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어난 2인자’는 부담 잠룡 할거가 나아
  • 김현일 대기자 (.)
  • 승인 2015.11.26 20:52
  • 호수 1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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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 총장 부각도 우연 아니다

“박태준 최고위원이 눈물을 쏟아냈다. ‘내가 어쩌다…’라는 탄식을 되뇌면서. 옆에 앉은 중앙일보 K기자가 탁자 위의 휴지를 들어 연신 닦아줬으나 얼굴은 온통 눈물로 얼룩졌다. 새 휴지통이 바닥난 이후에도 눈물과 한탄은 계속됐다.” 1992년 봄,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전면에 위치한 대기실에서 벌어진 장면이다. 집무실에서는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YS) 민자당 대표최고위원 두 사람이 회동 중이었다. 민자당 내 최대 계파인 민정계 좌장으로서, 한때 대권 꿈을 꾸며 기세를 올렸는데 곁방에서 기다리는 처량한 신세가 됐으니 그럴 만도 했다. 가까스로 울음을 그친 박 최고위원은 손주환 정무수석을 ‘대리’해 자신을 상대한 K기자에게 후보 경선 대비 사인과 포기 지시를 받기까지의 전말을 털어놨다(YS의 사촌처남인 손 수석은 ‘YS 불가피론’으로 대통령의 YS에 대한 불신과 반감을 누그러뜨린 ‘YS 대통령 만들기’의 일등공신. 당초 박 최고위원과 함께 대기할 예정이던 손 수석은 박 최고위원의 표정을 읽고는 K기자에게 ‘말동무’를 해줄 것을 부탁한 후 이내 사라졌다). 잠룡(潛龍)에서 토룡(土龍·지렁이)으로 전락할 때의 충격과 고통은 예고된 필연이다.

현직 대통령에게 가장 무서운 존재는 ‘후계자’다. 양자가 기본적으로 갈등관계이기 때문이다. 뿌리(진영)가 같을 때 더 험한 사태가 벌어지는 아이러니도 권력의 속성에서 비롯한 것이다. 자신이 ‘키운’ 후임자에 의해 백담사에 유폐된 제11·12대 전두환 대통령은 권력의 모든 것을 함축한다. ⓒ 연합뉴스

현재 권력 뜻대로 후계자 만들어지지 않아

당시 청와대가 후계자로 뜸을 들인 인사는 박 최고위원 이외에도 여럿이다. 초기에 YS의 집중포화를 맞고 하차한 6공 황태자 박철언 정무장관이나 노재봉 국무총리를 논외로 하더라도 이종찬 의원, 박준규 국회의장 등이 명멸했다. 이들의 경선 출마 채비 동기는 제각각이지만 암묵적 양해 내지 동의하에 이뤄진 것만은 분명했다. 박준규 의장은 대통령 독대 때 출마 의사를 비쳤더니 ‘열심히 해보시라’는 요지의 답변을 들었다면서 “확실하게 아니라고 했으면 망신이나 당하고 YS와 척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술회한 바 있다. YS는 ‘탈당-반정부 투쟁’이라는 초강수 으름장으로 청와대의 저지선을 돌파하면서 경쟁자들을 차례로 찍어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 뜻을 이룬 YS였고, 그렇기에 후계자 결정이 현재 권력의 의지대로 되는 게 아님을 절감했음 직하지만 대통령이 된 이후 그 자신의 선택은 정반대였다. 자신이 재단한 대로 밀어붙이려고 했다. 하지만 완전히 빗나갔다. 지명권 행사는커녕 YS 자신이 질색하는 이회창(昌)에게 당권을 뺏기듯 넘겨주고 그가 대선 후보가 되는 ‘사태’를 지켜봐야 했다. 자신이 전임자에게 한 것처럼 스스로도 당에서 밀려났다. 이인제 경기도지사를 내세워 세대교체론을 전파하려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인제 지사의 탈당과 대선 출마로 되레 가장 저어하던 김대중(DJ) 대통령 시대를 도래하게 만들었다. 이인제 카드가 안 먹혀들자 이수성 서울대 총장을 총리로 임명하고 이홍구 전 총리와 박찬종 의원 등을 끌어들여 이른바 ‘9룡’의 경쟁 구도를 만들었지만 여권의 혼란만 가중시켰다. 그런 가운데 차남 김현철이 한보 비리에 연루돼 구속되면서 권위는 여지없이 실추됐고, 급기야 DJ 측과 퇴임 후 신변 보장이나 ‘거래’하는 한심한 처지에 이르렀다. 후계 논의와 관련해 YS-昌 관계는 특히 곱씹을 대목이 많다. YS가 임기가 보장된 감사원장 자리에서 그를 파내기 위해 총리를 시킨 것도 그렇고, 해임 낌새를 알아챈 昌이 5개월 만에 총리직을 던지면서 대통령감으로 급부상한 점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진보 진영의 후계 구도 전개 양상은 보수 진영의 그것보다 훨씬 스마트하다. 과거 보수 정권의 사례가 반면교사가 됐는지, 어려운 상황 때문인지 여부는 따져봐야겠지만 드러난 모양새만으로 보면 몇 수 위다. DJ는 임기 3년 차에 접어든 2000년 2월 후계 논의를 개방했다. “같은 조건에서 경쟁시켜 나(DJ)로부터가 아닌 국민 지지를 받는 사람이 민주당 후보가 되도록 하겠다” “당 중진들이 차기 대권 도전 선언을 하는 것은 괜찮다”고 했다. 부인의 옷로비 사건 등 권력형 비리로 흩어진 민심을 추스르려는 측면도 없지 않았지만 틀어막는다고 해결될 사안이 아님을 아는 DJ다운 대처였다. 하지만 레임덕을 우려해 다음 해까지도 ‘공정한 선출’만 역설하며 시간을 끌었다. 한편으론 한나라당 쪽의 ‘昌 대세론’을 빌미로 昌에 필적할 경쟁력을 갖춘 외부 인사를 영입하겠다고 선언해 내부 도전을 최소화했다. 이처럼 노회한 정국 운영이 노무현·이인제·정동영·한화갑·김중권·김근태 등이 ‘열연(熱演)한’ 2002년 국민경선의 흥행 대성공을 담보한 것이다. ‘게이트’로 통칭되던 각종 스캔들로 인해 땅에 떨어진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권력 재창출이 가능했던 것도 그래서다.

