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위기 속 멋내기 한창인 평양 여성들
  • 이영종 중앙일보 북한전문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8.23 15:34
  • 호수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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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Insight] 방북 교포들 “北 매체의 긴박한 보도와 세련된 패션의 평양 주민 모습 딴판”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괌 포위타격’ 위협으로 8월 한반도 위기지수는 정점으로 치달았다. 전략군사령부의 작전계획을 보고받는 장면을 관영매체로 내보내며 “모든 준비를 마쳤다”는 메시지를 던진 북한은 잠시 숨고르기에 들어간 형국이다. 하지만 일촉즉발로 치달았던 ‘반미 대결전’의 고삐를 늦출 기세는 보이지 않는다. 대규모 결사항전 군중집회와 청년들의 입대탄원 등의 소식이 관영매체에 넘쳐난다. 긴장 수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내부적으로 체제 결속과 김정은에 대한 충성심을 높이는 데 활용하려는 의도도 드러난다. 무엇보다 한·미 연합 군사훈련인 을지프리덤가디언(UFG) 연습을 두고 “조선반도(한반도) 정세를 더욱 파국에로 몰아갈 것”이라고 주장한 만큼 당분간 북한 내부는 팽팽한 긴장감을 이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눈길을 끄는 건 이런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평양 여성들의 옷차림과 헤어스타일에 나타나고 있는 변화다. 의상은 물론 핸드백과 구두 등에서 세련된 패션 감각을 드러내는 모습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는 게 북한을 방문한 해외교포 인사들의 전언이다. 대북 선제타격 위협을 거론하며 ‘김정은 결사옹위’를 주장하는 북한 매체들의 긴박한 분위기와는 딴판이란 얘기다. 미주 지역에 거주하는 한 여성 인사는 “위기가 한창일 때 평양에 체류했는데 노동신문과 북한 TV에서 전하는 분위기와 호텔이나 커피숍·쇼핑센터에서 접하는 평양 주민들의 모습은 차이가 있었다”고 말했다.

 

최근 평양 고려호텔 앞에서 촬영된 북한 여성들 © 사진=Sejin Pak 페이스북

 

방북객들 “서울 강남 패션과 구분 안 될 정도”

 

방북객들은 일부 특권층에 해당하는 경우일 수 있지만 서울 강남 지역 여성들의 패션 스타일과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수준이 높아졌다고 입을 모은다. 평양 중심가 고려호텔 앞에서 촬영된 한 그룹의 여성들은 최신유행의 옷차림에 해외 명품가방과 구두·액세서리로 멋을 낸 상태였다고 한다. 또 일반 직장여성들의 경우도 올여름 한국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한 스타일의 샌들을 착용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얘기다. 평양에서도 최신형 스마트폰과 생수병은 유행을 아는 세련된 여성을 보여주는 상징물처럼 자리 잡았다는 말도 흘러나온다.

 

이 같은 모습을 두고 일반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전쟁위기 및 동원체제와는 동떨어진 부유층과 특권층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노동당과 군부의 고위간부나 외교관, 해외 대표부 주재원 등의 부인이나 딸들을 중심으로 패션과 헤어스타일 등에 눈뜨기 시작했기 때문이란 얘기다. 이들 계층은 각종 이권에 개입해 막대한 부와 권력을 차지하고, 해외 근무나 출장 기회를 통해 해외 명품과 패션 스타일에 관심을 갖게 됐을 것이란 관측이다. 뇌물을 통해 고가의 패션 아이템 구매가 가능하고, 이런 물품들을 뇌물로 바치는 구조가 가동하고 있다는 해석도 있다. 또 긴장이 이어지는 사회적 분위기에 억눌린 여성들이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을 표출하는 것이란 진단도 있다. 경기가 불황에 접어들수록 립스틱 판매가 증가하는 양상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2012년 김정은 집권 이후 북한 여성들이 패션 스타일에 본격적으로 눈을 뜨기 시작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젊은 지도자 김정은의 경우 북한 주민들이 상상하지 못했던 투 블록 스타일의 머리 모양새를 하고 등장해 해외에서까지 관심을 보일 정도였다. 무엇보다 김정은의 부인 리설주의 등장은 북한 여성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염색을 한 짧은 머리에 세련된 옷차림, 하이힐에 최신 명품 클러치백을 든 모습은 유행을 이끌었다. 고위 여성 탈북인사는 “살 만큼 산다 하는 여성들 사이에서는 ‘그녀가 입으면 패션이 된다’는 말을 실감할 정도였다”고 전했다.

 

 

“여성 패션 변화, 일부 특권층·부유층에 국한”

 

이런 분위기는 천편일률적인 여성 패션 스타일이 자리 잡았던 과거와는 확 달라진 양상이다. 강력한 사회통제 시스템에 경제난까지 지속되면서 옷이나 머리치장에 돈과 시간을 쓴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1970년대 말까지만 해도 북한 주민들의 옷차림은 검은색, 흰색 등 주로 단색이었고 그 형태도 천편일률적이고 단조로웠다. 조금이라도 화려하고 사치스럽거나 색다른 옷차림은 ‘자본주의 부르주아 날라리 풍조’로 치부됐다. 조직적인 통제를 받았고 주변 사람들의 눈총과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1989년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 평양에서 개최된 걸 계기로 변화의 바람이 불었고 1990년대 들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여성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파마머리가 유행하기 시작한 게 그 첫걸음이었다. 당시 대중잡지에서는 “학교를 졸업한 후 사회에 갓 진출한 여성은 머리를 살짝 지져 밑머리만 파마기가 있게 하고 머리에 핀이나 띠로 단장해 앳되게 보이게 하는 것이 좋다”는 기사가 등장했다. 초보적 형태의 패션쇼가 평양에서 열리고 북·중 국경을 통해 한류문화가 북한 젊은 층 틈을 파고들면서 남한의 옷차림과 헤어스타일 등이 은밀하게 유행을 선도했다.

 

김정은이 집권 이후 여성들의 멋내기 문제를 각별히 챙기고 있는 모습도 드러난다. 2년 전에는 평양화장품공장 생산라인을 방문한 김정은이 눈화장에 쓰이는 마스카라를 살펴보다가 “하품만 해도 너구리 눈이 된다”고 지적했다는 북한매체의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물기에 약해 화장이 번지면 눈 주위가 검게 얼룩지는 문제를 ‘너구리’에 비유해 언급한 것이다. 김정은은 “외국의 아이라인, 마스카라는 물속에 들어갔다 나와도 그대로 유지된다”고 말하며 북한 화장품의 질 문제를 지적했다. 그가 세계적으로 이름난 여성 화장품 브랜드를 줄줄 대기도 했다는 게 북한 매체들의 보도인 걸 보면 부인 리설주의 조언 등으로 나름의 지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최근 평양을 중심으로 불고 있는 북한 여성들의 패션 변화는 일부 특권층과 부유층에 국한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정부 당국은 북한 주민 2500만 명 중의 1% 수준인 24만~25만 명이 특수계층에 해당한다고 판단한다. 아직도 식량난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주민들이 적지 않고 탈북행렬에 나서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반도 위기설까지 촉발시킨 긴장감 속에서 패션 스타일에 각별한 관심을 쏟는 북한 상류층 여성들의 모습이 던지는 메시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나온다. 북한의 엘리트 계층을 중심으로 외부세계에 눈뜨고 있고, 김정은 체제에서 이탈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아름다워지고 싶은 여성의 욕망을 누르기는 쉽지 않을 것이란 진단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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