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챔피온’ 이재영ㆍ구현정 성공 스토리
  • 안은주 기자 (anjoo@sisapress.com)
  • 승인 1999.1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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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홈페이지 경진대회 과학·수학 부문 석권한 이재영·구현정의 성공 스토리
재영이와 현정이는 밤마다 하늘을 나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비행기가 어떻게 공중을 날 수 있는가를 놓고 토론했다. 둘의 토론은 날마다 태평양을 오가며 조금씩 살이 붙었다. 토론하던 중에 고등학생 수준을 뛰어넘는 문제에 부딪히면 인도양 대서양을 넘나들며 그 분야의 석학을 찾아 특별 강의를 받았다. 재영이와 현정이의 ‘하늘을 나는 토론’은 ‘에어로넷’(Aeronet)(http://library.advanced.org /25486)이라는 인터넷 홈페이지로 구체화했고, 이 홈페이지는 세계 최대 교육용 인터넷 홈페이지 경진대회인 ‘싱크퀘스트’에서 과학·수학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한국과 미국에서 각각 살고 있는 현정이와 재영이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태평양을 오가며 이야기를 나누고, 지구촌 구석구석을 뒤져 ‘스승’을 찾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인터넷 덕분이었다.

비행 원리 다룬 ‘에어로넷’으로 영예

이재영군(17)은 미국 버지니아 주 토머스 제퍼슨 과학고 12년, 구현정양(15)은 서울 용화여고 1학년이다. 이들이 홈페이지 ‘에어로넷’을 함께 만들기 시작한 것은 지난 6월. 재영이는 지난해 학교 친구들과 싱크퀘스트에 도전했다가 도중 하차한 뒤, 올해 초 재도전을 준비하면서 아버지 친구의 딸인 현정이와 손을 잡았다.

비행기가 하늘을 나는 원리를 작품 주제로 선택한 것은 재영이였다.

“지난해 여름 프랑스어 캠프에 참가해서 14일 동안 2백40㎞ 도보 여행을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도 매일 목표한 만큼 걸어야 했고, 비스킷 한 조각으로 아침·점심을 해결해야 하는 강행군이었죠. 그 도보 여행 마지막 날 애팔래치아 산맥 정상(해발 1,900m)에서 커다란 독수리가 거대한 원을 그리며 나는 것을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목격했습니다. 자세히 보니 독수리의 날개가 별로 움직이지도 않는데 아주 멋지게 비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날갯짓 없이도 어쩌면 저렇게 멋지게 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영이는 그 때의 호기심을 풀어보기 위해 싱크퀘스트에 ‘항공 역학’ 홈페이지를 만들어 응모하기로 결심했다.

재영이는 지난 3월 학교 친구 2명과 함께 본격적으로 싱크퀘스트 준비에 들어갔다. 재영이는 매니저로 나서고 데이비드 지글러가 기술 부문, 테일러 미첼이 디자인을 맡았다. 재영이는 항공 역학에 대한 책을 수십 권 읽으며 자신의 의문을 하나씩 풀어갔다. 도서관에 없는 책은 아버지에게 사 달라고 부탁했다. 재영이는 매일 친구들에게 해야 할 일을 알려주고, 진도를 점검했다. 세 사람의 합동 작업으로 ‘에어로넷’ 뼈대는 3개월 만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디자인을 맡은 테일러가 진도를 맞추지 못하는 것이었다. 재영이가 전화와 전자 우편으로 타이르고 독촉도 했지만 테일러에게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그는 팀을 떠나고 말았다.

“에어로넷을 만들면서 발생한 최초의 어려움이었습니다. 지난해처럼 또 도중 하차하나 싶었습니다. 중간에 새 친구를 합류시킨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거든요. 그때 아버지가 현정이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아버지가 친구 딸 가운데 미술에 재능 있는 아이가 있으니 함께 해보겠냐고 권유했던 것이다. 싱크퀘스트에서는 남녀가 고르게 팀을 이루고, 거리가 먼 아이들이 인터넷을 통해 협력한 작품에는 가산점을 주기 때문에 현정이가 합류하는 것은 여러 모로 유리했다. 재영이는 홈페이지를 만들어 가면서 이해를 돕기 위한 그래픽을 그려서 현정이에게 전자 우편으로 보냈다. 현정이는 미술적인 안목으로 수정해서 다시 재영이에게 보냈다. 한창 잘 되어 가나 싶었는데 이번에는 자바를 이용한 기술 부문을 맡은 데이비드에게서 문제가 생겼다. 데이비드는 자바를 응용하는 데 쓰이는 수학을 도저히 풀 수가 없다면서 엉엉 울었다. 모르는 수학 문제, 세계 석학 수소문해 배워

“실망시켜서 미안하다며 우는 데이비드를 달랬습니다. 최악의 경우라야 작품을 포기하는 건데 그래 보았자 우리는 잃을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그동안 배운 것이 있으니 절대로 실망할 일이 아니라고 달랬습니다. 그러고는 제가 자바 프로그램 응용 개발에 함께 나섰습니다.”

