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는 40대’ J·J·K 라인을 주목하라
  • 이숙이 기자 (sookyi@sisapress.com)
  • 승인 2000.10.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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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영·정동채·김한길, 새 주도 그룹으로 떠올라… “동교동 대안 세력 될 수도”
J·J·K를 주목하라.

요즘 민주당 증시에서 ‘동교동 주’가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면, J·J·K는 새 주도주로 떠오르는 다크호스다. 여기서 J·J·K란 정동영 최고위원·정동채 기조실장·김한길 문화관광부장관을 가리킨다. 이들 3인은 신기남·이미경·정세균·천정배·추미애 등 40대 재선급 의원이 주축이 된 ‘바른 정치 모임’을 기반으로 삼아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당내 여론을 주도해 가고 있다. 최근 추미애 의원을 총재비서실장에 강력하게 추천한 세력도 바로 이들. 추실장이 앞으로 청와대 수석회의와 주례보고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게 됨에 따라, 이제 40대 재선 그룹은 청와대와 당·정을 아우르는 핵심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J·J·K 3인이 평소 동료 의원 이상의 우정을 다져 왔다는 것은 정가에 잘 알려진 사실이다. 15대 총선을 통해 함께 국회의원 생활을 시작한 이들은 비서실장과 대변인 등의 신분으로 DJ를 보좌하며 친해졌고, 1997년 대선 과정에서는 TV 대책반을 함께 이끌며 DJ 대통령 만들기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정권 교체후 대통령직인수위 시절에는 김한길 장관이 대변인을, 정동채 실장이 국민과의대화 준비팀장을, 정동영 위원이 당 대변인을 맡아 다시 호흡을 맞추었다.

16대 총선에서 나란히 금배지를 다시 단 이들은 아예 의원회관 6층 가까운 거리에 각자 방을 정한 후 틈만 나면 이 방 저 방을 오가며 정국 현안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정동영 위원은 “문제라고 인식하는 부분이나 해법이 비슷해서 자주 만나게 됐다”라고 설명했다.

‘바른 정치 모임’도 세 사람의 토론 과정에서 탄생했다. 김한길 장관이 ‘뜻이 맞는’ 의원들의 공부 모임을 제안하자 나머지 두 사람이 여기에 동의한 것이다. 현재 정회원이 12명인데, 30대인 김민석 의원, 초선인 한명숙·허운나 의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40대 재선 의원이다. 회장을 맡았던 김장관은 전국구 의원 직을 내놓으면서 현재 공식으로는 회원 자격을 잃었다. 신기남 의원이 회장 직을 승계한 상태.
바른정치모임 회원들은 각자 색깔이 분명하면서도 성품이 모나지 않다는 것이 특징으로 꼽힌다. 그 때문인지 회원들은 가끔 부부 동반 골프도 하는 등 단순한 공부 모임 이상의 유대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경색 정국이 길어지고 여당이 무기력하다는 당 안팎의 비난이 비등한데도 조용히 내부 조율만 거듭하던 이들은 최고위원 경선에 참여하기로 결정하면서부터 마침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내부 논의 끝에 당의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소장파가 직접 최고위원단 회의에 들어가야 하고, 그러려면 정동영·추미애·김민석 의원이 모두 경선에 나서 소장파 바람을 일으켜야 한다고 결론이 난 것. 선거전에 돌입하자 회원들은 각자 주머니를 털어 세 후보에게 각각 천만원씩 격려금을 지원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40대 기수론’을 내세운 당시 정동영 후보의 선거 캠프는 회원들 방에서 지원 나온 보좌진과 비서진이 선거운동원의 주축을 형성했다. 광주 출신인 정동채 실장의 경우 보좌관을 호남의 모든 지구당에 보내 정후보 지지를 호소하는 등 마치 자기 선거를 치르는 것처럼 적극 도왔다. 그 결과 이들은 40대 재선급 의원들의 의견을 최고위원회의에 대변하고, 또 최고위원단의 내부 기류를 자세히 파악할 수 있는 통로를 확보했다.

박지원 장관의 사퇴 물꼬를 튼 것도 바로 이들이다. 지난 9월18일 최고위원 워크숍에 참석한 정동영 위원이 박장관 사퇴론을 제기했고, 회의가 끝난 후 다른 최고위원들도 그런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고 언론에 공개했다. ‘박지원 보호’를 노린 동교동 주류가 정위원의 발표를 부인하며 어떻게든 사퇴론을 막아보려 했으나, 다음날 의원총회를 압도한 소장파의 반발로 결국 박장관이 사퇴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 정위원은 “회원들과 토론한 끝에 해답이 그것밖에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라면서 자신이 소장파의 대변자임을 인정했다.

