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재판도 안 끝났는데 범죄자 낙인찍다니…
  • 이민우·김종일 기자 (mwlee@sisajournal.com)
  • 승인 2018.05.01 04:09
  • 호수 1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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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10년간 피의사실 공표죄 기소 ‘0건’…“대책 마련한다더니 그대로”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후략)”

 

2009년 5월23일, 한때 대한민국의 최고 권력자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 같은 유서를 남긴 뒤 봉하마을 자택 뒷산 부엉이바위에서 몸을 던졌다. 노 전 대통령을 비참한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방아쇠는 바로 검찰의 ‘망신주기식’ 피의사실 공표였다. 시계를 논두렁에 어쨌다는 둥 하는 식의 보도가 이어졌고, 노 전 대통령은 그런 현실을 버틸 수 없었다.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이듬해, 민주당(현 더불어민주당)은 노 전 대통령 수사 때 피의사실 공표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 검찰 수사팀을 고발했다. 이에 검찰은 노 전 대통령 수사팀의 잘못이 없다며 기소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검찰은 “수사팀이 정례 브리핑 등에서 노 전 대통령의 피의사실을 일부 공표한 것은 인정된다. 그러나 그 목적이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며, 공표한 사실이 진실한 사실이라고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어 위법성 조각사유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 것은 몇 년이 흐른 뒤였다. 이른바 논두렁 시계 내용이 조작됐고 국가정보원 간부가 개입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노 전 대통령의 수사를 주도했던 이인규 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에 따르면, 국정원 간부는 ‘원세훈 전 원장의 뜻’이라며 “노 전 대통령을 불구속 기소하면서 노 전 대통령이 고가의 시계를 받은 사실을 언론에 흘려 도덕적 타격을 주자”고 제안했다. 이 같은 내용이 사실이라면 사실상 정치적 필요에 따라 피의사실 흘리기를 적극 활용했다는 의미가 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른바 ‘논두렁 시계’ 등의 보도로 고통을 받다가 끝내 몸을 던졌다. 이 과정에서 국가정보원 개입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 주간사진공동취재단


 

논란의 ‘범죄자 낙인찍기’ 현재진행형

 

최근 김경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둘러싼 댓글 조작 논란이 뜨겁다. 이 과정에서 경찰은 김 의원이 ‘드루킹’ 필명을 사용한 김아무개씨에게 2016년 11월부터 지난해 10월까지 11개월 동안 보낸 인터넷 주소(URL)를 공개했다. 앞서 김 의원은 “후보에 관해 좋은 기사, 홍보하고 싶은 기사가 올라오거나 하면 제 주위에 있는 분들한테 그 기사를 보내거나 한 적은 꽤 있었다. 그렇게 보낸 기사가 혹시 드루킹에게도 전달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스스로 밝혔다. 하지만 경찰은 드루킹이 불법 매크로를 통해 댓글을 조작한 혐의를 받고 있는 시점에 김 의원이 보낸 URL을 공개함으로써, 마치 김 의원이 불법 매크로를 통한 댓글 조작을 지시한 것처럼 인식하도록 만들었다. 추미애 민주당 대표는 4월23일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경찰이 수사 내용을 찔끔찔끔 흘리고, 특정 언론을 중심으로 의혹을 증폭시키는 방식이 계속되고 있어 매우 유감”이라고 비판했다.

 

피의사실 공표 대상은 특정 진영에 한정돼 있지 않다. 현재 구속 상태인 이명박 전 대통령도 망신주기식 수사 결과 흘리기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김윤옥 여사가 2007년 대선 직전 사업가로부터 돈다발이 담긴 명품백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검찰 관계자는 기자들과 만나 “(이 전 대통령이) 국정원 자금 관련 부분 중 원세훈 전 국정원장으로부터 김희중 전 청와대 제1부속실장을 통해 10만 달러(약 1억700만원)를 받은 사실 자체는 인정한다”고 밝혔다. 이 전 대통령 큰형인 이상은씨 명의의 도곡동 땅 판매대금 중 67억원을 논현동 사저 건축대금 등으로 사용한 사실관계를 인정했다고도 했다. 빌린 돈이라는 해명과 무관하게 이 전 대통령은 법원의 판결 전 이미 범죄자가 돼 있었다. 김영우 자유한국당 의원은 “과거 MB(이명박) 정부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박연차 게이트 수사 때도 검찰의 모습(피의사실 공표)은 굉장히 잘못된 수사 행태였다”며 “문 대통령께서 당시 노 전 대통령의 변호인이었고, 원하는 대로 조사가 이뤄지지 않는다고 해서 검찰에서 자꾸 피의사실을 공표하지 말라는 얘기를 했다”고 꼬집었다. 정세균 국회의장도 “과거의 바람직하지 않은 (수사) 모델이 재판(再版)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고 말했다.

 

정치인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지난 3월19일 경찰 수사를 받던 광주시 공무원은 “수사관님, 누구 지시를 받고 피의사실을 언론에 흘렸나요”라는 유서를 남긴 뒤 공원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광주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의 말을 인용한 보도가 이어진 직후였다.

