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김 시대’ 구습만 남고 극복은 없다
  • 이승욱 기자 (gun@sisapress.com)
  • 승인 2015.12.03 20:28
  • 호수 1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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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전문가 10인이 진단한 ‘양김 정치’ 이후의 과제

‘거산(巨山)’ 고(故)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재임 말기는 엄혹했다. 임기 말년인 1997년 대한민국은  사상 유례없는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사태를 맞으면서 패닉 상태에 빠져들었다. IMF의 고통을 여전히 몸으로 기억하는 국민들이 군부독재를 종식시키고 금융실명제 등 각종 개혁 정책을 추진한 YS에 대한 긍정적인 기억보다, IMF 위기를 초래한 전직 대통령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를 먼저 떠올리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YS 서거 후 장례식 닷새 동안 이어진 전 국민의 추모 열기는 예상외로 뜨거웠다. 임기 말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낮은 6%의 지지율을 기록했던 전직 대통령에 대한 애도라고 하기에는 뜻밖의 반응이었다. 닷새간의 국가장 기간 동안 전국에서 18만명이 넘는 국민이 분향소를 찾아 YS의 서거를 애도했다. YS의 민주화운동 동지이자 영원한 경쟁자였던 고 김대중(DJ)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도 YS 서거 정국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소재 거리 중 하나였다.

2003년 2월25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각계 인사들과 외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제16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이 악수를 하고 있다. ⓒ 시사저널 포토

긍정과 부정이 공존하는 ‘양김 정치’

YS 서거 정국을 맞아 YS와 DJ로 대표되는 이른바 ‘양김(兩金) 시대’ 정치에 대한 재평가가 한창이다. 이러한 현상의 기저에는 현재 우리 정치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실망과 비판이 동시에 깔려 있다. 정치가 국민이 흘리는 눈물을 닦아주지 못한 채 정치 발전보다는 갈등과 반목을 양산하는 상황에서 ‘정치가 사라진 정치’에 대한 회의가 만연해 있는 것이다. YS 서거 정국에 즈음해 양김 시대의 정치가 지금 우리 정치에 던지는 교훈의 메시지는 무엇인지, 그리고 양김 정치를 뛰어넘어 극복해야 할 과제는 무엇인지, 정치 평론가 및 정치학과 교수 등 정치 전문가 10인의 의견을 들어봤다.

다원화된 사회에서 모든 정치행위에는 명과 암의 평가가 동시에 존재한다. 양김 시대의 정치에 대한 평가도 긍정과 부정의 두 가지 양면성을 모두 내포하고 있다. 일부 정치 전문가들은 양김 시대 정치의 한계점으로 이른바 ‘보스 정치’로 대표되는 계보 정치, 그리고 지역주의에 기댄 지역 분열 정치 등을 꼽는다.

황태순 위즈덤센터 수석연구위원은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위한 두 정치인의 노력은 칭송받아 마땅하지만 과거 양김 정치가 보여준 패악도 적지 않았다”면서 “지역감정을 기반으로 한 정치와 돈 정치, 줄 세우기 정치, 보스 정치 등은 현재 우리 정치에서도 여전히 엿보이는 잘못된 유산”이라고 말했다. 박상병 정치 평론가는 “양김 시대 YS와 DJ가 전면에 나서 민주 세력을 결집시키고 민주주의 시대를 활짝 연 노력은 공으로 평가해야 한다”면서도 “정당의 사당화와 지역주의, 그리고 권위적인 정당 운영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라고 꼽았다.

