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에 띄우는 '최틀러'의 승부수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3.07.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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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에 최병렬 대표 체제가 들어서면서 서로 닮은 점이 많은 노무현과 최병렬 사이의 개혁 경쟁이 본격 점화했다. 한국 정치의 지형을 바꿀 이 전투의 최전방은 바로 영남권이다.
최병렬 대표 체제 탄생은 한나라당이 ‘새로운 보수’로 나아가기 시작했다는 신호탄이다. ‘이회창’으로 요약되는 ‘뇌가 없는’ 수구 노선에 대한 반성에서 도덕성과 개혁성을 추구하는 신보수 세력이 전면에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최대표 주변의 참모 그룹인 이른바 ‘최병렬 그룹’은 이회창 노선과 노무현 노선 양자에 대한 변증법적인 부정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철학이 있는 보수 개혁 노선을 주장하는 사람들로 짜여 있다.

앞으로 보수 그룹의 주도권은 이들 신보수 세력이 장악할 것이 분명하다. 노무현 대통령이 김대중 정권을 ‘부정함으로써 긍정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길을 찾아가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노무현과 최병렬, 두 사람은 ‘전례가 없는’ 경쟁과 협력 속에서 한국 정치를 바꾸어 가며 국민의 선택을 호소하는 새로운 전선을 형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두 사람이 벌일 이 승부의 결과는 내년 4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판가름 날 것이다.
부산상고를 졸업하고 인권 변호사를 거쳐, 정치권에 입문한 뒤 지역 감정의 벽을 부수려는 도전을 계속했던 노대통령은 한국 사회 ‘비주류’의 상징이었다. 반면 서울대를 졸업하고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거쳐 전두환 정권 때 정치에 입문한 최대표는 전통적인 ‘주류 그룹’에 속했던 인물이다. 이런 차이만큼이나 사안을 보는 시각이 다른 두 사람은 숙명적인 대결 구도 속에 위치하고 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두 사람은 공통점도 많다. 우선 두 사람 다 상대와 아슬아슬한 박빙의 승부를 벌인 끝에 승리를 거머쥐었다. 노대통령은 이회창 후보를 2.3%차이로 물리쳤고, 최대표 또한 서청원 의원을 2.4% 차이로 따돌렸다. 두 사람 다 조직력과 자금의 열세를 바람을 통해 극복했다. 뿐만이 아니다. 영남(노대통령은 경남 김해, 최대표는 경남 산청)의 시골에서 태어났다는 공통점, 정치권 내 비주류여서 확실한 자기 세력이 별로 없다는 것도 비슷하다. 맺고 끊는 것이 확실한 성격도 닮은꼴이다.

최대표의 한 측근은, 두 사람은 정치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빚진 일이 없고 세력을 만들지도 않아서 필연적으로 강도 높은 정당·정치 개혁을 통해 승부를 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내년 총선 전까지 일정한 갈등은 불가피하겠지만, 과거와 같은 극단적인 대결은 재현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최대표 체제가 등장함으로써 여야가 개혁 경쟁을 벌이는, 상생의 정치 환경이 조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최대표는 이미 어떤 경우에도 장외 집회는 갖지 않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최대표 진영이 보기에 노무현 집권 초기 상황은 또 다른 반면교사이다. ‘통치 환경’이 비슷한 노대통령이 집권 이후 '헤매는' 이유가 무엇인지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최대표의 자문에 응하고 있는 한 대학 교수는 그것을 기획 기능이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최대표는 참모 출신으로서 당 대표가 된 최초의 인물이다. 조직에서 오랜 훈련을 거친 그는 기획에 의해 당을 끌어갈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다. 우왕좌왕하는 노대통령이나, 막연한 대세론과 반DJ 정서를 믿고 선거를 치른 이회창씨와는 다르다. 두고 봐라. 일반의 예상을 뛰어넘는 개혁 폭풍이 한나라당에 몰아칠 것이다”라고 말했다.

‘노무현 배우기’의 또 다른 결과물은 분권형 리더십론이다. 최대표는 ‘최틀러’라는 별명과 함께, 경선 기간 내내 주장했던 ‘강력한 리더십’이라는 구호를 통해 ‘최병렬=강성’이라는 등식을 일반화했다. 그러나 △범국민정치개혁특별위원회를 만들어 여기서 결정된 내용을 여야가 조건 없이 수용하고 △총선준비위원회를 만들어 전권을 위임하며 △입법부의 위상을 높이겠다는 데서 보이듯 최대표는 정치권이 먼저 권한을 분산해야 사회 전반의 분권화를 이룰 수 있다고 본다. 노대통령의 ‘검사와의 대화’에서 배운 교훈이다. 혼자 모든 일을 도맡으려 하면, 나중에 책임 또한 혼자 뒤집어쓸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최대표의 한 측근은 두 사람이 당선되는 과정은 비슷했지만 ‘통치’하는 과정은 다를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적으로 제2의 노무현이 될 수도 있는 정치 환경에 처해 있는 최대표가 노대통령을 벤치마킹하면서 새로운 한나라당을 건설하리라는 것이다.