정위원이 최고위원회의를 주요 활약 무대로 삼고 있다면, 정동채 실장은 실무 차원에서 당 장악력을 넓혀 가고 있다.

최근 들어 부쩍 자신감 있는 행보를 보이고 있는 서영훈 대표의 뒤에는 사실 정실장이 버티고 있다. 정실장은 매일 아침 당의 주요 현안과 대처 방안에 관한 자료를 서대표에게 보고하고, 서대표는 공식 보고 외에도 틈만 나면 정실장을 찾아 정국 현안에 대한 의견을 구한다. 정치판 생리나 민주당 내부 역학 구도에 익숙치 않은 서대표 처지에서 보면 DJ 비서실장을 오래 한 정실장이 핵심 참모로 적격인 셈. 서대표는 최근 ‘신용보증기금 전 영동지점장 이운영씨의 배후에 한나라당 엄호성 의원이 있다’는 언론 보도에 격앙한 동교동 강경파가 ‘이회창 퇴진론’까지 들고 나오자 이를 정국 해법에 도움이 안된다며 말렸다. 이런 판단에는 다 정실장의 조언이 작용했다는 것이 서대표 주변의 전언이다.
정실장은 현재 당 조직을 21세기형 집권 여당에 맞게 바꾸는 직제 개편을 주도하고 있다. 사무부총장제를 폐지하고, 성격이 비슷한 위원회를 대폭 줄이는 대신 미디어대책반과 사이버홍보팀, 연구소를 신설하는 내용이 주요 골자다. 이 개편안이 확정되면 중·하위 당직자를 대폭 교체하는 인사 태풍이 불 것으로 보인다.

인수위를 시작으로 청와대 비서실에 이어 행정부까지 진출한 김한길 장관은 이 모임의 외부 창구 역이나 다름없다. 청와대 정책기획수석 시절 나머지 두 의원의 의견이 정책에 반영되는 통로 구실을 했던 그는 최근 장관 임명을 둘러싼 부정적인 여론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소장파 의원들과 정부를 잇는 연결 사슬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일단 당과 정부에 거점을 확보한 이들은 이를 근거로 하여 점차 영향력을 확대해 갈 전망이다. 우선 세 사람의 잠재력이 만만치 않다. 세 사람 모두 언론계 출신이어서 여론 파악 능력이 뛰어난 데다, 대중적 인지도·치밀성·전략적 사고 같은 나름의 상품성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세 사람에 대한 김대통령의 신뢰가 남다르다는 것이 무엇보다 강력한 무기다.

이들을 뒷받침하는 40대 재선 그룹의 면면도 탄탄하다. 젊고 개혁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치 초년병인 초선들과는 다른 안정된 판단력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각기 부총무·정조위원장 같은 중간 당직을 맡고 있어 당 돌아가는 사정도 어느 정도 꿰뚫고 있다.

이런 잠재력 때문에 당 일각에서는 J·J·K를 앞세운 40대 그룹이 동교동계를 대신할 DJ 정권의 새로운 권력 집단이 되리라는 성급한 관측이 나온다. 민주당의 한 핵심 당직자는 “DJ 정권의 1대 권력축이었던 김중권 초대 비서실장을 중심으로 한 신주류는 옷 로비 사건으로 물러났고, 그 뒤를 이어 2대 권력축을 형성한 동교동계 구주류는 박지원 사퇴 파동을 겪으면서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이제 제3의 권력축이 등장할 시점인데, 그 자리를 J·J·K 라인이 차지할 가능성이 크다”라고 전망했다.

정가 일각에서는 이들이 결국 ‘한화갑 친위부대’가 되리라는 관측을 내놓기도 한다. 성향이 한위원과 가깝다는 이유에서다. 이에 대해 3인은 물론 바른정치모임 회원 모두가 강력히 부인하고 있다. 회원 개개인마다 중진들과의 친소 관계가 다 다르며, 이 모임은 결코 계보 모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역할을 ‘각종 정책 사안에 대한 의견을 수렴하고, 조기 경보 시스템을 가동해 민심이 민주당에서 떠나는 것을 막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당을 중심으로 원심력이 아닌 구심력이 활성화하도록 힘을 모아 정권 재창출의 발판이 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력이 형성되면 이를 활용하려는 사람이 나타나기 마련인 정치권의 속성에 비추어 언제까지 그 순수성이 지속될지는 의문이다. 어찌되었든 J·J·K 라인은 이제 민주당의 차기를 가늠하는 새로운 바로미터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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