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괴롭히는 '이회창 함수'
  • 소종섭 (kumkangsisapress.comr)
  • 승인 2003.10.28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돈웅 100억원’이라는 암초를 만난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오른쪽)는 고민 끝에 이회창씨(왼쪽)와 그 추종세력을 분리해 대응하기로 가닥을 잡고 ‘무제한 특검’이라는 반격 카드를 내밀었다. 위기를 기회로 삼
들뜬 분위기보다는 긴장감이 흐르는 ‘이상한 결혼식’이었다. 지난 10월25일 오후 1시30분, 둘째 아들 수연씨의 결혼식장인 서울 성북동성당에 도착한 한나라당 이회창 전 총재는, 기다리던 하객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웃었지만 입은 좀처럼 열지 않았다. 오후 3시쯤 결혼식을 마치고 나서도 이씨는 기자들의 질문에 일절 답하지 않았다. 승용차로 향하는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식장에는 ‘이회창 사람’들이 대거 몰렸다. 오후 1시가 넘어서면서 이흥주 전 행정특보, 황영하 전 총무처장관, 진 영 한나라당 용산지구당위원장 등 원조 멤버에서부터 하순봉·김기배 의원 등 이른바 ‘왕당파’로 불렸던 측근 의원들, 유승민 전 여의도연구소장, 이종구 전 언론특보 등 지난 대선 당시 보좌 그룹이 성당 앞마당을 가득 메웠다.

‘최돈웅 100억원’이라는 암초에 부닥친 이회창씨의 운명과 한나라당의 미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런 상황에서 재신임 정국 이후 묘수를 찾지 못하던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는 승부수를 내놓기 시작했다. 내부적으로는 강도 높게 개혁을 하고,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는 강경 투쟁을 벌인다는 것이 최대표가 내놓은 카드의 뼈대이다. 인사 개편을 통해 총선 체제 골격을 갖춘 최대표는, 이회창씨와 그 세력을 분리해 대응하며 내부 물갈이를 힘있게 추진한다는 전략이다.

현재 이회창씨는 발언을 자제하면서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일각에서 ‘조기 사과설’이 제기되었지만, 측근들은 상황이 어느 정도 일단락될 때까지 입장을 표명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11월 초로 예정되어 있는 출국일도 검찰 수사가 진행되는 속도에 따라 다소 늦춰질 것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이씨 측근들은 이씨가 ‘100억원’ 자체를 알지 못했다고 말한다. 10월20일 귀국한 이씨가 공항에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라고 말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돈에 관한 한 이씨는 결벽증이 있어,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한 측근은 신경식 의원이 옥인동에 다녀간 것이나, 이씨가 김기배 의원에게 전화한 것도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결혼식장에서 만난 홍사덕 총무는 ‘10월22일 옥인동을 방문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씨가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어 그동안 진행된 내용을 보고하러 갔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나라당 내에서도 ‘100억원’을 이씨가 정말 몰랐을까 의심하는 사람이 많다. 워낙 거액이고, 이씨가 대선 당시 친구인 최의원에게 “너무 여기저기 전화하지 말라”고 말했다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다. 기업들 또한 정치 자금을 많이 내면 후보가 그 사실을 아는지 여러 경로로 확인하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SK 관계자들이나 김영일 전 사무총장의 진술에 따라 이씨가 인지했는지 여부가 밝혀질 가능성이 높다.

