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사보도 언론인들 공조로 이뤄낸 ‘대작’
  • 김경민 기자 (kkim@sisapress.com)
  • 승인 2016.04.14 18:33
  • 호수 1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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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기자들 ‘파나마 페이퍼’ 1년간 취재…정보 유출 루머 나왔지만 취재 보안 철저히 지켜

2.6테라바이트(TB). 일명 ‘파나마 페이퍼’로 불리는 조세회피 관련 자료의 용량이다. 2010년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미국 국무부 문서의 용량이 약 1.73기가바이트(GB)였던 것과 비교하면 무려 1500배가 넘는 양이다. 위키리크스가 불러일으켰던 세계적 파장을 기억한다면 이번 ‘파나마 페이퍼’ 건이 가져올 파장의 크기가 어떨지 짐작할 수 있다.

사상 유례없는 규모의 비공개 문서가 폭로됐다. 2.6TB의 자료 속에는 파나마의 법률사무소 모색 폰세카(Mossack Fonseca)가 보유하고 있는 최소 480만통의 이메일, 300만건의 데이터베이스 파일, 그리고 210만개의 PDF 파일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40년간 이 회사에서 주고받은 거의 모든 문서가 해당된다.

어떻게 이토록 방대한 분량의 내부 문서가 공개될 수 있었을까. 또 어떻게 이토록 거대한 탐사보도가 이뤄질 수 있었을까. 그 뒤에는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라는 단체가 있다.

대규모 조세회피자 명단 ‘파나마 페이퍼’를 공개한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의 홈페이지 캡처 화면.


CBS <60분> PD가 만든 비영리 협회

ICIJ는 각국의 탐사보도 기자들 간의 협력을 통해 이뤄지는 심층보도를 지원한다. 전 세계 65개국 이상의 국가에서 활동하는 190여 명의 탐사보도 기자들로 구성된 글로벌 네트워크다. 미국 CBS의 유명한 탐사보도 프로그램 <60분(60minutes)>의 담당 PD였던 찰스 루이스(Charles Lewis)가 1997년 워싱턴D.C.에 설립한 공공청렴센터(Center for Public Integrity)가 그 시작이었다. 이 센터가 주도하는 한 프로젝트로 시작된 ICIJ는 ‘감시자로서의 언론’의 외연을 확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비영리 조직이며 자선단체와 개별 독지가 및 세계 시민들의 후원금으로 운영된다.

ICIJ는 홈페이지에 자신들의 설립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짧아진 언론환경의 호흡과 부족한 자원으로 절름발이가 된 언론은 공익을 침해하는 존재의 상대가 되기에는 역부족이다. 방송국과 신문사들은 외국 지사를 폐쇄하고 해외 출장비는 삭감했으며 탐사보도팀은 해체했다. 우리는 세상을 감시하는 눈과 귀를 잃고 있다. 그것도 그것이 가장 필요한 시기에. ICIJ는 다양한 국가에서 활동하는 언론인들을 경쟁보다는 협력이라는 구호 아래 하나로 묶어 세계 최고의 초(超)국경 탐사보도팀을 만들고자 한다.”

ICIJ는 아이템별로 전 세계에 흩어진 탐사보도 언론사와 언론인에 접촉해 보도 공조를 이뤄간다. 기본적으로 팀 체제로 운영되며 하나의 팀은 적게는 3명에서 많게는 100명 이상의 기자들로 이뤄진다. 미국 워싱턴D.C.의 ICIJ 본부에서는 이렇게 서로 다른 곳에서 심층 취재한 것을 모아 영향력이 큰 하나의 기사로 만들어낸다. 이런 방식으로 ICIJ는 다국적 담배기업과 조직화된 범죄 조직 연합의 마약 밀수 사실(Tobacco Underground·2010)을 폭로해왔다. 사적 군사 카르텔(The Business of War·2002)과 기후변화 로비스트(The Global Climate Change Lobby·2009) 문제를 파고들었으며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 뒤의 숨은 계약들(Windfalls of War·2007)을 낱낱이 공개했다. 프랑스·스페인·브라질·홍콩·영국·독일·일본 등 세계 각국의 유력지가 ICIJ의 협력업체로 참여하고 있으며 한국 언론사로는 ‘뉴스타파’가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파나마의 법률사무소 모색 폰세카의 내부 자료가 공개됐다. ⓒ REUTERS


공개된 전 세계 협력 언론사만 45개

이번 ‘파나마 페이퍼’ 역시 각국 탐사보도 언론인들의 공조 위에 지어진 대작이었다. 시작은 2014년 독일 뮌헨의 유력 일간지 쥐트도이체차이퉁(Suddeutsche Zeitung) 소속 기자 바스티안 오버마이어에게 날아든 한 통의 이메일이었다. 익명의 제보자는 문서 일부를 전달하며 “이 같은 범죄를 공개하고 싶다”는 암호화된 메시지를 남겼다. 전달받은 문서를 검토한 쥐트도이체차이퉁은 이 정보가 신뢰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곧바로 ICIJ에 연락을 취했다. 쥐트도이체 차이퉁과 ICIJ는 이미 2013년 HSBC 스위스지점 대규모 조세회피 문서 유출 건으로 공조 취재를 벌인 경험이 있었다.

ICIJ 역시 이 문서의 뉴스 가치를 한눈에 알아봤다. 곧 유출된 정보를 안전하게 공유하고 철저하게 보호하기 위한 자체 검색엔진 개발에 착수했다. 개발된 정보 검색엔진으로 접속하기 위한 URL 주소는 BBC·더가디언·퓨전매거진 등 다양한 언어로 된 매체들이 섞인 암호화된 이메일로 공유했다. 이 시스템에는 실시간 채팅창도 있었다. 기자들 간에 취재 팁을 공유하고 모르는 언어가 나오면 상호 번역을 해주며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ICIJ 디렉터인 제라드 라일(Gerard Ryle)은 온라인 매체 와이어드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브라질 문서를 봐야 하면 브라질 기자를 찾았다”며 “우리는 참여하는 기자들끼리 활발하게 소통하고 정보를 공유할 것을 권장했다”고 말했다.

‘파나파 페이퍼’가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많은 이는 그 방대한 양과 더불어 1년여의 취재 시간 동안 철저한 취재 보안이 이뤄진 점에 또 한 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여러 나라에 흩어진 기자들이 이 문건을 기반으로 심층 취재를 해온 기간은 결코 짧지 않았다. 이 문서로의 접근은 매우 비밀스럽고 철저한 암호화를 통해 보호돼 있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참여 기자 누구든 정보를 볼 수 있고 서로 정보를 자유롭게 주고받을 수 있도록 개방돼 있었다.

쥐트도이체차이퉁 오버마이어 기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는 생각에 매우 예민해지기도 했다”며 “곳곳에서 ‘대규모 정보 유출이 있을 것’이라는 루머가 나온 적은 있지만 데이터 원 소스가 새어나가진 않았다”고 말했다.

대규모 내부 자료를 공개한다는 점에서 ICIJ를 위키리크스와 비슷한 조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ICIJ는 위키리크스처럼 입수한 모든 데이터를 완전히 공개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자칫하면 무고한 개인정보까지 노출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제라드 라일은 “우리는 위키리크스와 달리 책임감 있는 저널리즘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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