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메이커》로 들여다본 한국 정치의 흑역사
  •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2.05 15:00
  • 호수 1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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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와 충무로가 ‘킹메이커’를 그려내는 방법
민감한 대선 앞두고 영화 개봉해 더 주목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로 나선 도널드 트럼프의 도발적 언행으로 미국 정가가 바람 잘 날 없었던 2016년. 당시 트럼프의 오랜 친구이자 비선 참모였던 ‘로저 스톤’을 둘러싼 여러 소문이 워싱턴을 강타했다. “캠프 고문이 로저 스톤이란 걸 알면 트럼프 캠페인이 이해된다.” “도널드 트럼프는 로저 스톤의 창조물이다.”

영화 《킹메이커》의 포스터ⓒ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제
영화 《킹메이커》의 포스터ⓒ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제공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킹메이커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줬던 일화다. 실제로 로저 스톤은 부동산 재벌에 불과했던 트럼프를 대통령에 당선시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우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로저 스톤의 이름이 대중의 입에 오르내리자, 넷플릭스는 아예 그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도 만들었다. 이름하여, 《킹메이커 로저 스톤》(Get Me Roger Stone, 2017). 로저 스톤의 40년 정치 인생을 다룬 다큐에는, 그가 펼친 희대의 선거 전략이 속속 들어차 있다. 승리를 위해 가짜뉴스를 살포하고, 네거티브 전술을 마다하지 않고, 물타기 전략으로 논점을 흐리는 그에겐 ‘더러운 협잡꾼’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그러거나 말거나 로저 스톤은 확신에 찬 어투로 말한다. “완전한 무명보다는 악명이 낫다.” “증오는 사랑보다 더 강한 동기 요인이다!” 다큐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네거티브 선거로 기록된 2016년, 로저 스톤이란 킹메이커가 있었음을 천명한다.

트럼프에게 로저 스톤이 있었다면, 빌 클린턴에겐 ‘제임스 카빌’이라는 킹메이커가 있었다. 1992년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선거 슬로건을 고안해 연임을 노리던 상대 후보 조지 H W 부시를 꺾는 데 기여한 인물. 당시 카빌이 이끈 선거 전략가들이 어떤 전쟁을 치렀는가는 클린턴 선거 캠프를 추적한 다큐멘터리 《워 룸》(The War Room, 1993)에 자세하게 담겨 있다. TV토론에 사용할 단어 하나에 머리를 쥐어뜯고, 피켓 이미지를 두고 예민하게 토론하고, 갑자기 터진 클린턴의 혼외정사 스캔들에 대응하느라 진땀을 빼는 모습이 그야말로 전쟁처럼 이어진다. 후보 뒤에 얼마나 많은 참모의 눈물과 한숨과 한탄이 서려 있는가를 새삼 돌아보게 하는 다큐다.

민주당 지지자로 유명한 할리우드 스타 조지 클루니는 아예 킹메이커를 내세운 영화를 직접 제작·연출하기도 했다. 국내에서 《킹메이커》라는 제목으로 개봉한 《The Ides Of March, 2011》이다. 후보 모리스(조지 클루니)에 대한 존경과 ‘선의의 정치’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정치판에 뛰어든 선거 참모 스티븐(라이언 고슬링)의 믿음이 어떻게 부서지는가를 비정하게 그려낸 영화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가 각성하는 지점까지 도달한다. 이때의 각성이란 디즈니식 해피엔딩이 아니다. 스티븐이 모리스의 약점을 쥐고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으로 나아가며 정치가 한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를 날 서게 해부한다.

영화 《킹메이커》의 한 장면ⓒ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제공

한국의 전설적 킹메이커 엄창록을 소환한 《킹메이커》

할리우드뿐 아니라, 한국 역시 대선 때가 되면 여의도와 충무로가 유독 가까워진다. 그러나 선거를 집중해서 다룬 영화가 드물었던 게 사실. 이 중에서도 킹메이커를 전면에 내세운 사례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설경구·이선균 주연의 《킹메이커》를 솔깃한 심정으로 바라보게 되는 건 이 때문이다. 게다가 《킹메이커》는 코로나19로 개봉이 밀리면서 의도치 않게 대선을 앞두고 관객을 만나게 됐는데, 이 또한 이 영화의 운명이라고 하면 너무 거대할까. 정치가 예측 불가능한 영역이듯 영화 개봉 역시 그러하다.