하지만 YS·DJ가 정치 전면에 나섰던 당시의 엄혹한 시대 상황이 양김 정치의 한계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정희 한국외대 교수는 “양김이 추구했던 정치행위의 방식이 권위적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면서도 “하지만 당시의 정치 지도자의 리더십은 독재정권과 맞서 싸워 이기려면 의사결정 과정이 항상 민주적이거나 공개적이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창선 정치 평론가는 “(양김 시대 당시) 계파 정치에는 역기능과 순기능이 공존하는 측면이 있다”면서 “당시 군사독재에 저항했던 야당이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결사체의 성격이 강했다는 점을 감안해 평가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양김 시대 정치에 대한 엇갈린 평가 속에서도 양김 시대에 견줘 지금 우리의 정치가 당시에 비해 정치력이 부족하다는 점은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내놓은 의견이다. 정해구 성공회대 교수는 “과거 양김이라는 거물 정치인이 존재하고 ‘민주 대 반(反)민주’라는 명확한 전선이 구분된 상황에서 큰 정치가 작동하고 있었다”면서 “지금은 아예 정치가 사라진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우리 정치는 대의명분이 없어지고 당내에서 계파끼리 싸우는 데만 몰두하는 작은 정치만이 존재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유창선 정치 평론가는 “과거 민주주의라는 대의(大義)를 위해서 정치인들이 탄압을 받으면서도 자신을 희생하는 면모를 보여왔다”면서 “지금은 전체의 이익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우선하고, 또 필요하면 배반을 할 수도 있는 사익(私益)에 갇혀 있는 정치에 매몰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11월23일 박근혜 대통령이 김영삼 전 대통령 빈소에서 조문하고 있다. ⓒ 청와대 제공

“사익에 갇혀 큰 정치 사라져”

이준한 인천대 교수는 “양김은 민주주의라는 공동의 목적을 위해서 싸우다가도 대의를 따라 협조가 필요할 때는 발걸음을 함께하기도 했다”면서 “지금 정치권은 선의의 경쟁도 없고 장기적인 정치 의제를 내놓지도 못한 채 갈등만 남발하고 있는 형국”이라고 말했다. 김태일 영남대 교수는 “양김 시대 정치인은 민주화의 과정에서 자기희생이라는 헌신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을 보여줬다”면서 “그에 비하면 지금은 대의는 사라지고 한번 삐치면 완전히 그 관계가 끝이 나 적이 돼버리는 식의 정치가 횡행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소통의 부재와 권위주의 부활 등으로 인해 민주주의의 위기를 맞고 있다는 진단은 대다수 정치 전문가가 가장 많이 우려하는 부분이다. 박상병 정치 평론가는 “양김 정치를 통해 현재의 정치가 배워야 할 대목은 (YS와 DJ 모두) 말이나 선심성 대국민 공약보다는 행동으로 국민과 함께 대중 속으로 들어갔다는 점”이라면서 “국민과 함께 민주주의라는 시대정신을 놓고 하나가 돼 소통하고, 또 광장에서 국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한 것은 지금의 정치인이 따라 배우지 못하고 있는 정치의 모습”이라고 지적했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원장은 “양김 시대는 정치 지도자가 경쟁하는 가운데 협력을 하면 엄청난 시너지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을 제대로 보여준 사례”라면서 “YS와 DJ는 정치적 기반이나 출생 지역도 모두 다르고 정치 스타일도 달랐지만 치열하게 권력투쟁을 하면서도 합심할 때는 강하게 합심하면서 국민들의 갈증을 풀어줬다”고 말했다.

임기 초반부터 소통 부재를 지적받고, 입법부인 국회와 끊임없이 갈등을 빚고 있는 ‘박근혜식 리더십’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원장은 “박 대통령은 (YS와 DJ와 비교하면) 국민과 먼 거리를 둔 채 독야청청하는 은둔형 스타일처럼 보인다”면서 “대통령과 국민 사이의 큰 공간적 거리감은 결국 박 대통령이 국민들의 생각과 행동양식, 희망 사항과는 먼 결정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의회 무시하는 태도 버려야”

이정희 한국외대 교수는 “현재 우리 사회는 사회 각 분야에서 갈등이 깊어지고 심화하는 양상”이라면서 “이러한 흐름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갈등의 각 주체들이 갈등과 반목을 원활히 풀 수 있는 조화로운 리더십이 필요한데 박 대통령은 임기 후반인 지금까지도 소통의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황태순 위즈덤센터 수석연구위원은 “입법부인 국회와 행정부인 정부는 기능적인 차이가 있다. 행정부가 효율성을 중시하는 자동차의 가속기라면, 입법부는 능률성보다는 효과성 또는 형평성을 따져야 하는 제동기와 같은 기능을 한다”면서 “야당 지도자를 지낸 박 대통령이 이를 모르지 않을 것인데, 5년 재임 기간 동안 속도전에만 치우쳐 정부에 제동을 걸려는 국회를 야단치려고만 한다”고 말했다. 그는 “박 대통령과 청와대 수석 등이 모두 나서 야당을 설득하고 그래도 안 되면 대국민 담화를 내놓고 심판을 해달라고 해야 한다”면서 “더욱이 국무회의 같은 자리를 통해 국회를 야단만 치려고 하니 일이 더 꼬이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박상병 정치 평론가는 “양김은 각종 폐단에도 불구하고 의회주의자의 면모를 보였지만, 박 대통령은 의회를 무시하고 있다”면서 “박 대통령이 나만 옳다는 독선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양김 정치 이전의 귄위주의적인 통치 시대로 되돌아가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다”고 지적했다.

