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예산영화 《범죄의 여왕》, 블록버스터도 제공하지 못하는 그 무언가가 있다
  • 허남웅 영화평론가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8.26 13:44
  • 호수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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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록버스터 ‘빅4’의 극장가 점령 속에서도 주목받는 이유

지금 극장가는 블록버스터 천지다. ‘여름 빅4’인 《부산행》이 이미 천만 관객을 찍었고, 《인천상륙작전》과 《덕혜옹주》와 《터널》이 순서를 바꿔가며 박스오피스 1위 자리를 나눠 갖고 있다. 성수기 시장이란 게 그렇다. 큰 영화 등쌀에 작은 영화가 기를 펴기 힘들다. 이렇듯 작은 영화의 ‘보릿고개’ 시기에 겁 없이 개봉에 뛰어든 영화가 있다. 이요섭 감독의 《범죄의 여왕》이다. 

 

미경(박지영)은 시골에서 미용실을 운영한다. 아줌마들 머리를 볶아주는 와중에 ‘야메’로 성형시술도 병행한다. 서울 신림동에서 고시를 준비 중인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서다. 아들이 검사만 된다면야 못할 게 없는 한국의 엄마라지만, 어느 날 들어주기 힘든 요구에 직면한다. “엄마 수도요금 수납하게 120만원 보내줘.” 12만원도 비싼데 120만원? 그것도 수도요금으로? 엄마 왈, “아들, 이 문제는 내가 해결할게. 너는 며칠 남지 않은 사법고시 공부에만 집중해.” 그냥 돈이나 보내달라는 아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기어이 신림동 고시원으로 상경한 미경. 아들에게 오랜만에 밥 한 끼를 차려준 즉시 아들의 옆방부터 시작해 고시원 구석구석을 들쑤시고 다닌다. 그리고 내린 결론, “범인은 이 안에 있어.”

 

억울한 누명을 쓴 아들을 위해 엄마가 나서는 이야기는 봉준호 감독이 《마더》(2009)에서 선보인 바 있다. 익숙한 콘셉트임에도 《범죄의 여왕》이 새롭게 느껴지는 건 극 중 ‘마더’ 미경이 보여주는 모성애가 단순히 자기 자식을 향한 맹목적인 희생이 아닌, 고시원 모두에게로 향하는 관심인 까닭이다. 

 

프로급 오지라퍼라 불릴 만한 넉살 좋은 성격에 아들을 위해서라면 쪽 팔릴 것도 못할 것도 없는 대한민국 대표 아줌마 ‘미경’ © 콘텐츠판다


‘누구의 엄마’도 아닌 ‘모두의 엄마’로

 

사실 고시원은 지금의 청년 세대를 이야기할 때 외면해선 안 되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누군가는 성공해야만 인간 취급을 받는 한국사회에서 고시 합격을 위해, 또 어떤 이는 최저 임금으로는 마땅히 살 집을 찾지 못해 최소한의 돈으로 지친 몸을 누이기 위해, 2~3평 남짓한 박스 같은 공간에서 적게는 몇 달, 길게는 10년 넘게 청년 시절을 저당 잡히고 있다. 지금의 청춘이 처한 현실을 대변하는 중요한 공간임에도 메이저 영화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는 이유는 공간 특성도 그렇거니와 그 안에 있는 이들의 사연이 어둡다는 편견 때문이다. 많은 관객을 극장으로 유도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혹할 만한 배경과 캐릭터와 이야기가 선행돼야 한다는 것이 대다수 제작사의 입장이다. 고시원과 같은 장소를 가지고서는 밝은 이야기를 뽑아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 지금 한국영화계에 절대적으로 부족한 청춘영화의 부재는 그와 같은 기성의 무관심이 작용한다.  