새로운 한나라당의 코드는 젊음과 개혁이다. 최대표가 고령인 데다가 강한 보수 색채를 띠고 있는 만큼 사무총장과 대변인 등 대표가 임명할 수 있는 자리에는 능력 있고 젊은 의원을 많이 배치해 약점을 보완할 계획이다. 수도권의 소장파 중도 그룹인 박 진·정병국·원희룡 의원이 전면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애초 최대표측은 대표 경선에 나섰던 강재섭·김덕룡 의원과 ‘젊음’ ‘개혁’을 사슬로 삼아 연대 전선을 형성하고, 이부영·박근혜 의원을 두 축으로 해서 당을 운영할 계획이었다. 총선 준비는 이의원에게, 정당 개혁은 박의원에게 전권을 맡길 생각이었다.

그러나 최대표측의 전략은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김덕룡 원내총무’가 무산된 데 이어, 탈당 흐름을 막을 수 있는 바로미터라고 보았던 이의원이 탈당을 결행함에 따라 탈당 의원을 한 자릿수로 막아야 하는 절박한 처지에 몰린 것이다.

이의원이 탈당함으로써 개혁파의 상징인 김덕룡 의원의 중요성은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최대표는 경선 이전부터 김의원에게 비난을 자제하는 등 공을 들여왔다. 당내에서는 벌써부터 김의원이 총선준비위원회에서 중책을 맡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그러나 최병렬 체제의 앞날에는 숱한 암초가도사리고 있다. 특히 내부 기득권 세력과의 싸움은 최대표 체제의 성패를 가를 것으로 보인다. 벌써부터 중진들은 모임을 만드는 등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발 빠른 움직임을 시작했다(26쪽 상자 기사 참조).

나라정책원 김광동 원장은 “보수 개혁의 내용을 구체화하면서 광범위하게 인재를 끌어모아 3분의 2 정도는 물갈이한다는 각오로 개혁을 한다면 내년 총선에서 국민들로부터 선택을 받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최대표 또한 6월26일 대표 수락사에서 “내부의 기회주의와 기득권부터 과감하게 청산하겠다”라며 단단한 각오를 내비쳤다. 한 측근은 최대표가 수구 세력으로 불리는 인사들을 퇴장시키기 위해 총선을 앞두고 먼저 기득권을 포기하며 몸을 던지는 승부수를 던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물갈이는 대세이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소장 김헌태)가 최근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한나라당 쇄신을 위해 중진 의원들이 사퇴해야 한다’는 의견이 60.4%에 달했다. 사퇴해서는 안된다는 의견은 32.6%에 불과했다.

특히 한나라당의 주된 지지 기반이 영남이라는 점에서 ‘영남 물갈이론’이 거세질 가능성이 높다. ‘영남을 혁신해야 한나라당이 산다’는 논리이다. 최대표 측근 가운데는 ‘영남 정서’에 발이 묶일 경우 전투에서는 승리할지 몰라도 전쟁에서는 질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영남뿐만 아니라 수도권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도 영남에 대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물갈이론의 한복판에는 이회창씨 복귀라는 예민한 문제가 깔려 있다. 이번 경선 과정에서 최대표는 내년 총선에서 승리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십고초려’라도 해서 이씨를 모시겠다고 말했다. 그가 6월13일 부산 연설회에서 원고에도 없던 ‘이회창 총선 지원론’을 꺼낸 데는 이씨에 대해 향수를 갖고 있는 당원들의 표를 끌어들이려는 측면이 강했다. 그러나 ‘중진 모임’을 주도하고 있는 의원들 가운데는 이른바 ‘이회창 왕당파’가 많아 이들이 이씨를 등에 업고 최대표 체제에 저항할 경우, 이씨 복귀 문제는 당내 주도권 싸움으로 비화할 가능성도 있다. 최대표의 측근인 윤여준 의원은 이와 관련해 “어려운 문제이다”라며 말을 아꼈다.

현재까지 이씨 복귀에 대한 국민 여론은 차갑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58.8%가 ‘시대 착오적 발상이다’라고 답했다. ‘위기 극복을 위한 현실적인 발상’이라고 답한 사람은 35.9%였다. 그러나 5월30일 <문화일보> 조사에서는 한나라당 지지자의 56.4%가 이씨 복귀를 찬성하는 것으로 나와 당심과 민심이 괴리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영남권에서 이씨 복귀에 긍정적인 사람이 많은 반면, 수도권과 젊은층에서는 부정적인 여론이 높았다.

청와대 한 관계자는 최대표 등장이 여권에도 나쁘지는 않다고 말했다. 일단 강력한 장악력을 가진 파트너가 정해진 것이고, 최대표가 정책으로 승부를 걸겠다고 한 만큼 내년 총선은 안티 정서보다는 누가 호소력 있는 정책을 내놓느냐가 승부를 좌우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관계자는 최대표가 PK(부산·경남) 출신이어서 상대적으로 여권이 이 지역을 뚫고 들어가는 데 어려움이 따를 수 있다고 우려했다. 홍사덕 원내총무(경북 영주)와 이강두 정책위의장(경남 거창) 등 영남파로 최대표 체제가 갖추어진 것도 영남권 공략을 노리는 여권에는 반가운 소식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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