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직원 무더기 징계·해임
  • 박준용 기자 (juneyong@sisapress.com)
  • 승인 2015.11.26 21:06
  • 호수 1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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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훈 前 원장 재임 때 직원 대거 징계위 회부…DJ 정부 초기 이후 최대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無名)의 헌신.’ 직원 하나하나가 정체를 숨기고 나라에 공헌하겠다는 국가정보원의 원훈(院訓)이다. 그러나 2009년 이후 그 무명의 헌신은 징계로 돌아왔다. 시사저널 취재 결과,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재임한 2009년부터 2013년 사이 국정원 요원이 무더기로 징계·해임된 것으로 확인됐다.

국정원이 직원을 대규모 징계한 것은 국민의 정부 초기 ‘대량 면직 사태’ 이후 처음이다. 대량 면직 사태는 국정원이 1998년 4월 IMF 사태에 따른 구조조정을 명분으로 직원 581명을 재택근무 발령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국정원은 이들 중 사표를 내지 않은 직원들을 1999년 3월 직권 면직했다.

원 전 원장 시절의 대다수 징계는 원 전 원장의 지시에 대해 문제제기를 했던 인사나 호남 출신 인사를 ‘찍어내기’ 위한 조치였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 시사저널 포토

“2009년 이후 억울한 징계 크게 늘어”

한 전직 국정원 직원은 “1998년에 있었던 대량 면직 사태는 예전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시절 실제로 만연한 비리를 벌한 측면이 컸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다르다. 원 전 원장이 자신의 ‘라인’이 아닌 고위직 인물이나 부당한 업무에 문제제기를 하는 직원들을 대거 배제시켰다”면서 “‘규정 위반’ 등 혐의를 덮어씌워 징계하거나 해임하는 방법을 주로 활용했다”고 말했다.

국정원 직원의 징계·해임은 2009년부터 크게 늘었다. 이는 징계·해임을 당한 직원들이 낸 행정소송의 증가에서도 나타난다. 법원 판결문 검색 시스템에 따르면, 2009년부터 현재까지 국정원을 상대로 직원이 정직·강등·해임을 취소해달라며 서울행정법원에 낸 소송은 14건이다. 이는 2000년부터 2008년까지 같은 종류의 소송이 8건이었던 것에 비해 증가한 수치다.

국정원이 직원 징계에 집착한 사실은 2009년 해직된 안보수사5팀 5급 김 아무개씨 사례에서도 드러난다. 2000년부터 9년간 국정원에서 일한 김씨는 국정원직원법상 비밀 엄수 의무를 어겼다는 이유로 감찰실 조사를 받았다. 김씨는 조사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고 항변했지만 국정원 징계위는 2009년 5월29일 그의 직급을 강등한다고 의결했다. 원 전 원장은 징계위에 재심사를 요구했다. 징계위는 결국 다시 열려 2009년 6월9일 김씨를 해임하기로 의결했다. 당시 김씨는 법원에 의해 간신히 구제를 받을 수 있었다. 그가 행정소송을 낸 후 대법원이 “최초 심사·의결했던 징계위가 최초 의결 내용보다 중하게 재의결한 것은 위법”이라며 이 징계가 부당하다는 최종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국정원이 내린 징계 대다수는 전형적 ‘짜맞추기’라고 국정원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이들에 따르면, 국정원 감찰실은  해당 직원의 비위 사실을 과장하거나 조작해 작성한 조사서를 가지고 와 피조사자를 압박했다. 이런 방식으로 조사를 받았던 전직 국정원 직원은 “국정원 감찰실은 원장의 ‘호위부대’였다”면서 “미리 그림을 그려두고 추궁을 하고, 내가 기억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도 징계 사유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비밀 엄수 의무의 ‘덫’

국정원 직원 징계 소송에 참여한 조 아무개 변호사도 “원 전 원장 재임 시절 국정원이 내린 징계 중 상당수는 정치적 이유가 있다고 본다”면서도 “징계를 당한 직원 중 해임되지 않고, 강등·정직 등을 당한 분이 많아 아직 국정원과의 고용 관계가 유지되고 있기에 당사자들이 문제제기를 하기가 조심스러울 것”이라고 언급했다.

