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헌재· 김태정, 장은증권‘살해’
  • 정희상 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1999.06.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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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감위 , “파렴치 집단” 여론 몰이→검찰, 노사 구속→퇴출
노동계를 발칵 들쑤신 진형구 전 대검 공안부장의 조폐공사 파업 유도 발언 불똥이 금융계 구조 조정 과정의 ‘유사 사건’으로까지 튀었다. 노동계는 지난해 정부가 야심적으로 진행한 금융계 구조 조정 과정에서도 검찰과 금융감독위원회(금감위)가 무리하게 개입했다고 주장하며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나섰다.

핵심은 장은증권 사태. 장은증권은 지난해 7월 초 부실 금융기관 정리 과정에서 도덕적 해이의 본보기로 꼽혀 여론과 정부로부터 집중 포화를 맞았다. 장은증권 직원들이 퇴출을 앞두고 사장을 협박해서 고객 예탁금으로 ‘퇴직금 잔치’를 벌였다는 내용인데, 이 사건은 한국 금융계의 도덕적 해이 현상의 본보기로 다루어졌다. 대통령까지 국무회의 석상에서 장은증권 문제를 개탄하며 정부가 강력한 시정 조처를 취하라고 지시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경제 위기 극복 과정에서 일사천리로 진행된 장은증권 ‘죽이기’ 작업의 이면에는 사실과 진실이 실종했다는 심각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즉 언론도 정부도 당시 장은증권 직원 명예퇴직금 지급 문제의 실체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처음부터 ‘마녀 사냥’식으로 접근한 오류를 범했다. 그 과정에는 금감위의 무리한 여론몰이가 끼어 있었고, 여기에 검찰까지 힘을 보탰다. 순조로운 금융권 구조 조정을 위해 ‘희생양’이 절실히 필요하던 차에 장은증권 사태의 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된 것이다.

문제의 발단은 지난해 7월3일 증권감독원(금감위로 통합되기 전)이 장은증권을 영업 정지 쪽으로 유도하면서 불거졌다. 장은증권이 모기업인 장기신용은행의 요구로 오랫동안 노사 협상을 통한 구조 조정 작업을 진행하다가 막 협상을 타결한 직후였다. 즉 ‘전직원 사직서 제출과 퇴직 위로금으로 12개월치 평균 임금 지급, 계약직 50% 채용’을 골자로 하는 노사 합의서가 7월2일자로 작성된 것이다.

이같은 사례는 장은증권이 처음은 아니었다. 전직원을 퇴직 처리하고 일부 직원을 계약직으로 수용하는 강도 높은 구조 조정은 새한종금과 대우투자자문도 이미 채택한 방안이었다. 금감위가 문제 삼은 명예퇴직금 지급건 역시 마찬가지였다. 금감위가 자체 구조 조정을 단행하면서 직원들에게 60개월치나 지급한 것이 불과 몇달 전 일이었다. 당시 장은증권 직원들에게 지급된 명퇴금 1백60억원은 대부분 이들이 회사로부터 대출받은 복리후생비를 갚는 데 사용되어 1인당 평균 7백60여 만원이 돌아가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7월3일 아침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이 개입함으로써 일이 복잡하게 꼬였다. 이헌재 위원장은 장은증권 모기업인 장기신용은행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직원들에게 사표를 받고 어떻게 퇴직금을 지급할 수 있느냐’라고 강하게 질책했고, 뒤이어 증권감독원 이종남 부원장은 장기은행에 영업 중지 신청 사유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결국 영업 정지 쪽으로 방향을 튼 금감위와 증권감독원 지시에 따라 장은증권 이대림 사장은 노사 합의를 무시하고 7월3일 밤 자필로 ‘영업 중지 요청서’를 써서 제출했다.

증권감독원 직원 3명이 찾아와 강요하는 자리에서 작성된 영업 중지 요청서가 이 날 밤 10시께 제출되자마자 방송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장은증권이 영업 정지된 사실과 그 배경에 직원들의 도덕적 해이가 있었음을 마감 뉴 스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튿날 모든 언론은 금감위 보도 자료를 인용해 장은증권 노사가 영업 정지를 앞두고 고객은 안중에도 없이 명퇴금만 챙긴 부도덕하고 파렴치한 집단이라고 몰아붙였다.

이렇게 해서 여론몰이에 성공한 금감위는 내친 김에 장은증권 이대림 사장을 업무상배임죄로, 박강우 노조위원장을 명퇴금 지급에 대한 협박강요죄로 고발했다. 합법적인 노사 협상 절차를 거친 퇴직금 지급 합의가 금감위 손을 거치면서 어느새 불법적인 협박의 산물로 둔갑한 것이다.

이 사건을 접수한 서울지검 특수부는 면밀히 조사해 진실을 바로잡을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걷잡을 수 없이 번진 장은증권 사태는 일선 검사의 손을 이미 떠난 상태였다. 당시 이 사건을 담당한 이 아무개 검사는 장은증권 이대림 사장과 박강우 노조위원장을 조사한 끝에 박위원장에게 협박공갈죄 혐의가 없음을 확인했다. 이에 따라 7월10일 담당 검사는 변호인과 박강우 위원장에게 ‘상부에 보고한 뒤 무혐의로 석방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상부란 당시 김태정 검찰총장이었다.
“담당 검사의 무혐의 처리, 김태정 총장이 뒤집었다”

이와 관련해 현장에 있던 이덕우 변호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7월10일 박강우 위원장과 함께 검찰청사에 들어가자 이 아무개 검사는 ‘조사한 결과 혐의가 없음이 확인되었으니 하루만 더 보강 조사한 뒤 저녁 때 석방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까지 석방되지 않아 다시 찾아갔더니 담당 검사는 ‘무혐의 결론을 내렸으니 부장검사에게 결재 받고 석방하겠다’고 말했다. 잠시 뒤 김태정 총장에게 보고하고 30분 내로 내려와 석방하겠다던 검사가 1시간 이상 흐른 뒤 얼굴이 빨개져서 나타나 ‘협박죄 대신 공모죄 여부를 더 조사해야겠다’며 긴급체포영장을 발부받았다.”

