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그래도 ‘나 몰라라’ 안 하겠죠?”…의사는 떠났지만 희망은 맴돌아
  • 정윤경·강윤서·공성윤 기자 (jungiza@sisajournal.com)
  • 승인 2024.02.23 12:30
  • 호수 179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빅5’ 전공의 집단사직 후 대혼란…환자 절규 가운데 간호사에 ‘업무 전가’하기도
면허 취소까지 예고한 정부와 파업으로 맞선 의료계…결국 “총선 앞두고 대타협할 것”

“나의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 의과대학을 졸업할 때 낭독하는 제네바 선언(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전신)의 한 구절이다. 이는 2월20일부로 무효가 됐다. 이날 필수의료 일선의 전공의들은 의대 정원 증원에 반발하며 환자를 남기고 병원 현장을 떠났다. ‘빅5 병원’(서울대·세브란스·삼성서울·서울아산·서울성모병원)에서는 환자들의 절규가 울려 퍼졌다.

20일 오전 6시. 전공의가 병원을 떠나고 처음 맞는 아침에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을 찾았다. 이른 시간임에도 병원은 채혈을 기다리는 환자들로 붐볐다. 간암 치료를 위해 대기줄에 선 주은미씨(58)는 전공의들의 집단 휴진에 대해 “불안한 마음이 크다”고 말했다. 그는 "나야 종양 덩어리가 커서 수술이 안 되는 상황이라지만 수술을 앞둔 암 환우들은 얼마나 걱정이 크겠는가”라고 우려했다. 주씨 남편 김태균씨(63)는 “전공의들이 ‘나 몰라라’ 할 사람은 아니지 않겠나”라며 현장 복귀에 대한 기대감을 내비쳤다.

같은 날 오전 8시. 서울아산병원에서는 구급차를 타고 이송된 응급환자들이 약 10분 간격으로 줄지어 들어왔다. 다음 달에 암 수술이 예정된 부인을 둔 남편 최대우씨(58)는 “암 진행 속도가 빨라 너무 불안하다"고 걱정했다. 임신 24주 차 오아무개씨(34)는 “병원에서 ‘당분간 추가 예약은 안 받겠다’고 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고 토로했다. 정부의 책임론도 제기됐다. 60대 정아무개씨는 "정부가 강압적으로 밀고 나가서 의사랑 대립만 커진 게 아닌가”라며 “어느 쪽 편을 들 수는 없지만 이제는 대화와 타협을 할 시기”라고 질타했다.

병원 측은 의료대란을 예상하고 미리 환자들의 양해를 구했다. 서울대병원에 소아정형외과 진료를 예약했다는 김아무개씨(26)는 전날 병원으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보여줬다. 여기에는 ‘진료가 매우 지연돼서 당일 내원한 모든 환자를 진료하지 못할 수 있다는 점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적혀있었다. 김씨는 결국 발걸음을 돌렸다.

빅5 병원 전공의들이 근무를 중단하기로 한 다음 날인 2월21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 전공의 집단사직을 규탄하는 대자보가 붙어있다. ⓒ 시사저널 최준필
빅5 병원 전공의들이 근무를 중단하기로 한 다음 날인 2월21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 전공의 집단사직을 규탄하는 대자보가 붙어있다. ⓒ 시사저널 최준필

온도차 느껴지는 의료진…”평소랑 똑같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남아있는 사람도 있었다. 한 소아환자의 보호자는 “여기저기서 진료를 거부당해 4시간 동안 아무것도 못 했다”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전신마취 수술을 앞둔 6세 딸의 손을 잡고 온 익명의 여성은 “수술이 연기될까봐 불안해서 밥도 제대로 못 먹었다”며 “자식 수술을 앞둔 부모 마음은 다 똑같이 무겁다”며 탄식했다.

상황을 대하는 환자들과 의료진 사이에선 간극이 느껴졌다. 아산병원 복도에서 만난 한 의사는 ‘전공의 집단사직으로 진료에 차질이 없느냐’는 질문에 “별 차이 못 느끼고 있다. 아직까지 평소랑 똑같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환자로 붐비는 인파를 뚫고 지나갔다. 응급의료센터로 이동하던 또 다른 의사는 “할 말 없다. 관심 없다”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다른 빅5 병원도 상황은 비슷했다. 삼성서울병원은 2월20일 기준 수술을 30% 줄였고, 강남 세브란스병원은 21일부터 절반으로 줄인 상태다. 서울성모병원도 비상체제에 돌입했다. 일각에선 간호사에게 부담을 떠넘기는 현장도 목격됐다. 케모포트(심장 근처 혈관까지 삽입하는 관) 주사는 원래 의사의 담당 업무인데, 21일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만난 일부 간호사는 “우리 병원에선 이미 (케모포트 주사를) 하고 있었다”고 실토했다.

