)’이라 불렸다. 그렇기에 대신들이 대간에 대한 인사권에 간여하는 것을 막기 위해 대간에 대한 인사권은 이조판서가 아니라 이조의 정5품인 이조정랑과 정6품인 이조좌랑을 뜻하는 ‘이조전랑’에게 주었다. 그리고 이조전랑에 대한 대신들의 인사권을 막기 위해 이조전랑이 다른 자리로 갈 때면 후임자를 추천하고 가는 자천제를 실시했다. 대간과 이조전랑에 대한 인사 독립을 통해 대신들의 전횡을 막고자 했던 것이다. 이조전랑이 후임자를 천거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론(士論), 즉 선비들의 의논이었다. 

선조 7년(1574년) 이조전랑 오건(吳健)이 자리를 옮기면서 김효원을 후임자로 추천했다. 김효원은 윤원형의 사위 이조민과 친밀했기 때문에 윤원형의 집에 자주 들락거렸다. 심의겸이 과거에 이를 목격했기 때문에 김효원의 이조전랑 적격 여부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 문제를 두고 조정 내 의견이 둘로 갈렸는데 김효원을 지지하는 젊은 사림들이 ‘동인(東人)’이 되고, 심의겸을 지지하는 노장들이 ‘서인(西人)’이 되었다. 김효원의 집이 서울 동부 건천동(乾川洞)에, 심의겸의 집이 서울 서쪽 정릉방(貞陵坊)에 있었기에 붙은 당명이다. 김효원은 결국 이조전랑이 되었는데 그의 후임으로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沈忠謙)이 물망에 오르자 김효원이 “이조가 어찌 외척집 물건이냐”라고 반대하면서 사림의 분열이 가속화되었다. 두 세력이 크게 싸운 선조 8년(1575년)이 을해년이기 때문에 이를 ‘을해당론(乙亥黨論)’이라고 한다.

이로써 이준경이 죽음을 앞두고 올린 유차(遺箚)의 예언이 현실화된 것이다. 율곡 이이는 두 당의 당쟁을 완화시키자는 조제론(調劑論)을 제기했다. 이이는 동인과 서인을 화합시키기 위해서는 갈등의 핵심 인물인 김효원과 심의겸을 모두 지방으로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선조는 재위 8년(1575년) 이이의 부탁을 받은 우의정 노수신(盧守愼)의 권유에 따라 김효원을 함경도 부령 부사(府使)로, 심의겸을 경기도 개성의 유수(留守)로 삼았다. 그런데 당초 선조가 김효원에게 제수한 벼슬은 여진족과 맞닿아 있는 함경도 경흥 부사였다. 그런데 <선조수정실록> 8년 10월1일자는 이조판서 정대년(鄭大年)과 병조판서 김귀영(金貴榮) 등이 “경흥은 극지 변방으로 오랑캐 지역에 가까우므로 서생(書生)이 진수(鎭守:군대를 주둔시켜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을 지킴)하기에 마땅하지 않습니다”라고 반대했다고 전한다.

인사를 담당하는 두 판서가 건의하자 선조는 김효원을 조금 내지인 부령 지역 부사로 보내고, 당쟁의 다른 당사자인 심의겸도 개성 유수로 내보낸 것이다. 이때 두 판서가 ‘경흥이 오지이므로 서생이 진수하기 마땅치 않다’고 계청한 것은 당시 조선 지배층의 현실 인식 수준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조선은 문신이 무신을 지휘하는 도체찰사 제도가 법제화되어 있던 나라였다. 무장 위에 문신 도체찰사가 있어서 총지휘권을 행사했던 나라에서 변방 지역은 서생이 근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사림의 자기부정이었다. 사림은 사대사화를 겪고 정권을 장악했지만 정권을 장악하자마자 경흥을 오지 운운하면서 서생이 갈 곳이 아니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미 초심을 잃어버렸다는 증거다.

 

6월3일 경기도 양평군 가나안농군학교에서 열린 새정치연합 국회의원 워크숍에서 원탁토론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정권 잡은 사림, 현실 만족에 빠져

오늘날 야당에 대해 국민이 바라보는 시각도 조선시대 사림과 비슷하다. 사림은 조선의 야당 시절 조광조 등이 종2품 사헌부 대사헌의 직위로 훈구대신들을 거침없이 공격했다. 조광조는 끝내 훈구대신들과 중종의 합작으로 형장의 이슬이 되었지만, 그를 상전으로 여기던 일반 백성은 물론 많은 사대부도 조광조를 지지했다. 그가 걸었던 개혁의 길이 조선이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조광조의 억울한 죽음은 그를 죽인 훈구에 대한 분노와 반발로 이어졌으며, 이는 사림 집권에 대한 당위성으로 연결되었다. 그래서 조광조가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난 지 50여 년 후인 선조 집권 초년에 사림은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림은 집권 후 자신들이 야당 시절 주창했던 개혁의 길을 걷기보다 자신들이 맞서 싸웠던 훈구의 길을 따랐다.

사림은 조선의 발전을 가로막는 신분제를 비롯한 각종 제도적 카르텔 해체에 나서야 했지만 정권을 잡은 사림은 자신들이 여당이 된 현실에 만족했다. 지금 야당도 과거 집권 시절에 대한 향수만 갖고 있을 뿐 우리 사회의 온갖 부정에 대해 적당히 타협하는 자세로 반사이익만 누리고 있는 집단처럼 보인다. 그래서 국민은 좀 더 새로운 세력의 등장을 기다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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