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 트라우마’엔 누구도 예외 없다
  • 김현일 대기자 ()
  • 승인 2015.07.15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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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 ‘도전 불용’ 재확인…사정 한파설 등 시계 제로

 

지난 한 달여 동안 국민들은 헌정 사상 유례가 드문 권력놀음을 관전했다. 이른바 ‘거부권 정국’이 그것이다. 권력의 속성상 힘겨루기야 언제 어느 정권에서도 있어왔고, 따라서 이번 사태를 그런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새삼스러울 게 없다. 그러나 이어질 여권 재편과 향후 우리 헌정사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울 것이라는 점에서 이번 사태가 함축하는 바는 크다.

중·장기적으로 ‘대통령’과 ‘의회권력’의 충돌이라는 권력 관계에 대한 원초적 의문을 본격화했다는 측면뿐 아니라 당장 정치권에 일대 회오리를 몰고 올 것임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우선 여권 내의 주도권 및 차기 대권 구도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것이 분명하며, 이는 야권의 세력 다툼에도 직간접적 영향을 미칠 게 틀림없다. 따라서 새누리당 유승민 의원이 원내대표직에서 물러남으로써 일단락된 듯싶지만, 실은 이는 서막에 불과하다. 이제부터가 2017년 12월을 향한 ‘19대 대선’ 드라마의 본격 시발이다.

‘유승민 파동’이 고조되던 7월3일, 광주 유니버시아드 개막식을 참관한 박근혜 대통령. 박 대통령은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는 악수도 안 했고 정의화 국회의장의 ‘회동 요청’엔 묵묵부답해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표시했다. ⓒ 연합뉴스

박정희 정권 시절 ‘항명’ 기억의 학습 효과

역대 정권을 보면, 지금까지 청와대와 여당의 충돌은 거의가 정권 말기에 이뤄졌다. 여당이나 ‘2인자’의 입장에선 ‘차기’를 위해 물불 가리지 않을 때였다. 대통령 주변의 비리까지 겹쳐 이래저래 청와대의 권위가 무너질 시점이기도 했다. 김영삼 대통령과 이회창 신한국당 총재 간 갈등, 김대중(DJ) 대통령에 대한 정동영 새천년민주당 의원을 비롯한 ‘바른정치실천모임’의 도전 등은 한결같다. 여당과 항상 긴장 및 갈등 관계에 놓여 있었던 노무현 대통령 시절은 열린우리당 창당이나 탈당, 야당인 한나라당을 향한 대연정 제의에서 비롯된 여당 내 반발 등으로  취임 초부터 퇴임까지, 당·청 간 균형 와해에선 예외가 아니었다. 아무튼 시기적 요인이 크게 작용해 청와대에 맞선 이회창·정동영 등은 비록 대권을 거머쥐지는 못했을망정 유력 ‘대권 후보’의 반열에 올라 정국의 중심인물로 자리 잡았다.

지금은 기억마저 아스라한 박정희 대통령(PP) 시절의 대표적인 4·8 항명 파동과 10·2 항명 파동도 ‘임기 말’에 대한 개념 없이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1969년의 4·8 항명은 차기 대통령으로 유력시되던 공화당 ‘김종필(JP)계’의 양순직·예춘호·정태성 의원 등이 대통령의 지시를 거부하고 문교부장관 해임건의안을 밀어붙인 사건이다. 이들이 서슬 퍼런 PP의 엄명을 따르지 않은 것은 PP의 남은 임기가 길지 않다는 계산하에 감행됐다. 하지만 이는 큰 오산이었다. 이미 ‘3선 허용’ 개헌을 준비하던 청와대는 4·8 항명을 계기로 JP 옹립 세력을 일거에 ‘소탕’한다. 이 과정에서 득세한 그룹이 공화당의 ‘신4인방’이며 바로 이들이 1971년의 10·2 항명을 주도한다.