금요일 저녁부터 시작되는 휴일마다 데이비드와 재영이는 자바 어플릿을 개발하기 위해 침식을 잊은 채 매달렸다. 그래도 고등학생이 풀기에는 너무 어려웠다. 재영이와 데이비드는 인터넷을 이용해 스승을 찾아 나섰다. 지구촌 어딘가에 자신들의 문제를 풀어줄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마침내 이탈리아 제노아 대학의 마르코 콜롬비니 교수가 에어로넷 팀이 만들려고 하는 것과 비슷한 작업을 했다는 것을 알아냈다. 재영이는 자신들이 하려고 하는 일과 이제까지 한 일들을 상세하게 적어 전자 우편을 보냈다. 곧바로 콜롬비니 교수로부터 답장이 왔다. ‘너희가 정말 고등학생이냐, 어디에서 배웠느냐’는 등 시시콜콜 캐어물었다. 그러더니 자기가 만든 것은 포트란이라는 구식 프로그램이고, 자바로는 2년 전에 시도했지만 실패했다고 덧붙였다.

“우리에게는 자바보다 수학이 문제였어요. 그래서 콜롬비니 교수에게 전자 우편으로 수학 강의를 해주면 우리가 개발한 프로그램의 소스 코드를 주겠다고 제의했습니다. 콜롬비니 교수가 흔쾌히 수락해서 그 때부터 전자 우편 수학 강의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에어로넷은 비행기가 하늘을 나는 원리를 설명하는 것이다. 항공 역학을 전혀 모르는 사람도 이 사이트에 실린 내용과 그림을 보면서 쌍방향으로 항공 역학을 배울 수 있다. 이 사이트의 핵심은 사이버 풍동(風洞). 비행기 날개형 물체의 모양과 각도를 자유자재로 바꾸고, 그 주위를 흐르는 유체의 흐름과 압력 변화를 그래픽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재영이 팀은 자바 어플릿을 사용해서 비행기 날개 단면의 변화를 사용자가 마우스로 변화시키면 그에 따른 공기 흐름의 변화가 화면에 보이도록 고안했다. 동시에 어느 두 점의 공기 압력을 계산해서 숫자로 보여줄 수 있게 만들어 날개 위와 아래의 공기 압력 변화에 따라 비행기가 공중에 뜰 수 있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 풍동의 움직임을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만드는 데 필요한 공식을 산출하기 위해서는 수학자 못지 않은 전문 지식이 필요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탈리아 콜롬비니 교수로부터 수학 강의를 받았던 것이다. 내년 대회에는 따로 팀 만들어 출전할 계획

어려웠던 문제가 하나씩 해결되면서 에어로넷은 모양새를 갖추어 갔다. 현정이는 미술적 안목과 여성 특유의 감각으로 사이트의 색깔과 그래픽을 바꾸었다. 마감을 앞두고 재영이와 데이비드는 사이트에 들어갈 원고를 번역했다. 영어뿐 아니라 프랑스어와 독일어로도 검색이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재영이는 학교에서 프랑스어를 4년간 배웠고, 데이비드는 독일어를 배웠기 때문에 각각 프랑스어와 독일어로 번역했다. 현정이가 원고를 쓴 부분은 먼저 재영이가 영어로 번역한 다음에 다시 독일어와 프랑스어로 옮겼다. 드디어 마감일인 8월15일. 데이비드와 재영이는 작품을 언제 올릴 것인가를 놓고 설전을 벌였다. 데이비드는 작품이 아직 미진하니 완전히 끝낸 후에 올리자고 주장했다. 매년 마감 시간이 연장되어 왔으니 늦게 올려도 무방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재영이는 마감 시간 연장이 불확실하니까 일단 기한 내에 작품을 내자고 주장했다. 재영이가 데이비드를 설득해 마감 시간 30분 전에 작품을 제출했다. 이 순간의 선택으로 1년 간의 땀이 물거품이 되는 것을 모면했다. 올해부터 마감 시간을 연장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99 싱크 퀘스트에는 96개국 2천6백여 팀이 응모했다. 응모된 작품들을 심사위원 1백80여 명이 온라인으로 일일이 심사하고, 결선에 오른 팀들만 로스앤젤레스에 모여서 최종 심사를 받았다.