현재 이씨 측근들은 검찰 수사에 강한 불만을 나타내면서 ‘기획수사설’을 주장하고 있다. 하루에 한 번씩 옥인동을 드나들며 이씨에게 조언하고 있는 유승민 전 여의도연구소장은 “당선을 전후해 SK에서 노무현 대통령 쪽에 건너간 돈을 검찰이 덮어두고 있다고 본다. 검찰이 비자금과 관련한 SK의 모든 장부를 압수했고, 손길승·최태원 회장과 김창근 구조조정본부장을 다 조사했는데, 당선 전후 석달간 노대통령측에 건너간 돈이 11억원밖에 안된다는 것은 삼척동자가 보아도 말이 안 된다. 서울지검과 달리 대검에는 노대통령과 코드가 맞는 사람이 많다”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로서는 이회창씨가 조사받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라며 사태 추이를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종구 전 언론특보도 비슷한 주장을 폈다. 그는 "SK 사건은 갑자기 불거진 것이 아니다. 검찰은 이미 지난 2월 SK를 압수 수색했을 때부터 (비자금이 정치권에 건네진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재신임 문제가 터져 나오고 신당이 뜨는 분위기에서 ‘100억원’ 문제가 전면화한 것은 큰 밑그림이 있다는 반증이다”라고 말했다.

정병국 의원은 재신임 정국이 조성될 때부터 한나라당에 해일이 몰아칠 것이라고 주장했던 사람이다. “청와대에 근무했던 경험으로 볼 때 대통령이 재신임을 묻는다는 것은 결코 쉽게 결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미 준비를 다 해놓고 카드를 던졌다고 보아야 한다. 국민들을 설득하기 위해 최도술씨 등 자기 살점을 베어내면서 야당을 친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근거를 갖고 있지는 않다. 여러 정황을 볼 때, 심증이 그렇다는 것이다.

주목되는 것은 100억원 사건을 계기로 최병렬 대표 진영과 이회창 진영 사이에 긴장감이 높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씨 주변에서는 당의 대응 태도에 불만을 털어놓고 있다. 유승민씨는 “답답하다”라고 말했고, 하순봉 의원은 10월24일 의원총회에서 “당이 정정당당하게 대처해 달라”며 강력하게 검찰 수사에 맞서라고 주문했다. 김영일 전 총장 또한 최대표에게 “가만히 있으면 당한다”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10월26일 노대통령과의 회동에서 최대표가 주장한 ‘대선 자금 여야 동시 특검’도 이씨 처지에서 반가운 소식은 아니다.
이씨를 의식해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던 최대표는 10월23일부터 분명한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이 날 기자간담회에서 최대표는 “전임자들을 핑계로 팔짱끼고 구경하는 것은 내 스타일도 아니고 마음 속에도 없다. 이회창씨는 돈하고 원수진 사람이다. 돈에 관한 한 이회창씨는 벽창호이다”라고 말했다.

전날까지 ‘이회창 세력’과 일대 결전을 벌여야 하는가를 놓고 고민했던 최대표는 한 참모가 ‘이회창과 그 세력에 대한 분리 대응’을 조언하자 무릎을 쳤다는 후문이다. 이씨는 철저히 보호하되 나머지 인사들에 대해서는 원칙대로 처리해 당을 환골탈태시킬 계기로 삼겠다는 것이다.
사실 ‘최돈웅 100억원’은 최병렬 대표에게는 엄청난 위기이자 기회라는 두 가지 측면을 갖고 있다. 당내 최대 세력이자 구세력인 ‘이회창 세력’을 들어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지만, 그나마 있던 구심점이 사라져 당이 군소 세력들이 이전투구를 벌이는 내분으로 빠져들 위험성을 동시에 안고 있는 것이다.

최대표가 사무총장 등 주요 당직을 개편한 것은 최대표와 노대통령 모두 총선을 앞두고 전열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누가 빨리 대오를 갖추느냐에 따라 총선 국면이 좌우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최대표의 한 측근은 이제부터 당이 비상 체제로 운영될 것이고, 총선 국면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사활을 건 전쟁이 시작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최대표 체제 2기의 운명을 가름할 이재오·김문수·정병국·이성헌 의원은 강경 개혁파라는 특성이 있다. 대여 투쟁에서 강경 노선을 견지하면서도 내부 구세력을 척결하려는 의지 또한 높은 사람들이다. 최대표는 본인이 직접 피를 묻히지 않고 이들을 전면에 내세워 강도 높은 물갈이를 추진하는 전법을 구사할 것으로 예상된다.

