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축해둔 X파일로 재벌 집안싸움 교통정리
  • 김현일 대기자 (.)
  • 승인 2015.08.12 18:47
  • 호수 93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롯데 사태로 본 역대 청와대의 대기업 비리 및 다툼 개입 사례

“제멋대로” “까불고” “죽여”. 과거 권위적인 정부 시절 여권 수뇌부 간담회에서 나온 대화의 한 토막이다. 이 정도 분위기면 재벌급 기업들도 단숨에 날아갔다. 국제그룹 등 1980년대 초 사라진 몇몇 대기업들은 대략 이런 수순을 밟아 공중분해됐다. 정부 통제하의 은행 돈에 의존했던 기업들은 한순간에 해체됐다. 정부 입김이 강력하게 미치던 법원인지라 하소연해봤자 소용이 없었다. 반발했다간 그나마 ‘꼬불친’ 재산마저 털릴 지경이었다. 야당에 정치자금을 몰래 대주는 ‘괘씸죄’가 아니라도 이미 ‘재산 은닉’ ‘여자 문제’ 등 대기업 오너의 이런저런 불·탈법 행각이 약점으로 잡혀 있었던 것도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는 이유였다.

현대그룹 창업주인 정주영 명예회장이 1998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며 공동회장에 ‘임명’한 5남 정몽헌- 차남 정몽구 간의 갈등은 2000년 폭발했다. 이른바 ‘왕자의 난’이다. 그해 3월과 5월, 그룹 패권을 놓고 벌인 골육상쟁은 오늘의 롯데 사태를 연상시킨다. ⓒ 시사저널 임준선

“B 그룹 오너 K 회장은 자신이 주인인 B 그룹사를 상대로 사채놀이를 하다가 발각됐다. 개인 돈 85억원을 회사에 빌려주고 고리를 받아먹은 것이다. 관련 보고를 받은 대통령에게서 ‘나쁜 X’라는 욕이 나왔다. 다급해진 B 회장은 감사원장에게 구명을 호소했다. 대통령의 육사 선배이기도 한 원장은 대통령의 진노를 삭일 수 있는 묘책을 귀띔했다. 빨리 사회봉사라도 하는 모습을 보이라고. 육사 교정 내 교회는 그렇게 해서 세워졌다.” 여권 실력자들의 ‘뒤’를 챙겨주며 한때 잘나가던 B 그룹은 그러나 결국엔 사라졌다. 금융권이 눈치를 살피고 내부 동요가 이어지는 기업이 연명하기 어려웠다는 안기부 출신 간부의 회고다.

‘한국 경제’를 얘기할 때 따라붙는 수식어가 있다. ‘눈부신’ ‘초고속’ ‘기적’ 등이 그것이다. 이를 가능케 한 원동력으로서 국민의 우수한 두뇌와 근면성,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PP)’이 빠지지 않는다. 경제라는 현상이 일시적인 게 아님에도 PP가 언제고 중심에 등장하는 것은 실제 그의 집권기에 경제가 급성장을 했다는 사실의 결과일 터다. 한국 경제의 초석을 놓은 주역이라는 PP에 대한 평가는 그에게 적대적인 인사들도 인정하는 대목이기는 하다. 여하튼 대통령이 경제 주역이 됨은 ‘정부 주도’라는 말과 통한다.

한때는 정부가 고관 ‘사생활’ 문제까지 챙겨

사실 한국 경제의 정부 주도는 건국 이래 한결같았다. 미국의 원조 물자를 팔아 공장을 짓고, 공장만 세우면 소비야 무궁무진하던 시절이기에 정부는 절대적 지존일 수밖에 없었다. ‘3백(3白-밀가루·광목·설탕) 경기’ 혹은 ‘3분(3粉-밀가루·설탕·시멘트) 경기’가 경제 상황을 진단하는 잣대였다. 정권 실세의 마음먹기에 따라 재벌을 만드는 게 얼마든지 가능했다. ‘관(官) 주도’, 나아가 ‘정경유착’이 자연스레 토착화한 것이다.

다만 1950년대 경제 규모가 원체 미미했기 때문에 ‘정부 주도’라는 단어는 제대로 개발 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본격화한 박정희 정권 당시가 원조로 이해된다. 경제개발을 위해서는 단 1달러도 귀했으므로 수출은 최고의 애국이었다. 하물며 외화 도입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지금 온 나라를 시끄럽게 만든 롯데의 1960년대 중반 한국 진출도 이런 즈음이다.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부지 매입과 건설 과정은 통상의 시각에서 보면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지금의 잠실 롯데월드타워 건설 과정도 그렇거니와, 강북 억제 시책 등 온갖 규제에 묶인 서울의 노른자위 땅에 선 롯데호텔은 물론이고 ‘쇼핑센터’라는 이름의 롯데백화점은 ‘특혜’의 총화다. 주택이나 공장 건설은 고사하고 주민등록증 한 장 떼는 데도 급행료가 붙던 시절의 일이니 알 만하다. 서울시 건축 관계자들도 모르는 사이에 9층짜리 부속 건물이 금지된 25층 백화점으로 둔갑했고, 그럼에도 누구 하나 찍소리조차 못 냈다. 외자 도입이 최대의 이권이던 그 시절, 보통 허가 액수의 30%는 ‘정권 몫’이었다. 도입 여부를 심사한 집권 여당 공화당의 김성곤 재정위원장 등 4인방은 10%를 청와대에, 10%를 당에, 나머지 10%는 도와준 실세와 (입막음을 위해) 야당 관계자들에게 분배하는 게 기본이었는데, 롯데의 경우는 이 ‘공정가’ 원칙을 적용받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 ‘국책사업’ 수준으로 밀어붙인 만큼 입질할 여지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개입 대신 ‘흐름 유도’