최종 심사에서 재영이 팀이 만든 에어로넷은 과학·수학 부문 대상작으로 뽑혔다. 고등학생의 수준을 뛰어넘는 훌륭한 작품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하지만 재영이 팀은 전체 대상을 받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2000년 싱크 퀘스트는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릴 예정이다. 재영이와 현정이는 내년 대회에도 참가하겠다고 했다. 19세까지 참가할 수 있으므로 몇차례 더 전체 대상을 거머쥘 기회가 남아 있다. 규칙에 한 번 수상한 팀은 또다시 응모할 수 없기 때문에 내년에는 각각 다른 팀을 구성해서 참가해야 한다. 재영이는 내년 대회에서는 ‘건강’을 주제로 할 생각이다. 그는 그 때에도 한국 여학생 가운데 파트너를 구하고 싶어한다. 건강에 관한 주제이므로 새 파트너의 부모님이 내과를 전공한 분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재영이는 올해 미국 대학 입학 자격시험에서 영어 만점(800점), 수학 760점(800점 만점)을 받아 예일 대학에 지원했다.

“일단 의사 자격증을 딴 후에 변호사를 할 겁니다. 많은 사람이 의학 전문 지식이 없어 의료계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습니다. 전문 의학 지식과 법 지식으로 그런 사람을 돕고 싶어요. 컴퓨터를 전공할 생각은 없습니다. 싱크퀘스트에서 수상했기 때문에 매사추세츠 공과대학 컴퓨터공학과에 지원해도 거의 100% 합격하겠지만, 컴퓨터 지식은 2~3년만 지나면 상식이 될 것입니다. 그런 상식을 직업으로 연결하고 싶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과 교류하는 직업을 갖고 싶기 때문에 의료 전문 변호사가 되고 싶습니다.”

현정이는 한국 문화를 주제로 하여 내년 싱크퀘스트에 재도전할 계획이다. 한국 소녀라는 특성을 살려서 멋진 작품을 만들어 보고 싶단다. 현정이의 장래 꿈은 산업 디자이너.

“이번 작품을 재영·데이비드 오빠와 함께 하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올해의 경험을 살려서 내년에는 제가 주도해서 더 멋진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이렇게 경험의 폭을 늘리고 미술적 감각을 꾸준히 훈련한다면, 훌륭한 산업 디자이너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재영이와 현정이처럼 인터넷에 취미를 갖고, 인터넷을 이용해 자신을 개발해 가는 아이들은 많다(74~75쪽 딸린 기사 참조). 이들 N세대는 정보를 공기처럼 호흡하고, 인터넷을 도깨비 방망이를 휘두르듯 요리해 자기가 원하는 것을 뚝딱 해결한다. 인터넷 아이디어 하나로 웬만한 회사 총매출액쯤 순식간에 올리는 N세대도 있다. 이 N세대 아이들은 인터넷 하나로 국경과 세대를 뛰어넘으며 기성 세대에 도전장을 던진다. 21세기는 이 N세대가 얼마나 경쟁력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한 나라의 경쟁력이 판가름 날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나라의 N세대는 얼마나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을까.

미래 국가 경쟁력 N세대에 달렸다

“우리나라의 N세대는 선진국에 비해 창의성과 포괄적인 안목이 뒤떨어지는 편이다. 국제 과학기술 경진대회에 참가하는 아이들을 예로 들어보자. 바이러스 백신 프로그램이나 인터넷 서버 운영 프로그램 등 프로그램 자체만 개발하는 데는 매우 뛰어나지만, 컴퓨터와 인터넷을 이용해 일상에서 부딪히는 문제를 총체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아직 부족한 실정이다. 우리나라 N세대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창의성과 총체적인 안목을 함께 키워가야 한다.”

황대중 교수(성균관대·컴퓨터학과)의 평가이다. 황교수는 우리가 경쟁력 있는 N세대를 길러내려면 과거의 평준화 정책보다 컴퓨터 영재를 발굴해서 전문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아이가 컴퓨터와 인터넷을 잘하는 것보다는 재능 있는 영재를 집중 육성하는 것이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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