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이건희 철옹성에 누가 맞서랴
  • 장영희 (mtview@sisapress.com)
  • 승인 2003.10.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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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지목률 86.3%로 선두 고수…삼성 영향력, 타의 추종 불허
한치의 인식 오차 없이 일치한, 전혀 놀랍지 않은 조사 결과다.’ 올해 한국을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인(경제 관료와 벤처 기업가 포함)으로 삼성 이건희 회장이 뽑히자 한 재계 관계자는 이렇게 촌평했다. 이회장은 이미 ‘경제 독재자’라는 것이다. 이회장 지목률은 86.3%(복수 응답).

20%대 지목률로 2∼3위를 차지한 (주)LG 구본무 회장과 현대자동차 정몽구 회장은 나름으로 선전했으나 이회장과는 간극이 컸다. 요즘 비자금 건으로 검찰에 불려 다니느라 바쁜 SK 손길승 회장(전경련 회장)과 정몽준 의원(현대중공업 개인 최대 주주)이 4, 5위를 차지한 것도 이채롭다.
겨우 6위지만, 김진표 부총리가 경제 각료로서 체면을 세웠고 안철수연구소 안철수 사장도 벤처 기업가의 전반적 퇴조 속에서 홀로 살아 남았다. 이 조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이회장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가 9위를 차지해 10위권에 처음 진입했다는 사실이다(52쪽 상자 기사 참조).

경제인 1위야 새로울 것이 없지만, 이회장이 ‘한국을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종합 순위)에서 약진한 것은 뉴스거리다. 이회장은 1992년 종합 순위 7위로 10위권에 처음 오른 후 줄곧 4∼6위 중위권을 형성했으나 올해는 마침내 메달권인 3위에 입성했다. 경제인이 내로라 하는 정치인을 제치고 상위권에 오른 것은 1999년 조사에서 2위를 차지했던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뿐이다.

이건희 회장. 그의 영향력은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가 이번 조사에서 한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기업 1위로 꼽힌 삼성그룹의 총수라는 사실은 그가 가진 영향력의 인프라에 해당한다. 삼성의 힘은 몇 가지 지표로 설명되고도 남는다. 지난해 한국 수출의 19.8%(3백16억 달러), 25개 계열사의 순이익 규모가 전체 상장 기업의 61%, 납세액의 6.6%를 차지했던 기업 집단이 삼성이다. 이건희와 삼성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의 영향력이 전적으로 삼성의 힘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재벌 2세이지만, 경영인으로서 독자적인 토대와 입지를 구축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지난 10월9일과 10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반도체 특별 전략 회의. 통상 회의는 삼성전자 윤종용 부회장이 이끌지만 ‘특별’ 자가 붙은 때문인지 이 회의는 이회장이 주재했다. 이 회의에서 이회장은 올해가 (무모한 짓이라는 숱한 반대에도 삼성이) 반도체 사업에 뛰어든 지 20년, D램 분야 세계 1위로 올라선 지 10년째라고 시간적 의미를 부여한 후, D램에서 플래시 메모리 반도체로 세대 교체를 하겠다고 전격 선언했다. 새로운 캐시카우(현금 창출원)로 주목되는 플래시 메모리 분야에서 삼성이 1등인 인텔을 제칠지는 두고볼 일이지만, 그가 최고경영자로서 비즈니스 포트폴리오 재구축에 나선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회장은 어눌하며 극도로 나서기 싫어해 ‘은둔의 카리스마’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럼에도 그는 작심한 듯 한 해에 한두 차례씩 한국 사회에 적극적인 말걸기를 시도했는데, 그것은 드라마틱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언론이 그를 특급 뉴스 메이커로 대접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마의 1만달러론’과 ‘천재경영론’은 올해 그가 한국 사회에 던진 대표적인 화두다. 두 화두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나온 노무현 대통령의 ‘2만달러론·개혁 주체 세력’과 대비되어 묘한 여운을 남겼다. 참여정부와 삼성이 의미 있는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 정황 탓인지 두 사람이 교감했다는 추측이 나돌았다.

그는 수년 전부터 강조하던 ‘강소국론’을 재차 강조했다. 근 1년 만에 참석했다는 지난 9월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서다. 간담회와 만찬을 주관하며 그는 핀란드와 스웨덴 같은 북유럽 강소국들이 세계적 기술력을 가진 대기업을 키워 2만 달러 시대를 연 것은 처지가 비슷한 우리에게 바람직한 모델이라고 역설했다.

이회장이 상성그룹 총수 자리에 오른 것은 1987년이지만 그가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1993년. 이른바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자는 ‘질 경영’을 제창한 프랑크푸르트 선언은 최고경영자 이건희를 집중 부각했다. ‘정치는 4류, 행정은 3류, 기업은 2류’라는 1994년의 베이징 발언은 그를 더욱 대중적으로 만들었지만, 곤욕도 치렀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불같이 화를 냈기 때문이다.

이회장을 직접 겪어본 사람들은 그가 매우 흥미로운 캐릭터를 지닌 경영자라는 데 대부분 동의한다. 때때로 이회장은 경영진에게 당혹스러울 정도로 어려운 숙제를 내준다. 가령 지난 6월 홍라희 여사와 함께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한 이회장은 러시아가 제정 러시아 이후 혼란을 극복한 과정을 연구해 경영에 참고하라고 지시했다. 고려와 삼국 시대 역사에 정통하고 이를 기업 경영과 접목해 설명할 수 있는 전문가를 찾으라는 지시도 내렸다.

이회장의 왕성한 학습 욕구와 예측 불허 행동은 정평이 나 있다. 그는 해외 출장의 상당 부분을 세계 석학을 만나는 데 보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영 참고서나 화제의 책도 거의 빼놓지 않고 읽는다고 한다. 삼성 사장들이 승지원(삼성의 영빈관)에 불려가 늘 전전긍긍하는 것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회장의 예측 불허 캐릭터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경제 영역을 넘어 정치·사회·문화 전반에까지 광범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이건희 회장. 그가 한국 사회에 던질 다음 화두는 무엇일까. 그는 한마디로 ‘연구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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