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정일 생일 계기로 정상회담 적극 검토
  • 남문희 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0.04.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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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부터 수뇌부에서 대남 관계놓고 열띤 토론ㆍㆍㆍ권력 재정비ㆍ대외 정세 변화 등도 영향
북한 수뇌부가 남북 정상회담을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말부터였다고 한다. 북한측과 접촉을 유지해온 재계의 고위 소식통에 따르면 이 때부터 북한 수뇌부 내에서 대남 관계를 둘러싼 내부 토론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당시 쟁점이 된 것은 이른바 ‘통미 봉남(通美對南)’(남한과의 대화는 차단하고 미국과만 대화하는 것) 정책을 과연 언제까지 유지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었다. 김영삼 정권 시절부터 지속해온 통미봉남 정책에 대해 북한 수뇌부 일각에서 “이 정책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미국과 관계 개선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너무 걸린다. 남한과 관계를 개선해 실리를 추구할 필요가 있다”라는 문제 제기가 강력하게 대두했다.

소식통에 의하면 수뇌부 내부의 이같은 논쟁이 대남 관계 개선 쪽으로 가닥이 잡히게 된 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일인 2월16일을 전후해서다. 물론 북한 수뇌부가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된 데에는 북한측과 접촉해온 남쪽 기업인 등 민간 인사들의 역할도 매우 컸다고 할 수 있다. 정부 내부에서는 박재규 통일부장관이 비공식 대화의 중심에서 여러 가지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지난해 12월23일 박재규 경남대 총장이 신임 통일부장관에 임명된 것은 대화 환경 조성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띠었다고 할 수 있다. 박장관에 대한 북한측의 인상이 좋았기 때문이다. 북한은 박장관을 대화가 가능한 합리적 인물이라고 평가해 왔다.

장관 취임 이후 박장관 스스로도 북측과 간접 대화를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 왔다. 2월 초순께에는 민간 기업 고위 관계자가 사업차 방북한 길에 고위급 회담 재개를 희망하는 박장관의 메시지를 김용순 비서에게 직접 전달하기도 했다. 당시 김비서는 고위급 회담을 열자는 남쪽의 제안에 대해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 제안 내용을 문서로 보내 달라’고 역으로 주문했다고 한다. 소식통들은 김대중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 직전 박장관이 김용순 비서에게 선언 내용을 미리 통보한 것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졌다고 지적한다.

반면 대북 특사로 활약한 박지원 장관의 역할 범위가 어디까지였는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대화 과정 전체에 그가 관여했는지 막판 조율 과정만 담당했는지 현재로서는 파악하기 힘들다.

북한이 정상회담에 전격 합의한 배경에는 이처럼 남북 양측의 비공식 접촉이 큰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나, 그 이전에 이미 북한 내부 환경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정비되어 오고 있었다. 환경 변화에서 주요 고려 사항은 △지난해에서 올해로 넘어오는 시기가 새로운 세기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북한 역시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는 점 △그동안 추진해온 대외 관계 개선 노력에 대한 재평가 및 새로운 활로를 개척할 필요성 △ 권력 내부 재정비 등이다.김정우 자살로 개방정책 실패한 책임 문제 해결

우선 북한 역시 새로운 세기를 맞으면서 변화에 대한 필요성을 강하게 느껴 왔다. 예를 들어 그동안의 대외 접촉 경험이 축적되면서 북한 내부 각 경제 단위들이 접하는 해외 정보의 양과 질이 크게 달라졌다. 과거에는 상부의 지시에 따라 수동적으로 움직여 왔던 각 부문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쟁적이고도 치열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점도 새롭게 나타난 양상이다.

물론 이런 과정에서 내부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해 보위부가 주동이 되어 평양 주재 일본계 상사의 사무소를 폐쇄한 사건이다. 또한 나진·선봉 정책 실패 후유증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개방 정책이 등장하기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지난 한 해 동안 이같은 내부 환경이 정비되는 몇 가지 사건이 있었다. 우선 개방 정책 실패와 관련해 그 총체적 책임을 지고 있던 김정우 전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 위원장이 갑자기 자살해 버렸다는 점이다. 김위원장은 한때 개방 정책 추진 과정에서 뇌물 수수 등의 혐의로 총살형에 처해졌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지난해까지 평양 시내에서 칩거해 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최근 소식통들에 따르면, 그가 지난해의 어느 시점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자살을 감행했다는 것이다. 그의 돌연한 죽음으로 인해 과거의 개방 정책 실패에 대한 책임 문제가 일단 해소되었고, 역으로 새로운 정책을 펼 여건이 조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이 바로 서해 교전 사태가 가져다 준 충격이다. 북한 해군이 서해에서 남한 해군에 대패한 이후 북한 군부 내에서 ‘재래식 전쟁에서도 남쪽을 이기기 어렵다’는 위기 의식이 높아졌다. 이와 함께 군사적 맹동주의를 경계하는 목소리가 군부 내에서 나오기 시작했고, 북한 권력 구조 안에서 군부의 입김이 오히려 약해지는 현상도 나타났다.