특히 국정원 직원이 짊어진 비밀 엄수 의무는 직원을 징계로 옭아매는 ‘덫’이 됐다. 국정원직원법 17조 1항은 ‘직원은 재직 중은 물론 퇴직한 후에도 직무상 알게 된 비밀을 누설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여기서 ‘비밀’을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따라 징계의 수준도 달라진다. 국정원이 직원을 무더기로 징계·해임하며 이 점을 활용하고 있다는 의혹이 인다.

이 아무개씨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국정원은 해임당한 이씨가 일본 도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사무실 등의 위치를 말했다며 ‘비밀누설죄’를 적용했다. 하지만 이는 이미 언론에 공개된 내용이었다.

2014년 서울행정법원에 부당한 징계를 당했다며 국정원을 상대로 소송을 낸 직원 김 아무개씨의 사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징계위는 김씨가 자신의 고등학교 동기로부터 들은 모 건설사에 대한 수사 내용을 한 국정원 출신 정당 당직자에게 말한 것을 문제 삼았다. 하지만 이 내용 또한 이미 언론에 나왔었다. 법원도 다른 징계 사유는 정당하다고 판단했지만 이 부분에는 징계위의 오류가 있었다고 인정했다.

이와 더불어 국정원이 직원을 징계한 후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소송전에 막대한 비용과 공력을 들이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전 국정원 직원 최 아무개씨 사건 항소심에서 국정원은 대형 로펌인 법무법인 태평양을 선임했다. 기존에 정부법무공단에 사건을 맡기던 관행을 깬 것이다.

이에 대해 국정원 관계자는 “행정 소송은 예전에 해임됐던 사람들도 제기할 수 있다. 징계에 의한 소송이 늘어난 데에 특별한 계기는 없다”고 말했다.

 

“국정원 감찰실, 직원 징계 위해 인권침해” 

“유우성씨 간첩 조작 사건이 이뤄진 국정원 중앙합동신문센터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비인권적 조사가 이뤄졌다.”(국정원에서 해임된 한 직원의 말)

국정원 감찰실이 내부 직원을 징계하기 위해 인권침해를 하는 강압 조사를 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피조사자의 변호인 조력권과 진술 거부권이 사실상 묵살됐다는 의혹도 일고 있다.

국정원 감찰실 조사는 형식으로는 ‘행정조사’지만 사실상 ‘피의자 신문’이다. 국정원은 수사 기능도 갖추고 있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서울행정법원도 이런 이유로 2013년 7월 국정원 감찰실 조사에 대해 “형식을 피의자 신문이 아닌 행정조사라고 내세우더라도, 실질적으로는 징계 사유에 대한 조사와 형사소추를 위한 수사의 성질을 함께 가진다고 보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감찰실 조사가 피의자 신문에 해당하면 감찰실의 조사를 받는 국정원 직원은 변호인 조력권과 진술 거부권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복수의 조사 경험자들은 이 조사실에서 두 권리 모두 허용되지 않았다고 증언한다.

해임을 당한 한 직원은 “예전 사안에 대해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는데 조사서를 가져와서 ‘이게 맞지 않느냐’는 식으로 추궁했고, 변호인을 부를 수 있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직원은 “진술 거부권을 행사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명령 불복종과 감찰 업무 방해로 다시 징계를 하겠다는 말이 돌아왔다”고 전했다.

국정원은 감찰 업무 규정을 들어 피조사자의 변호인 조력권과 진술 거부권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내부 규정에는 △감찰 내ㆍ조사에 필요한 출석, 자료의 제출 또는 답변을 요구받고 정당한 사유 없이 이에 불응한 때 △정당한 사유 없이 감찰 조사를 방해한 때 국정원이 해당 직원을 징계할 수 있다고 돼 있다.

하지만 법원은 이미 이 감찰 규정을 적용하더라도 국정원이 직원 감찰·조사 과정에서 변호인 조력권과 진술 거부권을 지켜야 한다고 판결한 바 있다. 2013년 국정원 전 직원 김 아무개씨가 “부당하게 해임됐다”고 낸 소송에서 법원은 “조사관의 답변 요구에 불응하고 진술을 거부하는 것은 감찰 규정이 허용하는 ‘정당한 사유’에 해당하므로 징계 사유가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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