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민 ‘정치적 주머니’ 두둑해졌다
  • 양정대│한국일보 정치부 기자 ()
  • 승인 2015.07.15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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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과 맞붙으며 단숨에 여권 잠룡 1위 부상…내년 총선 ‘생존’이 관건

“이왕 정치권에 들어왔으면 재선을 하는 게 중요하다. 총선에서 살아남는 데 총력을 기울이시라.” 유승민 새누리당 의원이 지난 7월8일 원내대표직에서 물러난 후 자신과 동고동락했던 원내부대표단과 경기 김포의 한 식당에서 저녁을 함께하며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이 얘기를 전한 한 참석자는 “‘그간 고생시켜서 미안하고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초선인 우리들에게 덕담을 건넨 것”이라며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하지만 정치권에선 유 의원이 이들 원내부대표들에게 ‘정치적 동지’가 되어달라고 당부한 것이란 해석이 나왔다. 함께 훗날을 도모하자는 뜻이 담겨 있는 의미심장한 얘기라는 것이다. 실제로 한 원내부대표는 “뭔가 비장함이 느껴졌다”고 했다.

7월8일 국회 정론관에서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원내대표 사퇴를 밝히고 있다. ⓒ 시사저널 이종현

‘전국구 스타’로 김무성과 잠룡 투톱 체제

유승민 의원은 이번 사퇴 파동을 통해 많은 것을 잃었지만 동시에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얻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결국은 힘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친박 주류 그룹에 의해 ‘축출’됐지만, 이 과정을 통해 어느 정도 잠재력 있는 정치인에서 단번에 ‘현실 권력’에 맞선 소신 있는 ‘전국구 스타’가 됐다. 사실 현실적으로만 보면 유 의원은 정치 입문 이후 최대의 위기에 직면했다고 볼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공개석상에서 사실상 사퇴를 요구한 후 친박계가 조직적으로 사퇴 쪽으로 몰아갔음에도 “의원들의 뜻에 따르겠다”며 버텼는데, 실제로 당내 의원들로부터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한 채 쫓겨난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특히 박 대통령이 ‘배신’이라는 낙인을 찍은 상황이라 내년 총선에서 공천을 받을 수 있을지, 설령 공천을 받더라도 당선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의 지역구(대구 동구 을) 정서는 박 대통령에게 광적인 지지를 보내는 곳이기 때문이다. 국회의원 입장에서 배지는 ‘정치생명’이나 마찬가지다. 내년 총선에서 국회 입성에 실패할 경우 ‘정치인 유승민’의 미래는 극히 불투명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유 의원은 사퇴 파동을 겪으면서 이 같은 위기를 뛰어넘고도 남을 정도로 많은 것을 얻었다는 게 정치권 안팎의 중론이다. 무엇보다 여권 내 위상부터 확연히 달라졌다. ‘유승민 사퇴 정국’에서 그동안 주장해온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한반도 배치, 중(中)부담·중(中)복지, 법인세 인상 등이 다시 주목받으면서 안보·국방 분야에선 확고한 보수주의자로, 사회·경제 분야에선 따뜻한 개혁주의자 이미지를 확실히 했다. 청와대와 친박계로부터 핍박받는 듯한 상황이 역설적으로 자신의 정치철학을 적극적으로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이다.

이 같은 분위기는 유 의원 사퇴 직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리얼미터가 실시한 ‘여권 차기 주자 지지도’ 긴급 설문조사(성인 500명 대상, 95% 신뢰 수준에 ±4.4%포인트)에서 유 의원은 19.2%의 지지를 얻어 그동안 계속 1위를 질주하던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18.8%)를 처음으로 제치며 단숨에 1위에 올라섰다.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박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직전(6월23~24일)에 실시된 같은 여론조사 결과(4위, 5.4%)에 비해 지지율이 13.8%포인트나 급등한 것이다. 유 의원이 차기 당권은 물론 대권까지도 노려볼 수 있는 유력 주자가 됐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유 의원이 특히 박 대통령에게 맞서 소신을 지키는 이미지를 각인시켰다는 점은 향후 상당한 정치적 자산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정치적 경쟁자인 야당 유력 정치인들도 한목소리로 인정하는 바다. 협상 파트너였던 이종걸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는 유 의원의 원내대표직 사퇴 기자회견 직후 “태풍이 불 때 나무가 부러질 수도 있지만 좋은 나무는 재목으로 남는다”며 격려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박 대통령은 국정 최고 책임자의 말 한마디가 여권을 통째로 뒤흔들 수 있다는 능력을 각인시켰지만, 그런 막강한 권력에 ‘저항했던’ 유 의원이 얻은 반사이익이 오히려 컸던 셈이다.

 

충성도 높은 지지층 확보가 선결 과제

유승민 의원의 높아진 정치적 위상은 그러나 내년 총선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사장될 가능성도 작지 않다. 여전히 ‘정치인 유승민’의 대중적 인지도는 아직 낮은 상태이고, 여권 내 지지 기반도 그다지 넓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벌써부터 친박계에서는 “내년 총선 공천은 어림없다”는 얘기가 나오는가 하면, 일각에선 “정치적 재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박 대통령의 성정으로 볼 때 원내대표직 사퇴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란 얘기다.

특히 유 원내대표가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난제는 여권 내부에 제대로 둥지를 트는 일이다. 당초 지난 6월25일 박 대통령이 국무회의 석상에서 유 의원을 배신자로 규정했을 때는 의원총회에서 상당수 의원들이 유 의원을 사실상 재신임했다. 하지만 13일 후 의원총회에선 정반대 상황이 벌어졌다. 이는 지지층의 피로감으로 인해 유 의원을 지지해온 동료 의원들의 입지가 좁아졌기 때문이다. 한 수도권 재선 의원은 “유 의원이 사퇴를 거부하면서 박 대통령의 강고한 지지층이 본격적으로 지역구 의원들을 압박한 결과”라고 해석했다. 유 의원에겐 충성도 높은 지지층 확보가 선결 과제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향후 유 의원이 정두언·진영 의원 등 정치적 무게감과 개혁적 이미지를 가진 중진 의원들과 교류의 폭을 넓힐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건 이 때문이다. 한 측근 의원은 “원내대표일 때는 당·청 관계를 먼저 고려해야 해서 제약이 있었지만, 평의원 입장에선 오히려 훨씬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 의원이 원내부대표들에게 재선을 위해 노력하라고 당부한 것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읽힐 수 있다. 일각에선 유 의원의 정치 일선 복귀가 예상보다 빨라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내놓는다. 당분간은 ‘잠행’을 이어가겠지만, 내년 총선을 앞두고 수도권을 중심으로 당내에서 호출 움직임이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수도권 초선 의원은 “총선을 앞두고 여권 내부의 지형이 몇 차례 요동칠 수밖에 없을 텐데, 내리막길을 걷는 ‘박근혜 리더십’으로는 총선 승리가 어렵다는 의견이 확산되면 ‘유승민 간판론’이 나올 가능성도 예상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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