대외 관계 측면에서 보자면 기존 대미·대일·대중 관계에서 유화 정책을 계속 펴갈 수밖에 없는 동시에 그 한계를 피부로 느끼기 시작했다. 대미 관계에서는 미국 대선 기간에 벼랑끝 외교를 통한 압박 전략을 펴기가 매우 어렵다. 미국 대선에 휘말려들면 뜻하지 않은 손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 대선이 끝날 때까지 눈에 드러나는 어떠한 성과도 기대하기 어려운 어정쩡한 상태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일본과의 수교 협상이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대단히 환영할 만한 일이나, 교섭이 마무리되어 수교배상금이 유입되는 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린다.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중국측의 무조건적인 지원을 계속 기대하기는 어려운 형편이다. 지난해 김영남 방중과 올해 백남순 방중으로 북·중 관계가 개선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국측은 중국 경제 역시 사정이 안 좋아 북한에 무상 지원을 계속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통보했다고 한다. 그 대신 중국은 ‘대외 개방이 어렵다면 중국에 대해서만이라도 개방 조처를 취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김정일로서도 이같은 요구를 거절하기가 쉽지 않은 처지이다.

이같은 주변 정세에 대해 북한 수뇌부의 대응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그 하나가 바로 이탈리아나·독일 등 유럽 국가 그리고 필리핀·캐나다·호주 등 기타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확대하는 것이다.

북한 외교에서 제3의 요소라 할 수 있는 이들 국가와의 관계 확대는 주변 국가들을 자극하는 효과를 노림과 동시에 일종의 완충지대를 설정하는 의미도 띤 것이다. 현대 일변도의 경협에도 부담감 느낀 듯

이처럼 북한이 대남 관계 개선에 앞서 유럽 국가들과의 관계를 진전시키려 노력해 왔다는 사실은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남북 간의 비공식 접촉 과정에서 북한측이 ‘유럽과 문제가 잘 풀려야 남쪽과 대화가 쉬워진다’는 메시지를 전했다고 하는데 이 역시 대남 관계 개선에 앞서 유럽 국가들을 완충지대로 설정해 두겠다는 의미를 내포한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유럽 순방에 나서고 베를린 선언을 하게 된 까닭은, 북측이 이같은 메시지를 전달했기 때문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즉 유럽과 잘 풀리면 남북 관계에 임하겠다는 북측 메시지가 우리 쪽에 전달되었고, 이에 따라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유럽 국가들에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촉구했다는 지적이다. 이렇게 보면 순서로 보아 북한이 화답할 차례였다고 할 수도 있다.

남한과의 그동안 경협 진행 과정에 대해서도 북한측이 문제점을 느끼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즉 현대와의 경협이 북한에 많은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현대 일변도로만 사업이 이루어짐으로써 불안감 또는 부담감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남북 관계를 다변화하고 복선화할 필요성을 북한도 느끼기 시작한 셈이다. 지난해 말부터 갑작스럽게 남북 간에 여러 라인이 등장한 것도 북측의 이같은 자각에서 말미암은 측면이 있다.

지난 1년간 북한 내부에서 전개되어온 환경 변화 요인들은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 사이에 권력 관계 재조정이라는 형식으로 응축되었다. 북한 내부 사정에 정통한 소식통에 의하면 이 시기를 거치면서 북한 권력 내부에서 당의 정국 주도권이 재확립되었다고 한다. 북한 권력의 정점은 단연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다. 그러나 밑에서는 끊임없이 주도권 다툼이 벌어지곤 했는데 1998년께 벌어졌던 김용순 라인 대 장성택 라인의 대립 그리고 최근까지 이어졌던 당에 대한 군이나 보위부 세력의 견제 등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지난해 말 대남 관계를 둘러싼 내부 토론 과정에서 김용순 비서를 중심으로 한 당내 대화파 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당과 군과 내각의 관계가 재정립되기에 이르렀다. 즉 김정일 위원장을 정점으로 당이 방향을 제시하면 군이 이에 협조하고 내각이 실무를 담당하는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지난 2월16일 김정일 위원장 생일을 전후해 권력 내부 정비가 이처럼 마무리되면서 남북 정상회담이라는 드라마의 막이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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