최대표 측근 윤여준 의원은 “지금 한나라당은 외통수에 걸렸다. 이순신 장군이 배 12척을 가지고 3백척이 넘는 적선을 쳐부순 것과 같은 각오를 가져야 이 국면을 헤쳐갈 수 있다. 당 안을 보지 말고 국민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면서 사즉생(死卽生)의 결의를 가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대대적으로 개혁하지 못하면 최악의 경우 소장파가 당을 뛰쳐나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때를 맞추어 미래연대와 쇄신연대 등 한나라당 개혁파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래연대는 10월26일, 쇄신연대는 10월28일 모임을 갖고 당 개혁과 정치 개혁에 앞장서기로 뜻을 모았다. 홍사덕 총무 또한 10월24일 의원총회에서 “열린우리당도 깜짝 놀랄 만한 정치개혁안을 11월 초순 안에 내놓겠다”라고 말해, 조만간 한나라당은 인적·제도적인 개혁 폭풍에 휘말릴 것으로 보인다. 정병국 의원은 “앞으로 누가 얼마나 개혁하느냐에 따라 총선의 승패가 갈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최대표의 한 측근은 ‘정도·정면 대응·원칙·투명’이라는 말로 향후 최대표의 행보를 요약했다. 이제 앞뒤 안 보고 국민만 보고 가겠다는 것이다.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최대표와 한나라당 초·재선 그룹이 힘을 합쳐 당내 구세력을 축출하는 데 성공한다면 지금처럼 노대통령이 계속 주도권을 쥐고 가지는 못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재신임 카드로 일거에 국면을 뒤집었지만 여전히 상당수 국민이 노대통령에게 낮은 점수를 주고 있다는 것이다.
최대표가 10월26일 노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여야 대선 자금에 대해 무제한 특검을 하자고 주장한 것은 이런 취약점을 더욱 파고들겠다는 노림수이다. 겉으로는 이번 기회에 잘못된 과거의 정치 관행을 양지로 끌어내 획기적으로 혁신하는 계기로 삼자고 주장하고 있으나, 어차피 한나라당은 만신창이가 되었으니 노대통령에게도 타격을 입히겠다는 속내가 깔려 있다. 이번 기회에 당 내부 개혁과 노대통령 공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변수가 있다. 최대표는 ‘이회창씨와 추종 세력’을 분리 대응하려고 하지만, 만약 이씨가 추종 세력을 옹호하는 행보를 한다면 그와 전면전을 벌여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 이 경우 최대표는 벽에 부닥치면서 내부 개혁 작업은 물론 노대통령과 맞서기도 어려워진다. 독자 세력이 없는 최대표 처지에서는 상상하기 싫은 시나리오이다.

현재 최대표 주변에서는 정계를 은퇴하면서 당의 환골탈태를 강조했던 이회창씨가 최대표에게 힘을 실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섞인 예상이 흘러나오고 있다. 이씨가 일정한 역할을 해 원로 중진들의 퇴진을 유도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유승민씨는 “이씨는 정계를 은퇴했기 때문에 특별히 어떤 세력을 옹호하거나 배척하지 않고 초연한 태도를 보일 것이다”라며 ‘역할설’을 부인했다.

그렇다고 ‘이회창 대안론’의 불씨가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다. 이씨가 이번 사건에서 도덕적인 타격을 입는 데 그친다면 ‘대안론’은 여전히 유효성을 지닐 가능성이 높다. 재신임 정국이 본격 도래해 ‘한나라당의 대안이 누구냐’는 문제가 제기되면 이씨의 이름이 다시 오르내릴 수밖에 없다. <시사저널>이 창간 14주년을 기념해 10월14∼17일 전문가 1천40명을 조사한 결과, 이씨가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원에 이어 ‘차기 대통령감’2위에 오른 것이 한나라당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