9월2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오른쪽)와 문재인 새정치연합 대표가 ‘2015 가정어린이집 보육인 대회’에 참석했다. ⓒ 시사저널 박은숙

소통 부재와 권위주의 통치에 기대는 박 대통령 못지않게 정부·여당을 견제해야 하는 야당 역시 과거의 구습에 매몰돼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원장은 “박근혜 정부가 각종 실정으로 인해 비판을 받고 있는데도 야권, 특히 새정치민주연합은 여전히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이면서 야당으로서 본래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면서 “YS와 DJ는 공격과 수비가 분명했다는 점에서 현재의 야당 지도자들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여준다. YS와 DJ가 (정권을 향해) 소총을 쏘거나 대포를 쏘거나 탱크로 돌진하는 식으로 전술을 자유자재로 썼다면 요즘 야권은 1년 내내 소총만 쏴대는 것 같다. 작은 전투만 계속하니깐 본인들도 지치고 국민들도 엄청 짜증이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박성민 민컨설팅 대표는 “YS는 결단과 용기가 가장 돋보이는 정치를 했고, DJ는 통찰력에서 어느 지도자보다 높은 자질을 갖고 있었다”면서 “요즘은 대통령도 야당도 국가의 방향을 제시하는 통찰력이나, 정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결단과 용기 모두 부족한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박상병 정치 평론가는 “양김 시대 야당은 기본적으로 말만이 아닌 행동으로 싸웠고 그에 대한 책임도 질 줄 아는 자세를 견지했다”면서 “정권이 보여주지 못하는 거대 담론을 국민들 앞에 대안으로 제시하고 뭉치는 정치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것이 야당의 역할인데도 지금은 역동성도, 투쟁성도, 중심도 없이 비전도 제시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고 진단했다.

“정치 지도자, 소통 통해 한계 극복해야”

무엇보다 양김 시대의 정치를 반면교사 삼아 새로운 정치의 모습을 선보이려면, 여야 정치권이 정치인을 발굴하고 정치 지도자로 성장시킬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과 정치 문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정치인 스스로 자질을 키울 자기성찰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도 새겨들을 대목이다.

김태일 영남대 교수는 “과거 정치 엘리트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기간 정치적 훈련을 받고 리더로 성장하는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야 했다”면서 “최근에는 정치권 밖에서 쌓은 경력과 경험이 정치 리더로 성장하는 발판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정치는 다양한 사회의 이해를 조절하는 등 고도의 정치적 감각이 필요한 만큼 과거에 비해 정치 엘리트로 성장하는 수업이 생략되는 경향이 만연하는 것은 아쉬운 대목”이라고 덧붙였다. 이정희 한국외대 교수는 “양김 시대에 비해 현재 우리 사회는 더 다변화되고 있고 갈등이 더 복잡하고 첨예화되는 양상”이라면서 “정치가 점점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는 구조인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치인이 더 실력을 갖추고 소통을 통해 자신들의 한계점을 극복하는 방법을 배워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박성민 민컨설팅 대표는 “양김 시대가 지녔던 일부 한계에도 불구하고 YS는 정국이 막혀 있는 상황이 되면 선두에 서서 돌파를 해나가는 결단과 용기를 보여줬고, DJ는 햇볕정책과 대중경제론 등과 같은 깊은 혜안을 보여줬다”면서 “정치 지도자로서의 자질은 정치가로서의 자질, 사상가의 자질, 경영가의 자질, 운동가의 자질이라는 네 가지가 갖춰져야 하는데 현재 정치 지도자라고 자임하는 이들이 이 자질을 얼마만큼 갖추고 있는지 의문이다. 지금은 정치인들이 YS와 DJ라는 한국 현대사의 두 대표 정치인의 행적에서 배워야 할 지점을 제대로 성찰할 때”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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