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는 돈맛을 알면 안 된다”
  • 노진섭 기자 (no@sisapress.com)
  • 승인 2015.10.07 18:14
  • 호수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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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술(仁術)’ 펼친 팔순 치과의사 강대건이 후배에게 남기는 말

2013년 9월11일 서울 명동 서울대교구청에 팔순을 넘긴 치과의사가 섰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수여하는 ‘교회와 교황을 위한 십자가 훈장’을 염수정 대주교로부터 전달받았다. 이 훈장은 1888년 교황 레오 3세가 제정한 것으로, 두드러진 공로를 세우거나 교회를 위해 헌신한 평신도에게 주어진다. 그해 12월에는 청와대에서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치과의사가 교황과 한국 정부의 훈장을 연거푸 받은 까닭은 무엇일까?

올해 84세인 강대건 원장은 50년이 넘도록 현역 의사로 활동 중이다. 기자는 9월16일 서울 서대문구 영천시장 입구 4층짜리 허름한 건물 2층에 있는 치과의원을 찾았다. 개원할 때 만들었음 직한 목제 간판이 건물 1층 입구에 없다면 이곳에 치과가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구석진 곳이다.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가면 30~40년은 족히 사용한 듯한 응접실 소파와 책장이 보이고, 벽면에는 누렇게 바랜 의사면허증이 걸려 있다.

강대건 원장에게 기공실은 원장실이다. 이곳에서 한센인들을 위한 틀니 등을 만들어 무료로 제공했다. ⓒ 시사저널 박은숙

오전 11시 무렵인데 환자는 물론 간호사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진료 의자 2개가 전부인 작은 진료실로 들어서며 인기척을 내자 안쪽에 딸린 기공실(틀니 등을 만드는 작업실)에서 그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기공실에는 각종 기계와 틀니 샘플이 어지럽게 널려 있고 컴퓨터 모니터가 놓인 작은 책상이 있다. 그곳이 기공실 겸 원장실이다. 그는 “내 정신 좀 봐라. 오늘 약속해놓고 잊고 있었다. 늙으니 요즘 깜박하는 일이 많다. 간호사 없이 혼자 일한다”며 취재진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그는 1957년 서울대 치대를 나와 군의관 생활 후 1963년 치과를 개원했다. 서울시 서대문구 일대에서 몇 차례 이전하다 지금의 자리로 옮긴 지 40년이 흘렀다. 대구 출생인 그는 한국전쟁 당시 피난 간 부산에서 이모부가 운영하는 치과에서 기공 일을 배웠고 그것이 치과의사가 되는 계기가 됐다.

그가 개원할 당시는 이가 아파도 치과에 가지 않고 진통제를 먹으며 고통을 참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건강보험이 없어 진료비가 비쌌다. “난 어릴 적부터 가톨릭 신자인데 1970년대 초중반 서울 정릉에 있던 수녀원을 간 적이 있다. 그곳에서 만난 20대 젊은 수녀는 어금니가 없어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그때부터 서울 시내 모든 수녀원을 다니며 진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5년인가 79년에 가톨릭 치과의사회에서 나환자촌으로 무료 진료를 나간 적이 있다.”

빛바랜 진료기록부(위)와 틀니 기공 도구들이 ‘인술의 세월’을 대변하는 듯하다. ⓒ 시사저널 박은숙

한센인의 슈바이처로 의술 아닌 인술 펼쳐

당시 한센인의 삶은 치과 치료는 고사하고 생계를 이어가기도 힘들 정도로 팍팍했다. 이가 아파 치과에 가도 쫓겨날 정도로 사회적 인식도 좋지 않았다. “치과의사가 뭐하는 사람인가. 이가 없어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사람에게 치아를 찾아주는 일을 하는 사람 아닌가. 그래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치과 일을 하고 일요일에는 나환자촌을 찾아다녔다.”

