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 6명 회사에 국가와 은행이 1500억 털렸다
  • 엄민우 기자 (mw@sisapress.com)
  • 승인 2015.07.01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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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론티어 사기 대출’ 사건으로 본 수출 기업 사기 수법

지난해, 연매출 1조원의 초우량 기업으로 알려졌던 모뉴엘이 실상은 6700억원의 사기 대출을 받은 부실기업으로 드러나면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와 비슷한 수법으로 불법 대출을 받은 또 다른 사건이 터졌다. 이른바 ‘후론티어 불법 사기 대출’ 사건이다. 이 사건이 관세청에 적발되면서 기업들의 불법 대출 사태가 일파만파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세관 관계자는 “현재 이와 비슷한 수법으로 사기 대출을 받은 기업 수십 곳에 대해 추가 조사 중이며, 꽤 규모가 큰 중견기업들도 포함돼 있다”고 말했다.

페이퍼컴퍼니 이용해 ‘수출신용보증’ 받아

재미있는 것은 모뉴엘을 비롯해 현재 조사 중인 거액 사기 대출 기업 모두가 그 수법에서 거의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금융권 및 사정 당국이 수출 기업들 사이에서 이와 같은 범죄 수법이 유행처럼 번졌을 것으로 보는 이유다. 은행 대출 문턱은 일반 서민뿐 아니라 중소기업들에도 매우 높다. 그런데 이번에 1500억원의 사기 대출을 받은 후론티어는 직원 수 6명의 ‘초소형’ 가족기업이다. 이런 업체가 어떻게 까다로운 은행 대출을 손쉽게, 그것도 수천억 원대에 이를 정도로 받을 수 있었을까. 여기엔 한국무역보험공사의 ‘수출신용보증’이라는 키워드가 있다. 후론티어의 수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막을 알 수 있다.

ⓒ 일러스트 정찬동

경기도 안양시에 위치한 후론티어는 2003년 6월 설립된 회사로 TV 케이스 금형(금속이나 플라스틱을 특정 모양으로 만들어내기 위한 틀)을 제조해 판매한다. 직원 6명을 둔 이곳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규모 제조업체다. 2006년 전까지만 해도 이들은 다른 제조회사와 다름없이 정상적인 활동을 해왔다. 그런데 2007년에 들어서면서부터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수출 실적을 가짜로 만든 것이다.

2007년 들어 이 회사는 무역보험공사로부터 ‘수출신용보증’을 받았다. 수출신용보증이란 쉽게 말해, 기업이 수출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돈을 은행에서 빌릴 수 있도록 무역보험공사가 보증서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수출 기업은 이 보증서를 담보로 삼아 은행에 수출채권을 매각해 돈을 빌릴 수 있다.

수출신용보증을 내주기 전 무역보험공사는 수출하는 회사뿐 아니라 이를 사들이는 바이어, 즉 ‘수입사’의 신용도도 동시에 체크하도록 돼 있다. 당시 후론티어는 이 과정에서 무역보험공사를 가볍게 속였다. 일단 정상적으로 TV 금형 거래를 하고 있던 일본의 M사와 거의 유사한 같은 이름의 페이퍼컴퍼니 A사를 만들었다. A사에 1563억원 상당의 TV 플라스틱 캐비닛을 수출하는 것처럼 가짜 계약을 맺었다. 당시 TV 캐비닛의 제조 원가는 개당 2만원이었으나 후론티어는 개당 2억원으로 뻥튀기해 터무니없는 거래대금을 매겼다.

무역보험공사는 후론티어가 제출한 A사와의 거래 실적을 보고 A사가 아닌 후론티어의 실제 일본 거래처인 M사의 신용도를 평가했다. A사를 M사로 착각한 것이다. M사는 실제로 후론티어 제품을 거래하던 건실한 업체여서 이 평가를 무난히 통과했다. 매년 수출신용보증 갱신 때마다 이 같은 일이 반복됐다. 이 과정에서 후론티어는 실제로 만들어진 물품을 처리해야 했는데, 이 물품들은 후론티어 대표이사 조 아무개씨의 부인이 거주하고 있는 미국의 거처로 보내 쌓아뒀다가 버렸다. 실제 수출은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수출만능주의’가 낳은 참극”

조씨는 무역보험공사의 이 보증서를 들고 은행 창구로 달려갔다. 그는 수출채권과 이 보증서를 담보로 삼아 IBK기업은행·SC은행·국민은행·신한은행 등으로부터 마구잡이로 돈을 빌렸다. 이렇게 빌린 돈이 1522억원이었다. 쉽게 얻은 돈은 흥청망청 쓰였다. 갑자기 늘어난 돈으로 조씨는 호화로운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우선 28억원을 미국으로 송금해 미국 주택 구매 등에 썼다. 자신은 월세 1800만원짜리 빌라에 거주하며 페라리·람보르기니 등 고급차 10여 대를 리스해 번갈아가며 몰고 다녔다. 140억원을 현금으로 인출해 썼고, 65억원은 법인카드로 사용했다. 그가 흥청망청 쓴 돈은 사실상 수출로 벌어들인 돈이었어야 했으나 서류와 현실은 이렇게 달랐다. 돌려막기 식으로 대출받은 돈으로 갚고 또 대출받는 일을 조씨는 반복했다.

모뉴엘을 비롯해 현재 세관 당국에서 추가 조사 중인 수십 군데의 기업들 역시 후론티어의 사기 대출 사례와 크게 다르지 않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수법이 공공연하게 시도될 수 있었을까. 결국 수출 기업이라고 하면 무분별하게 ‘묻지 마 보증’을 서준 무역보험공사의 책임론이 대두되는 상황이다. 이번 사건은 관세청 및 서울세관이 무역보험공사의 보증 리스트를 바탕으로 꼼꼼히 분석하면서 밝혀졌다. 세관 당국이 나서기 전에 미리부터 무역보험공사가 꼼꼼히 후론티어의 수출 거래 내역을 따졌다면 사기 은행 대출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은행으로선 서류 거래다 보니 무역보험공사의 보증만 확인할 뿐 해당 수출 거래가 실제로 일어났는지 등에 대해선 확인할 수 없는 구조다. 이번 사태로 피해를 입은 한 은행 관계자는 “서류로 하는 신용 거래는 사실상 수출자의 신용을 믿고 서류에 문제가 없으면 진행하는 것인데, 이를 악용하는 이가 많아 내부적으로 대책을 수립 중이다. 국가에서 ‘수출 기업은 곧 애국자’라는 식으로 무분별하게 수출 장려를 하면 일선 은행들은 힘들어진다”고 토로했다.

이번 사태는 ‘수출만능주의’가 낳은 참극이다. 수출 기업이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지원해 실적을 올리고자 하는 관계 당국의 안일한 대처가 화를 불렀다. 무역업계에 따르면, 수출과 관련해 정부는 일단 실적을 올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식이 팽배하다고 한다. 수출 육성에 몸이 달아 있는 정부를 후론티어와 같은 기업들이 악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 무역보험공사의 보증은 은행으로부터 손쉽게 대출을 받게 해주는 ‘자유이용권’과도 같이 여겨졌다. 정부는 사기 대출을 한 후론티어에 오히려 무역의 날 장관 표창과 수출의 탑 훈장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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