정부와 의료계에 따르면, 2월19일 기준 빅5를 비롯한 전국 주요 수련병원 100곳에서 전공의 6415명이 사직서를 냈다. 전체 소속 전공의의 55% 수준이다. 당분간은 수술을 집도하는 교수진이나 전임의(펠로)가 의료 공백을 메운다지만, 허리 역할을 하는 전공의의 부재는 결국 업무 마비로 이어질 것이란 관측이 짙다. 더군다나 전국 82개 병원의 전임의들도 20일 “의업을 이어갈 수 없다”는 입장문을 내놔 의료 인프라 붕괴의 뇌관에 불이 붙은 상황이다.

이번 전공의 집단사직을 촉발한 의사 증원 정책은 국민적 명분은 얻은 상태다. 의사 증원에 찬성한다는 국민이 89%(보건의료노조 2023년 12월 설문조사)로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로 인한 의료대란까지 국민이 감내할 수 있다는 실증적 근거는 없다. 정부로서는 명분을 챙기면서도 위기를 수습해야 하는 상황이다. 해결책으로 꺼내든 건 강경책이다.

보건복지부는 2월 중순 대한의사협회(의협) 집행부에 의사 면허정지 행정처분에 관한 사전통지서를 보냈다. 이는 의사들의 집단행동이 정부 명령 위반임을 알리고 의협의 의견을 듣기 위한 조치다. 복지부는 3월4일까지 의견을 받아본 후 명령 위반으로 결론 나면 집단행동 참여자의 면허를 정지할 예정이다.

빅5 병원 전공의들이 근무를 중단하기로 한 다음 날인 2월21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서 외래환자들이 대기하고 있다. ⓒ 시사저널 최준필
빅5 병원 전공의들이 근무를 중단하기로 한 다음 날인 2월21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서 외래환자들이 대기하고 있다. ⓒ 시사저널 최준필

“증원조정∙면허박탈 불가”…또 ‘수가 논쟁’?

명령 위반 행위가 법원으로 넘어가 금고 이상의 판결이 나오면 면허 취소까지 가능하다. 면허가 취소되면 교육을 이수하고 심의위원회를 거쳐야 재발급이 가능한데, 의료인 면허 재발급률은 작년 6월 기준 12.5%에 불과하다. 사실상 ‘사망선고’나 다름없다. 하지만 익명을 요구한 국립대 의료윤리학 교수 A씨는 시사저널에 “전공의의 면허를 집단 박탈하면 당장 정부가 의료 공백을 감당할 차선책이 없다”며 “결국에는 현장 복귀를 최우선에 놓고 수습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현실적인 대책으로는 현재 추진 중인 ‘의사 2000명 증원’의 규모를 축소하는 방안이 꼽힌다. 의과전문대학원협회(KAMC)는 “의약분업 당시 줄인 350명을 복원하는 게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부는 “적절하다는 근거는 없다”고 반박했다. 무엇보다 윤석열 대통령이 “2000명 증원은 최소한의 확충 규모”라며 타협 가능성을 일축해 퇴각로를 사전 차단한 상태다. 그럼에도 A씨는 “전공의 사직으로 종합병원이 버틸 수 있는 기간은 최대 3주”라며 “(3주가 지나면) 혼선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데다 총선도 다가오기 때문에 결국 대타협으로 끝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타협을 한다면 또다시 수가 인상을 두고 지난한 갈등이 되풀이될 것으로 보인다. 대한의사협회(의협)는 줄곧 건강보험공단이 병원에 지급하는 수가를 올리는 게 우선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低)수가가 만연한 현실에서는 지역의료∙필수의료와 미용∙성형 간 불균형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이는 의사 수를 아무리 늘려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김혜민 세브란스병원 소아청소년과 의국장은 2월17일 입장문을 통해 “의사가 5000명이 된들, 소청과(소아청소년과)를 3년제로 줄인들, 소청과 의사에게 정당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지원자는 늘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