‘정부 주도’라지만 역대 정부가 재벌 승계 내지 상속 다툼에 직접 간여한 구체적 증거는 별로 드러난 게 없다. 청와대나 시혜를 입은 기업이나 양측이 윈윈한 마당에 이를 까발릴 하등의 이유가 없어서다. PP 정권 이래 청와대는 고관들의 사생활까지 ‘민심 동요’ 방지 등의 명분으로 개입했다. 예컨대 모 차관의 부인이 헬스클럽 코치와 눈이 맞았다든가, 혹은 모 장관의 부인이 연예인과 특수관계라는 정보가 입수되면 관계 기관이 나서 상대를 ‘적당히 처리하는’ 식이다. 그랬으니 대기업과 관련해서는 어떠했을까가 능히 짐작된다. 청와대 입김이 직간접으로 작용한 흔적은 숱하게 눈에 띈다.

삼성·현대 등 재벌가의 집안싸움 당시 청와대에서는 민정·경제·정무 수석과 안기부(지금의 국정원) 차장 등이 참석하는 ‘대책회의’가 수시로 열렸다. 1990년대 초, 삼성 이병철 회장의 자녀들 중 일각에서 이건희 회장의 약물 의혹을 청와대에 진정해 비상이 걸린 바 있다. 청와대는 이 약물 시비가 교통사고 후유증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이뤄진 통상의 처치라고 결론지었다. 이 회장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이 진정 사건 이후 삼성그룹은 고려병원·신세계·한솔 그룹으로의 분리가 촉진됐다. TK(대구·경북)의 대부로서 국무총리까지 지낸 신현확 당시 삼성물산 회장은 이 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삼성을 떠났다.

2000년 현대그룹 ‘왕자의 난’ 당시 청와대는 사태의 추이를 예의 주시했다. 정몽구(MK)-정몽헌(MH) 형제간의 쟁투가 극에 달했지만, 정주영 명예회장이 생존했기 때문에 직접 개입은 자제했다는 후문이다. MK의 ‘실패한 쿠데타’로도 불리는 이 왕자의 난이 정몽헌 회장의 자살로 정리될 때까지 김대중 정부는 범(汎)현대가의 지분 관계, 은행 여신 규모 등을 꼼꼼히 점검했는데 MH의 투신자살과 관련한 의혹이 지금도 채 가시지 않는 까닭이 이런 정황과도 무관치 않다. 검찰에 수차례 불려나간 뒤인 데다 MH의 자살 동기마저 석연치 않은 탓이다. MH의 금고지기 역할을 했던 임원 P씨(62)는 아직도 자살 자체에 의문을 품고 있다.

청와대 민정과 경제 비서실에는 온갖 기업 첩보가 취합되고, 정보화 수준이 되면 대통령에게 보고된다. “회장 자택 거실 옆 휴게실에 비밀 금고가 있다. 휴게실에 설치된 대형 오디오를 밀쳐내면 비밀 문이 있고 안쪽에 40억원의 현금이 쌓여 있다” “회장이 야당 ○○○ 의원에게 5억을 건넸다. 지난 2월 L 호텔 15XX실에서다”는 등등 다양하다. 위의 정보는 각기 K 그룹, H 그룹 내분 때 흘러나온 투서 내용인데 친인척이나 최측근이 아니면 도저히 입수하기 어려운 정보들이 어떻게 흘러나왔는지는 자명하다. 청와대나 검·경찰, 국정원 등으로서는 대기업과 그 오너들의 결정적 약점을 거저 챙기게 되는 것이다.

사실 기업 규모가 워낙 커지고 그에 딸린 직원이 많기 때문에 권력을 쥔 정부라도 예전처럼 기업을 쥐락펴락하기는 불가능하다. 그 후유증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이나 공정거래위 등을 통해 일정 수준에서 ‘손보는’ 것은 몰라도 과거식의 일처리는 애당초 기대하기 어렵다. 5년 임기의 정부이기에 보안 유지도 안되는 데다 법원의 판결로 뒤집힌다면 호된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따라서 예전처럼 치밀하지는 않더라도 축적한 X파일을 지렛대로 삼아 오너를 통제·관리하는 경향이 대세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