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과 귀, 마음마저 치명적으로 사로잡았던 배우 이선균
  • 전찬일 영화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12.30 11:05
  • 호수 1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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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이선균, 그의 영화와 인생

지난해 12월27일 배우 이선균이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극단적 선택으로 이 세상을 뜬 것이다. 의도 여부와 상관없이 마약 투약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자신의 처지가 안겨준 수치스러움 때문인지, 세 차례의 강도 높은 경찰 조사를 받으면서 그토록 강변했던 억울함 때문인지, 속성상 그러기 십상인 유튜브 세계는 말할 것 없고 공익성을 내세우는 소위 레거시 미디어까지 가세한 과도한 사생활 까발리기로 인한 좌절 때문인지, 유서가 전하듯 사랑하는 가족과 가까운 지인들에게 더 이상의 고통을 안기고 싶지 않다는 미안함 때문인지…. 그 죽음의 원인에 대해서는 그저 추측할 따름이다.

ⓒ시사저널 박정훈

TV와 영화 넘나들며 최상위 경지 등극

내 나름의 직간접 원인을 피력하고 싶지만, 그 추측에 합세하진 않으련다. 다만 나 역시 대한민국 검경의 무분별·무리한 연예인 마약 수사나 언론플레이에 크고 작은 책임 소재가 있는 게 아니냐는 정도의 문제 제기는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에 해야 할 일은, 그런 비판보다는 영화 비평가로서 이선균 그가 과연 어떤 배우였는지를 톺아보는 작업이 아닐까 싶다.

먼저 지난해 제76회 칸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인 두 영화에 대해 언급해야겠다. 유재선 감독의 《잠》과 김태곤 감독의 《탈출: PROJECT SILENCE》이다. 《잠》은 칸의 비공식 병행 섹션 중 하나인 비평가 주간 경쟁작으로 성황리에 선보였다. 수면 도중 이유를 알 수 없는 이상행동을 보이는 남편 현수(이선균 분)와 임신한 아내 수진(정유미)이 그 ‘비밀’을 풀기 위해 분투하는 수준급 스릴러성 공포·가족 드라마다. 심심치 않게 배치된 유머를 곁들인 촘촘한 긴장감으로 전개되는 영화는 150만에 근접하는 흥행 성적을 올리며 2023년 한국 영화 박스오피스 10위, 종합 순위 22위에 올랐다.

영화의 주된 성공 요인은, 무엇보다 두 주연배우의 호연이다. 배역을 더 이상은 불가능하리만큼 실감 가득 해석·소화해 냈다. 다른 지면에서도 이미 짚었듯, 그들의 연기를 음미하는 맛이 여간 짙지 않다. 생활 연기 같은 편안함과 고도의 집중력을 발산하는 폭발성을 동시에 구축한다. 특히 현수가 냉장고 문을 열고 생고기와 날생선 등을 꺼내 먹는 장면은, 《올드보이》(박찬욱 감독)에서 오대수(최민식)가 생문어를 씹어먹는 그 유명한 장면에 비길 만큼의 섬뜩한 감흥을 안겨준다.

비경쟁 미드나이트 스크리닝 부문에서 공식 선보인 《탈출》도 성황리에 상영됐다. 200억원 가까이 투하된 대작으로, 한 치 앞도 분간되지 않는 짙은 안개 속 붕괴 위기의 공항대교에 고립된 사람들이 예기치 못한 연쇄 재난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극한의 사투를 벌이는 스릴러물이다. 불가능하진 않아도 개봉 여부가 ‘불투명’한 영화에서 이선균은 공항에서 딸(김수안)을 배웅하다 일생일대의 재난을 맞닥뜨리는 대통령 보좌관 차정원 역으로, 특유의 존재감을 뽐낸다. 개봉이 불투명하기는 천만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2012)의 추창민 감독이 연출한 《행복의 나라》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 현대사를 뒤흔든 사건 속에 휘말린 한 군인과 그를 살리기 위해 전력투구하는 변호사 등의 치열한 드라마를 그린 영화에서 이선균은 강직한 군인 박태주로 분했다.

배우 이선균이 이 땅의 여느 대다수 배우와 다른, 그만의 강점은 TV와 영화 양 분야에서 공히 최상의 경지에 등극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이십여 년의 길지 않은 커리어에서 말이다. 그 점에서 이선균과 비교될 수 있는 배우는 거의 없다. 이병헌 정도? 시청 여부와 상관없이 우리는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2018)에서 이선균이 불러일으켰던 일대 센세이션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아이유와 더불어 그는 당시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김명민이 주도하긴 했어도, ‘대한민국 방송 역사상 최고의 인기를 누린 의학 드라마’였다는 MBC 《하얀 거탑》(2007)에서도, 공유·윤은혜 등과 3분했던 MBC 로맨스물 《커피프린스 1호점》(2007)에서도 그의 인기·활약상은 단연 큰 주목감이었다.

영화로 시선을 옮기면, 이선균이란 존재를 확고히 굳힌 터닝포인트는 2014년 또 하나의 칸 병행 섹션 감독 주간에서 선보인 김성훈(《터널, 2016》, 《킹덤, 2018》, 《비공식작전, 2023》) 감독의 《끝까지 간다》였다. 팽팽한 긴장감으로 내달리는, 탄탄한 플롯의 웰메이드 범죄 액션물. 어머니 장례식 날, 실수로 사람을 치어 죽이고 그 사고를 숨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다혈질 형사 고건수 역으로, 희대의 빌런 박창민 역 조진웅과 함께 최상의 연기력을 과시한다. 그 연기 몰입력과 집중력 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할까.

박찬옥 감독의 《파주》(2009)나 변영주 감독의 《화차》, 민규동 감독의 《내 아내의 모든 것》(이상 2012) 등 그 전작들에서도 인상적 열연을 펼쳤으나, 《끝까지 간다》에는 다소 미치지 못했다. 《성난 변호사》(허종호, 2015), 《임금님의 사건수첩》(문현성, 2017), 《미옥》(이안규, 2017), 《악질경찰》(이정범, 2019), 그리고 생애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을 《기생충》도 그렇다. 다들 ‘좋은 배우’였음은 틀림없으나, 《끝까지 간다》의 ‘압도적 배우’로까지 그를 비상시키진 못했다.

 

《끝까지 간다》로 연기 인생 터닝포인트

변성현 감독의 《킹메이커》(2022)를 기해 상황은 달라진다. 《끝까지 간다》를 압도하는 일생의 열연을 선사한 것. 이후 그 압도성은 《킬링 로맨스》(이원석, 2023)의 파격 변신을 거쳐 《잠》과 《탈출》에 이른다. 이른바 전성기를 구가하면서…. 《킹메이커》에서 눈과 귀는 말할 것 없고 내 마음마저 치명적으로 사로잡은 주인공은, 58회 백상예술대상 영화 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을 거머쥔 설경구가 아니라 이선균이었다. 그는 북한 인민군 심리전 담당 하사관 출신으로 한국전쟁 이후 한약재상으로 살다 1961년부터 정치인 김대중의 비서가 되고, 김대중이 1971년 대선 신민당 후보로 당선되게 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는 실존 인물 엄창록으로 현현(懸懸)한다. 그의 표정과 눈빛, 몸짓, 대사 등은 모든 측면에서 더할 나위 없이 입체적·복합적이다. 필자가 3년째 연재 중인 한 월간지 ‘배우 이야기’ 이선균 편에서 진단했듯, 이선균은 ‘괜찮은’을 넘어 ‘죽이는’ 배우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젖힌 것이다. 고인에게 깊은 조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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