 

드루킹 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은 불법성과 무관하게 김경수 의원이 보낸 인터넷 주소 등 수사상황을 공개했다. © 시사저널 박은숙


 

‘피의사실 공표’ 檢警, ‘제 식구 감싸기’ 여전

 

대형 사건마다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피의사실 공표 논란. 검찰이나 경찰은 스스로에게 떳떳할 수 있을까. 시사저널은 오신환 바른미래당 의원실에 의뢰해 법무부로부터 피의사실 공표죄 사건 처리현황을 받아 봤다. 그 결과, 최근 10년간 피의사실 공표죄로 기소된 건수는 단 한 건도 없었다. 피의사실 공표죄로 고소·고발한 경우가 없었을까. 그건 아니었다. 2008년부터 올해 1월까지 접수된 피의사실 공표죄 관련 사건은 341건(송치사건 포함)이나 됐다. 처분 결과가 나온 사건 265건 가운데 228건(86%)은 모두 불기소 처분이 내려졌다. 불기소 처분이란 범죄 혐의가 인정되지 않거나 범죄 혐의가 약해 기소를 유예하는 처분을 의미한다. 나머지 37건(14%)은 기소중지·보호사건송치 등으로 처리됐다. 사실상 피의사실 공표죄로 고소·고발된 사람은 모두 면죄부를 부여받은 셈이다.

 

이에 대해 법무부는 “피의사실 공표 사건의 불기소 처분 이유는 범죄사실이 입증되지 않거나 사실오인 또는 법리오해로 고소·고발하는 경우가 다수이기 때문”이라며 “언론에 보도되는 중요 사건의 경우, 다수의 관련자들이 조사를 받거나 압수수색 등의 과정에서 사건 내용이 외부에 알려진 경우도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

 

피의사실 공표죄란 검찰·경찰 등이 범죄 수사 과정에서 인지한 피의사실을 공판청구 전에 공표함으로써 성립하는 범죄다. 1953년 형법 제정 때부터 규정된 내용이다. 무죄 추정 원칙의 적용을 받는 피의자의 인격권과 명예권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였다. 물론 예외 규정은 있다. 강력범죄나 성폭력을 저지른 피의자에 대해선 특례법에 따라 신상을 공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 특별검사법(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에선 사건 처리 결과를 보고하도록 돼 있다.

 

문제는 과거 전직 대통령들에게 가해진 ‘망신주기식’ 수사 결과 발표는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기에선 ‘진실한 사실로서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 관한 사안으로 봐 위법성이 조각될 가능성이 있다’는 형법 제310조가 면죄부 조항으로 작용됐다. 그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당시엔 사실로 믿고 있었고, 공인에 대한 혐의는 ‘공공의 이익에 관한 사안’이라며 빠져나갈 구멍을 만든 셈이다. 정식 브리핑이 아닌 기자에게 피의사실을 ‘누설’하는 것이 ‘공표’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점도 작용했다.

 

개선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 과정에서 피의사실 공표 문제가 논란이 됐을 때다. 검찰은 2010년 4월 ‘인권보호를 위한 수사공보준칙’을 제정했다. 수사 관련 내용을 공개하지 못하도록 하되 △중대한 오보 또는 추측성 보도를 방지할 필요가 있는 경우 △범죄 피해의 급속한 확산 또는 동종 범죄의 발생이 심각하게 우려되는 경우 △공공의 안전에 대한 급박한 위협이나 그 대응조치에 대해 국민들이 즉시 알 필요가 있는 경우 △범인의 검거 또는 중요한 증거 발견을 위해 정보 제공 등 국민들의 협조가 필수적인 경우에 한해 수사 결과를 공개하도록 했다. 대법원도 2010년 6월 ‘인신구속사무의 처리에 관한 예규’ 개정을 통해 기자들의 체포·구속영장 열람을 금지시켰다. 하지만 수사공보준칙은 법무부 훈령으로 법률상 근거 규정이 없고 특별한 제재 규정도 없다는 한계가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을 둘러싼 수사 상황이 여러 차례 공개됐다. 이 전 대통령에게도 무죄 추정의 원칙은 지켜지지 않았다. © 시사저널 박은숙


 

외국은 명예훼손죄·법정모독죄 적용하기도

 

일본은 수사기관의 공표 행위로 인해 피의자의 명예가 훼손된 경우 일반인과 똑같이 명예훼손죄를 적용하도록 하고 있다. 다만 해당 내용이 진실한 사실로, 공익을 위한 목적이 있을 때엔 벌하지 않는 것으로 예외 규정을 적용하고 있다. 영국은 해당 사건의 공정한 수행을 저해하거나 편견을 주게 될 언론보도에 대해선 법정모독죄로 처벌하고 있다. 미국은 연방법무부에서 마련한 업무지침에 따라 수사기관의 브리핑 원칙을 명확히 하고, 이를 위반하면 명예훼손죄로 처벌하거나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을 지도록 하고 있다. 독일도 공소장 전체 또는 일부를 공개하는 행위를 처벌하고 있다.

 

국회 차원에서도 대안 마련을 시도했지만 법제사법위원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피의사실 공표에 대한 위법성 조각 사유를 형법에 규정하는 개정안들이 18대·19대 국회에서 발의됐다. 앞서 검찰이 마련한 수사공보준칙의 예외 규정을 법률에 담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법률가 출신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법사위에서 개정안은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못했다. 검사가 피의사실 공표죄 사건에 대해 불기소 처분을 했을 경우, 재정신청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개정안도 19대 국회에 제출됐지만 역시나 처리되지 못했다. 

법무부는 “앞으로 무죄 추정 원칙에 근거한 사건관계인의 인권 및 국민의 알 권리가 조화될 수 있도록 ‘인권보호를 위한 수사공보준칙’을 철저히 준수하고, 이를 위반한 비위에 대해선 철저한 조사를 통해 엄정 조치하도록 검찰을 지속적으로 지도·감독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사실상 피의사실 공표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입버릇처럼 반복하던 공허한 말이었다. 

 

정치권은 때때로 피의사실 공표를 부추기기도 한다. 자유한국당 지도부는 경찰이 김경수 의원을 둘러싼 의혹에 대해 부실수사를 하고 있다며 수사팀을 압박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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