 

《범죄의 여왕》이 고시원을 다루면서도 엄마 역할을 중요하게 다루는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미경은 엄마 중에서도 주변에 대한 관심, 그러니까 ‘오지랖’이 넓은 캐릭터다. 사법고시가 며칠 남지 않아 모두가 예민한 가운데서도 아들의 수도요금 120만원의 실체를 밝히겠다며 엄마는 고시원 게시판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다. 

 

‘안녕하세요. 404호 엄마입니다. 다들 공부하느라 힘드시죠? 모두들 수도요금을 어떻게 내시나요? 함께 모여 얘기합시다. 다들 제 자식 같아서 밥 한 끼 먹이고 싶네요.’ 이 글에서 방점은 ‘밥 한 끼 먹이고 싶네요’다. 우선은 자기 자식의 수도요금을 해결하기 위해서이지만, 밥을 대접하겠다는 마음가짐은 아들 이외의 타인을 향한 또 다른 관심의 표명이다. 이들에게서 어떻게든 호감을 얻어 사건 해결의 단서를 얻겠다는 것. 이는 곧 ‘고시원’과 ‘엄마’와 같은, 한국영화가 그동안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요소를 가지고 어떻게든 관객을 유혹하겠다는 이요섭 감독의 태도와 일맥상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고시에 관해서라면 모르는 것이 없는 전문가이자 301호에 거주하는 괴짜 고시생 ‘덕구’


방에 콕콕 처박혀 나오지 않는 고시원 사람들을 삼겹살로 유혹하려는 미경처럼 이요섭 감독은 익숙하지 않은 캐릭터와 배경을 관객들이 혹할 만한 장르로 접근한다. ‘수도요금 120만원의 실체는 무엇인가’를 마치 탐정으로 빙의한 듯 조사하는 미경의 행동은 추리물을 연상시킨다. 검사로, 판사로, 변호사로 성공하겠다는 의지는 강하지만, 몇 년째 사법고시에 합격하지 못해 까맣게 타버린 마음을 어두컴컴한 고시원으로 형상화한 연출은 누아르를 닮았다. 그리고 ‘개같이 태어났다’고 ‘개태’(조복래)로 불리는 고시원 관리소 직원과 미경이 짝을 이뤄 사건을 해결하는 전개는 버디 무비의 변형처럼 느껴진다. 

 

《범죄의 여왕》은 순제작비가 4억원에 불과하지만, 장르 친화적인 접근 탓에 저예산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세련된 완성도를 자랑한다. 이는 큰 영화만이 대중의 관심을 받고 박스오피스에서 흥행에 성공하는 한국영화계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이다. 제작비가 100억원을 호가하는 블록버스터는 결코 실패해서는 안 되는 규모이기 때문에 새로운 아이디어에 목매기보다는 기존에 성공한 요소를 따라 하려는 속성을 갖는다. 그래서는 발전이 없다. 《범죄의 여왕》이 반가운 이유다. 다만 저예산의 독립영화는 블록버스터처럼 스크린 수를 많이 잡을 수 없으므로 관객의 적극적인 관심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모든 관계라는 것이 그와 같다. 관심이 없어서는 이 세상이 밝아지기 힘들다. 고시원 사람들이 스스로 고립을 자초한 것 같아도 실은 이 사회가 이들을 한데로 몬 것과 다름없다. 성공이 아니면 관심도 두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고시를 준비하는 이들은 실패를 거듭할수록 관계 맺기가 더욱 힘들어진다. 이럴 때 필요한 게 관심이다. 처음엔 미경의 호의를 무시한 이들도 시간이 갈수록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다. 결국 미경의 활약에 수도요금 120만원의 실체를 확인하지만, 이는 미경의 단독이 아닌 고시원 ‘식구’들이 모두 힘을 합한 결과다. 그처럼 영화 역시 블록버스터, 작은 영화, 청춘물 등 규모에 상관없이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멀티플렉스에서 서로 어깨동무를 할 수 있는 환경이 가장 이상적이다. 블록버스터가 제공하지 못하는 색다른 재미와 메시지와 무엇보다 개성이 《범죄의 여왕》에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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