변성현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킹메이커》에는 너무나 유명한 한 남자와 그의 그림자였던 또 한 남자가 등장한다. 전자는 한국 정치의 거목인 고(故) 김대중(DJ) 대통령, 그런 DJ의 1970년대 책사로 활약한 엄창록이 후자다. ‘킹’이 아닌 ‘킹메이커’를 내세운 영화니만큼, 후자에 호기심이 생기는 건 일견 당연하다. 엄창록에 대해 알려진 게 많지 않다는 사실도 궁금증을 부추긴다. 그렇다면 엄창록은 누구인가. 지역 선거에서 연거푸 낙선하던 DJ가 처음으로 당선의 꿈을 이룬 것은 1961년이었는데, 이때가 바로 엄창록이 DJ와 연을 맺어 지원사격한 해다. 이후 엄창록은 DJ의 참모로서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와 1971년 당내 경선에서 DJ가 당선되는 데 큰 역할을 하며 능력을 입증해 보인다.

자료를 찾아보면, 그에 대한 당시 정치인들의 반응은 유별난 구석이 있어 보인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의 원작이기도 했던 동명의 소설에서 엄창록은 ‘여당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김대중의 조직 참모’로 기술돼 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조차 엄창록의 전술을 따로 정리해 윗분에게 보고했다고 하니, 그를 향한 당시 시선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된다. 이종찬 초대 국정원장은 자신의 회고록 《숲은 고요하지 않다》에서 ‘여당이 엄창록을 포섭해 회유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 역시 짚이는 부분이다.

변성현 감독은 DJ와 엄창록의 서사에 상상력을 더해 정치인 ‘김운범(설경구)’과 선거 전략가 ‘서창대(이선균)’라는 인물로 재가공해 냈다. 엄창록이 왜 ‘한국 네거티브 선거 기법의 원조’로 꼽히는가도 영화는 흥미롭게 묘사한다. 가령 이런 것들이다. ①상대 진영 선거운동원으로 가장해 비호감 사기 ②푼돈을 상대방 후보 이름으로 돌리기 ③물품을 줬다가 뺏으며 역시 상대편 캠프 이름 대기. 영호남 지역감정의 시발점에 엄창록이 있었다는 점 역시 영화는 추적한다.

ⓒ시너지 제공
국내에서 《킹메이커》라는 제목으로 개봉한 《The Ides Of March, 2011》의 한 장면ⓒ시너지 제공

권력의 허상과 반전 다룬 《언프레임드》

전작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2017)이 그랬듯 변성현 감독은 이번에도 두 남자의 관계성, 더 나아가 브로맨스에 관심을 드러낸다. 《킹메이커》에서 브로맨스를 위협하는 요소는 ‘신념 차이’다. “정의가 바로 사회의 질서”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인용하는 김운범에게 서창대는 플라톤의 말을 소환해 받아친다. “정당한 목적에는 수단을 가릴 필요가 없다.” 두 인물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차가 흥미롭고, 디테일이 살아있는 시대 구현도 볼 만하다. 다만 정의에 대한 질문이 너무 예상 가능한 선에서 교과서적으로 그려진 건 아쉬운 대목이다. 두 인물의 비중을 균등하게 살피는 과정에서 서창대의 심리 변화가 다소 희생되면서, 후반부 긴장감이 충분히 쌓이지 못한 점도 눈에 밟힌다.

일련의 정치 관련 콘텐츠들을 보다 보면 문득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긴다. 인간은 과연 정치적 동물인가. 언제 인간은 정치에 눈을 뜨는가. 이에 대한 흥미로운 질문은 왓챠의 쇼트 필름 프로젝트 《언프레임드》(2021)에서 배우 박정민이 메가폰을 잡은 단편영화 《반장선거》에서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반장선거》는 한 초등학교 교실의 반장선거 풍경을 담은 초등학생 누아르. 어린아이들 선거라고 해서 얕보면 안 된다. 이 반장선거에는 회유와 조작, 권모술수, 선거 관리인 매수 등이 난무한다. 권력의 허상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민심(반 친구들의 여론)의 놀라운 반전도 있다. “아이들이 순수하다는 관념을 조금 비트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는 연출 의도가 이 세계에 던지는 질문은 묵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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