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삼성전자 협력사 직업병 피해자 “아버지는 당신이 왜 아픈지 밝혀 달라고 했다”
  • 윤민화 기자 (minflo@sisabiz.com)
  • 승인 2015.09.25 10:12
  • 호수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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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복지공단서 산재처리 거부...협력업체 직원이라 삼성전자 보상 대상서 제외
지난 22일 삼성 협력체 피해자 유가족 손성배(27)씨는 '삼성 직업병 피해자 이어말하기'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 윤민화 기자

고(故) 손경주씨 장남 성배(27)씨는 2012년 9월부터 3년간 대기업과 정부를 상대로 기약 없는 싸움을 벌이고 있다. 상대는 삼성전자와 근로복지공단이다.

그는 지난 22일 오후 6시쯤 서울 서초동 소재 삼성전자 본사 앞 길거리에서 확성기를 들고 외쳤다. “기업이 등 돌리면 정부라도 감싸줘야 하는 것 아닌가. 기업 정부 모두 내게 등을 돌렸다.”

시사저널 경제매체 시사비즈는  ‘삼성 직업병 피해자 이어 말하기’ 시위 현장에서 손 씨를 만났다.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손씨 아버지는 삼성전자 반도체 협력업체에서 일하다 사망했다. 아버지는 병상에서 아들에게 “내가 왜 아픈지 죽고 나면 꼭 이유를 밝혀 달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손경주씨는 2003년에 삼성전자 협력사 메타테크에 입사했다. 삼성 협력사 기가테크로 이직해 2009년까지 관리소장으로 근무했다. 그는 반도체 생산 라인을 총괄했다.

손씨는 2012년 8월 31일 삼성서울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병명은 급성 골수성 림프성 백혈병이다.

담당 의사였던 삼성서울병원 혈액종양내과 전문의는 소견서를 통해 "급성백혈병의 발생에 벤젠 등 화학물질이 급성백혈병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졌다. 환자가 화학적 발암 물질에 노출돼 발병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손씨는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 보험 대상으로 처리해 줄 것을 요청했다. 공단은 2차레 심사를 벌여 부지급(불승인)을 판정했다.  

손씨는 “지금 취준생(취직준비생)이다. 기자가 되고 싶다. 9살때부터 꿈꿔온 직업이다. 지금은 아버지를 위해 기약 없는 투쟁을 벌이다 있다. 그러다 보니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시간제 직장을 전전한다. 삶이 고되다”고 말했다.

다음은 손씨와 일문일답.

백혈병 진단 당시 부친의 건강 상태는.

아버지는 2009년 백혈병 판정을 받았다.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그 전까지 마라톤, 스키 등을 즐기며 매우 건강하게 생활했다.  2009년 초 아버지는 심장과 허리 통증을 가끔 호소했다. 운전할 때 브레이크가 잘 안 밟힐 정도로 오른쪽 다리에 무리가 간다고도 말했다.

부친이 사망한 뒤 삶은 어떠한가.

어머니가 가장 힘들어했다. 혼자가 된 외로움이 컸던 것 같다. 아버지 사망 당시 동생은 일병으로 막 진급한 군인이였고 나는 지방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어머니는 집에 혼자 계셨고 3년이 넘는 간병 생활에 건강이 많이 나빠졌다.  아버지가 병사하자 난 아르바이트 시간을 늘렸다. 가정주부였던 어머니도 일을 시작했다. 그래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는다.  

사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싶을 때가 가끔 있다. 취업 준비와 아르바이트까지 병행하면서 투쟁하기가 매우 힘들다. 상대도 거대한 삼성전자와 정부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하지만 이겨내야지 어쩌겠는가. 우리나라 모든 취준생이 힘들지 않는가. 나도 그 중 하나일 뿐이다.

삼성전자가 보상했나.

아버지가 삼성전자 직원이 아니라 삼성전자 보상 범위에 들지 않는다. 병원비는 보험과 자비로 충당했다. 아버지가 병상에 있는 동안 협력사에서는 기본 월급을 지급했다. 일종의 유급휴가였던 것이다. 병원비는 우리가 다 냈다. 병원비로 3억원 가량 들었다. 협력사 사장이 내 대학 등록금 500만원을 한 차례 지원했다.

협력사와는 계속 연락 하나.

안 한다. 아버지 사망 이후 다른 협력사에 합병됐다. 당시 사장은 계약직이였다. 계약 만료 뒤 회사를 떠나 지금은 아무 관련이 없다.

소송은 제기했나.

아버지가 사망한 뒤 바로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 보험을 신청했다. 부지급(불승인) 판정을 받았다. 근로복지공단은 아버지가 반도체 작업 라인에 자주 출입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재심을 요청했고 또 거절 당했다. 2년이 넘는 공방이었다.