‘양자(養子)’로서 DJ 정권 대를 이은 노무현 대통령은 후계 문제에 개방적이었다. “차세대를 내가 만들 생각이 없다. 되지도 않는다”며 “당 공식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공인된 과정을 기준으로 기회를 주는 것이 좋겠다”고 했던 약속을 지켰다. 정권 초기 이장(里長) 출신 김두관을 행자부장관으로, 강금실 변호사를 법무부장관으로 발탁하고 이후 유시민을 보사부장관에 임명하는 등 선호를 드러내긴 했지만 기회 부여 그 이상으로 비칠 지원은 없었다. 이해찬(총리)·정동영·정세균 등의 요직 임명이나 김혁규 경남도지사의 총리 기용 시도는 후계 풀을 넓히려는 노력쯤으로 풀이된다.

이명박 정부 최고 실력자였던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 헌정사상 최초의 현직 대통령 친형 구속 기록을 세웠다. 그는 최근 포스코 비리와 관련해 불구속 기소됐다. ⓒ 시사저널 임준선

‘예쁜 2인자’는 없다…갈등은 숙명

제17대 이명박(MB) 대통령에서 제18대 박근혜 대통령에 이르는 과정은 지난 보수 정권의 그것을 빼닮았다. MB의 청와대는 18대 총선 공천 대학살을 포함, 2007년 경선 라이벌 ‘박근혜 후보’ 사람들을 요직에서 배제했다. 그리곤 부동의 차기 1순위 ‘박 후보’ 견제를 위해 ‘젊은 피’를 대거 등장시켰다. 총리에 지명됐던 김태호 경남도지사를 비롯해 오세훈 서울시장, 임태희 청와대 비서실장, 원희룡·남경필 의원 등이 세대교체론에 동원됐다. 그러나 ‘박근혜 대세론’을 넘어서지 못했고 내부 갈등만 고조시켜 국정 동력만 상실하게 됐다.

현직 대통령과 사사건건 대립하면서 끝내 대권을 거머쥔 박근혜 대통령이 후계 문제를 어떤 시각에서 보고 다룰지는 짐작된다. 통상 반성적 결과로 구태를 지양하는 게 상식이지만 권력의 세계에선 아니다. 지양(止揚)이 아니라 지향(指向)이다. 매섭게 주변을 단속하고 2인자의 부상(浮上)을 경계하는 경향이 일반적이고, 역대 정권이 대부분 그래왔다. 하물며 피아 구분이 유달리 강한 박 대통령이다. 넘어진 유승민 의원을 다시 한 번 밟는 모습이 우연이 아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차기 대권과 관련해 꾸준히 거론되는 소이도 마찬가지다. 차기 대통령 선호도에서 다른 여야 잠룡들을 압도하는 반 총장은 아주 요긴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부 도전, 특히 대통령과 길을 달리하는 잠룡의 대두를 견제하고 충성을 유도하는 데 이에 비견될 카드가 있을 수 없다.

권력세계에 ‘예쁜 2인자’는 없다. 정권 막판에야 어쩔 수 없더라도 당장은 눈엣가시다. 현재 권력으로선 어차피 막지 못할 바에야 잠룡들의 할거가 대안이라고 판단하는 게 당연하다. 청와대는 언론이 반 총장이나 오세훈 전 서울시장, 황교안 국무총리 등을 ‘차기 대권’과 연결 지어 운위해도 침묵으로 일관한다. 이이제이(以夷制夷) 방책의 산물일 터다. 이와 더불어 여권 후보 가운데 선두를 달리는 김무성 대표가 야권의 박원순 서울시장과 13% 안팎의 선호도에 머무르고 다른 후보군도 10% 전후를 오르내리는 상황이 청와대로서는 그나마 다행일 게다. 현재 권력의 입맛에 맞는 후계자가 없던 게 보수 정권의 관례 아닌 관례였는데 이 예외 없던 관례에 예외가 생길지는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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