김성곤 재정위원장, 백남억 당의장, 김진만 원내총무, 길재호 사무총장 등 4인방은 PP가 저지 명령을 내린 오치성 내무부장관 해임건의안 통과를 주도했고, 이에 발끈한 PP는 주동자들을 남산(중앙정보부)으로 끌고 가 치도곤을 냈다. 김 위원장의 카이저 콧수염 절반이 뽑혔다는 등 당시 나돈 험악한 장면은 한갓 우화가 아니다. 신4인방의 도전 역시 PP의 세 번째 임기가 많이 남지 않았다는 ‘임기 말’ 인식에서 비롯했는데 이는 사실상 종신대통령제를 향한 유신 개헌을 간파하지 못한 데 따른 큰 착각이었다. 여당 의원은 물론 거의 모든 야당 의원들에게 뒷돈을 대주면서 내각제 총리를 꿈꾸던 김 위원장의 오판이 일으킨 결과는 참담했다.

이게 바로 박근혜 대통령의 ‘배신 트라우마’를 더 완강하게 만든 요인이다. 흔히들 아버지 PP가 핵심 측근이었던 김재규 정보부장의 총탄에 스러졌고, 이후 PP 측근들이 자신에게 보인 냉담과 박대를 배신 트라우마의 원류로 보지만, 실은 그 전부터다. 어린 시절부터 청와대에서 자란 박 대통령은 ‘임기 말’에 표변하는 권력 아류들의 속성을 봐왔던 것이다.

정치권에 사정 찬바람 거세질 듯

게다가 막상 본인이 청와대 주인이 된 전후 사정도 그래서 가능했음을 절감하기에 ‘유승민 처단’이 초래할 불통·독선 비난 등 모든 손실을 감내했으리라 짐작된다. 이명박(MB) 대통령 시절 ‘박근혜 의원’은 세종시 논란을 계기로 청와대와의 정면 대결로 선회해 ‘차기’ 발판을 굳혔다. 당시 박 의원이 ‘세종시 원안대로’를 외치며 청와대를 치받은 때는 MB 정부가 출범한 지 불과 1년 8개월째였다. 그러니 임기 첫해의 대선 공정성과 인사 시비, 2년 차의 세월호 참사에 이어, 3년 차 ‘성완종 리스트’ ‘메르스 파동’으로 집권 황금기를 허송할 위기에 처한 박 대통령으로선 더더욱 용납할 수 없는 게 유승민의 도전이었다. ‘배신’이라면 치를 떠는 대통령으로선 지금보다 더한 이미지 훼손과 그로 인한 지지율 하락 등이 따르더라도 확실하게 정리해야 할 분명한 목표 대상이었던 셈이다.

이병기 청와대 비서실장은 이번 유승민 파동의 단초가 된 여야의 국회법 협상 때부터 당과 무수하게 접촉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물론 유승민 원내대표, 야당 중진들과도 물밑 대화를 나눈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여권의 무능·무책임 등 민낯만 드러낸 결과로 끝났다. 때문에 이 실장에겐 ‘문고리 3인방’에 휘둘린다는 비아냥까지 퍼부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이 실장은 온갖 조롱을 감수하겠다는 듯 일절 함구로 일관한다. ‘이유 있는’ 대통령의 배신 트라우마는 이해해줘야 한다는 당부다. 그는 지난 2012년 대선 당시 ‘과거사 인정 및 정면 돌파’를 진언했을 때 진노했던 ‘박근혜 후보’의 속내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6월25일 국무회의에서 단호한 어조로 거부권 행사를 발표한 이래 13일 동안 박 대통령의 행보는 섬뜩할 정도였다. ‘거부권 본회의 재의’를 공언한 정의화 국회의장이나, ‘중재에 나선’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에 대한 ‘외면’에선 어떤 도전도 간과하지 않겠다는 서슬이 묻어났다. ‘배신 트라우마’와 ‘도전 불용’은 앞으로의 당·청 관계 설정과 여당 개편, 나아가 여의도 정치권 전반에 대한 ‘조치’를 가늠하는 잣대로 보인다. 이 대목에 관한 한 ‘부러지면 부러졌지 굽히지는 않는다’는 박 대통령의 의지가 다시 한 번 확실해졌다. 대통령의 탈당설이 또다시 등장할지, 거꾸로 비박이 분당을 결행할지 등은 지금으로선 미지수다. 그 와중에 확실한 것은 복중(伏中)이라도 정치권에는 사정의 찬바람이 거세리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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