당시 100여 개의 한센인 정착촌이 주로 경상도와 전라도 등지에 퍼져 있었다. 동틀 무렵부터 기차·버스·택시를 갈아타며 가야 점심 무렵 겨우 도착할 수 있는 오지가 많았다. 썩은 이는 무료로 뽑고, 이가 없으면 틀니를 만들어줬다. “그렇게 하면 무료 봉사를 오래 못할 것”이라는 주변의 충고를 듣고 재료비만 받기로 했다. “틀니 한 개에 20만~30만원을 주고 기공사에게 제작을 의뢰하던 때다. 비용을 아끼기 위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짬짬이 틀니를 만들었다. 개당 10만원이면 가능했다.”

그렇게 한센인에게 만들어준 틀니가 5000여 개다. 경기·전라·경상도 등 전국 한센인촌을 돌며 약 1만5000명에게 진료 봉사를 했다. 일반 공책으로 만든 진료기록부만 10권이 넘는다. 그 공책에는 환자 이름과 치아 상태, 진료 과정이 꼼꼼히 수기로 기록돼 있다. “약 20년 동안 썼는데 어쩌다 보니 10년 치밖에 남지 않아 안타깝다. 한센인은 일반인보다 장수한다는 내용 등 후배 의사들이 참고할 만한 자료인데….”

2012년에 진료 봉사를 중단했다. 나이가 들기도 했고 약 45만명이던 한센인 수가 현재 1만명 남짓으로 줄어들면서 진료할 대상이 없어져서다. 그가 받은 십자가 훈장은 33년간의 공로를 인정받은 징표인 셈이다. 그러나 그는 운이 좋았을 뿐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내가 도울 사람이 그때 많았을 뿐이고 의사로서 해야 할 일이었다.”

의사의 도리는 했을지언정 가장 노릇은 부실했다. 쉬는 일요일까지 집을 비우니 아내는 속앓이를 했다. “집사람 가슴에 뭔가 큰 게 있다. 내가 평생 환자 진료하고 한센인 돌봐주느라 가정에는 소홀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아무리 성인군자라도 이해하겠는가. 오죽하면 내가 교황의 십자가 훈장을 받을 때도 그 자리에 오지 않았다.”

“경쟁하는 후배들 안쓰럽다”

의사면허증은 있지만 운전면허증이 없다. 그 흔한 자가용 없이 지하철을 이용해 서울 마포에서 출퇴근한다. 오전 9시 반이면 어김없이 치과 문을 열고 환자를 기다린다. “환자가 몇 명이냐고? 하루에 2~3명. 그래도 월세는 낼 만하다. 난 옛날 의사라 임플란트 같은 것은 못하고 단골 환자들을 위해 틀니를 주로 해준다. 돈이 없는 사람들도 알음알음 찾아온다. 다른 치과보다 비싸지 않고 과잉 진료를 하지 않으니까(웃음).”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1시간가량 말을 하면서도 그의 허리는 꼿꼿했다. 건강 유지를 위해 무엇을 하는지를 물었더니 “없다”는 짧은 답이 돌아왔다. “마누라 잔소리에 못 이겨 매일 치과에 나오는 게 좋다”지만 꾸준히 움직이고 일한다. 복식호흡을 하고, 일주일에 한 번은 목욕을 즐기고, 친구들과 자주 연락하며 지낸다.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오래전에 타자기를 사용했었는데 요즘은 컴퓨터를 배운다. 유튜브에 역사 자료물이 많아 즐겨 본다.”

후배들에게 남길 말이 많다고 했다. “예전에는 치과가 얼마 없어서 어딜 가도 먹고살 만했다. 요즘은 심한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는 후배들이 안쓰럽다. 과거 서울에 부동산 개발 붐이 한창이던 시절 동료 의사 한 명은 부동산 개발에 뛰어들었고, 돈맛을 알더니 결국 치과의사로 성공하지 못했다. 의사가 돈맛을 알면 안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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