2년 동안 질병판정위원회를 3번 열었다. 질병판정위원장은 바뀌지 않았으나 위원들은 달랐다. 1차 때는 상당히 권위적 분위기였다. 우리 가족을 죄인 취급했다. 그때 ‘아 (약자와 강자의 싸움은) 이런거구나’라고 생각했다.  

반면 2차 때는 분위기가 좋았다. 위원장 태도도 부드러웠다. 질의시간도 규정 시간 이상 가졌다. 고(故) 황유미씨 승소 선례를 들며 우리에게 매우 우호적인 태도로 대했다. 황씨는 삼성 반도체회사 생산부에서 근무한지 2년만에 백혈병을 판정받고 사망했다.

3차 때 분위기는 또 달랐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 있었다. 위원이 증인에게 하는 질문을 위원장이 가로막았다. 위원장은 그 위원에게 ‘그만 좀 물어보세요’라고 호통까지 치더라. 허망하기 그지 없었다. 우리가 말할 때 끊는 것은 괜찮다. 위원이 증인한테 질문하는 것을 막은 건 이해할 수 없다.  

질병판정위원회를 가기 전부터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던 것 같다. 3차 위원회 결과 ‘1명의 소수의견을 제외하고 모두 산업재해가 아닌 개인질병’이라고 판정났다. 3차 위원회 때 내 입장을 제대로 밝히지도 못했다.  

지금은 형사 소송을 준비 중이다. 소는 제기한 상태다. 틈만나면 아버지가 병상에서 쓰셨던 일기와 근무 기록을 살피고 있다. 아버지가 반도체 작업라인에 자주 출입했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서다.

부친의 질병이 반도체 직업병이라는 증거는.

근로복지공단은 아버지가 반도체 작업 라인에 자주 들어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관리직이라 사무실에만 상주했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아버지 일기와 근무일지를 보면 그렇지 않다. 생산 라인에 상시 출입하라는 업무 지시와 순찰 기록이 있다. 하루에 8시간 이상 작업 라인에 상주한 기록도 있다.  

근로복지공단의 판결문에는 아버지의 일기는 한 줄도 인용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결과는 달랐을 거다. 본인이 들어갔다고 주장하면 되니까. 기록에만 있는 증거니 매번 묵살당한다.

담당 혈액종양내과의는 소견서를 통해 "벤젠 등 화학물질이 급성백혈병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졌다. 환자가 화학적 발암 물질에 노출돼 발병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다만 담당 의사는 백혈병 발병 원인은 너무 많아 확신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

아버지 생전에 왜 산재를 신청하지 않았나.

아버지는 당시 다니던 회사의 사장을 매우 고마워했다. 아픈데 월급을 꼬박꼬박 챙겨주니 그랬던 것 같다. 사장님에 대한 의리 때문에 문제제기하길 꺼려했다. 하지만 병세가 악화되면서 본인이 왜 아픈지 꼭 밝혀 달라고 내게 당부했다.

아버지가 병상에 있을 때 이 문제를 거론하면 화부터 냈다. 아예 말도 못 꺼내게 했다. 어서 아버지가 쾌차하기만을 바랐다.

삼성전자에게 하고 싶은 말은.

솔직히 피해자에 대한 사과는 중요하지 않다. 열악한 작업 환경 탓에 삼성전자와 삼성전자 협력사 노동자들이 직업병 발병 위험에 노출돼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돈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보상위원회는 돈으로 모든 걸 덮으려 한다.

물론 피해자에 대한 사과는 필요하다. 하지만 누가 아팠고 왜 아팠는지를 밝히는 게 더 중요하다. 삼성전자의 태도에 문제가 있다. 돈이 필요한거면 보상위에 신청만 하면 끝이다. 삼성전자가 신청하라고 권유하고 있다. 하지만 아버지 목숨을 돈 몇 푼에 팔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이 싸움을 언제까지 할건가.

난 단지 아버지가 시켜서 하는 거다. 아는 게 없었다면 ‘그냥 돌아가셨나 보다’하고 말았을 거다. 갑자기 의식을 잃은 뒤 1주일간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에 의지하다 심장이 멎었다.  

아버지가 숨을 거두기 전에 이 일을 하지 말라고 했으면 안 했을 거다. 아버지가 병상에서 쓴 일기를 보면 ‘너무 억울하다’고 나와있다. 힘이 빠질 때마다 그 일기를 보며 힘을 얻는다.

아버지가 반도체 유해 화학물질 탓에 병사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아들이 안 하면 누가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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