담당 변호사가 말한 대로라면 일선 검사가 수사해 무혐의 결정을 내렸지만 김태정 총장이 개입해 구속쪽으로 방향을 뒤집은 셈이다. 이에 대해 이 사건을 담당했던 이 아무개 검사에게 확인한 결과 사실 관계의 흐름은 모두 시인했다. 다만 김태정 총장이 노조위원장을 확대 수사해 구속하도록 지시한 사실과 관련해서는 “담당 검사로서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에 대해 검찰총장으로부터 확대 수사를 지시받은 것으로서 부당하다고 생각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일선 검사가 수사를 마친 사건을 검찰총장에게까지 직접 찾아가서 보고해 뒤집히는 사례가 흔하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가끔 있다”라고 답변했다. 그는 이 사건에 대해서는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며, 요즘 터져나온 검찰 수뇌부의 노동운동 길들이기 개입 의혹 사건과는 연결하지 말라고 주문했다.

결국 이런 경위를 거쳐 장은증권 박강우 노조위원장은 이대림 사장과 배임을 공모했다는 혐의로 전격 구속되었다. 당시 이 사건을 수사했던 검찰 직원들도 검찰총장의 별건 구속 수사 지시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 듯하다. 박강우 위원장은 이에 대해 “보석으로 석방된 뒤 검찰 수사관들이 전화를 걸어 검사동일체 원칙 때문에 그렇게 처리해 미안하다고 몇 차례 연락해 왔다”라고 말했다. 어쨌든 박위원장을 배임 공모 혐의로 기소한 이 사건은 노동사건치고는 희한한 기록을 세웠다. 노조의 경영 참여 및 중요 의사결정권이 인정되지 않는 한국 풍토에서 노조위원장에게 사실상 경영 책임을 지웠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헌재 금감위원장과 김태정 검찰총장이 개입해 철저히 죽이기 쪽으로 방향을 잡은 장은증권 사태는 금융 구조 조정 과정에서 정부 쪽에 적잖은 선물을 안겼다. 대동·동남·경기 은행 등 5개 시중 은행을 퇴출시키는 과정에서 장은증권의 ‘도덕적 해이’가 약방의 감초처럼 따라다녀 퇴출 금융기관 노동자들은 ‘파렴치 집단’이라는 여론 앞에서 제대로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고 길거리로 나앉아야 했다.

영업 정지된 장은증권 직원들과 사무금융노련은 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해 정부와 언론이 왜곡한 사태의 진상을 바로 알리려 기를 썼지만 역부족이었다. 다행히 노사정위원회가 진상 조사에 나서 왜곡된 내용을 파악해 보고서를 만들면서 마녀 사냥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이미 검찰은 사장과 노조위원장을 ‘배임 공모’라는 한 배에 태워 구속한 상태였다. 금감위가 끝까지 ‘죽이기’로 작정한 장은증권의 운명에는 변화가 없었다.

금감위원장이 파렴치 집단으로 몰아 영업 정지를 주도하고, 검찰총장이 개입해 무리하게 장은증권 노사를 사법 처리함으로써 이 회사는 더 설 땅이 없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장은증권 직원들은 회사를 살리기 위해 똘똘 뭉쳐 피눈물 나는 노력을 계속했다. 지난해 7월 장은증권 사태 이후 지금까지 3백50일 넘게 서울 여의도 본사에서 철야 농성을 하며 회사 살리기 작업을 계속해온 김병곤 노조 사무국장은 이렇게 말한다.

“장은증권 직원들은 실직자가 될까 봐 두려운 것이 아니다. 진실과 다르게 파렴치범으로 몰린 것이 분하다. 대통령도 권장하는 외자 유치까지 직원들 손으로 성사시켰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관료 사회에서 한번 눈 밖에 난 회사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없어지라는, 부당한 억지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서슬 퍼런 금감위와 검찰의 조처에 맞서 이 회사 직원들이 끝까지 억울함을 호소하는 데는 또 다른 사연이 있다. ‘명퇴금 잔치’라고 이름 붙여진 여론몰이 이후 장은증권 직원들은 숨 죽인 상태로 새로운 회생의 길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금감위는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금감위, 장은증권보다 부실한 재벌 증권사는 살려

지난해 가을 제2 금융권 구조 조정에 착수한 금감위는 증권사 가운데 장은·동방페레그린·쌍용·SK 등 4개 증권사에 9월까지 경영개선계획서를 내라고 명령했다. 이에 따라 제출된 계획서는 외부 전문가들로 구성된 경영개선평가위원회 심사를 거쳐 금감위로 넘어갔다. 평가 결과는 장은증권이 가장 양호한 것으로 나왔다. 즉 영업용 순자본 비율(은행의 BIS 비율과 같은 개념)이 850%, 재산 채무비율이 150%였는데, 이는 금감위가 제시한 기준을 훨씬 웃도는 수준이었다.

반면 재벌 그룹 계열사인 쌍용증권과 SK증권은 영업용 순자본 비율에서 금감위 기준인 150%도 충족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경영평가위원회는 장은증권과 동방페레그린증권에 대해서만 ‘승인’ 의견을 붙였고, 나머지 두 재벌 계열 증권사에 대해서는 지방 사옥 매각·대주주 출자 등 ‘조건부 승인’ 의견을 냈다.

그러나 금감위는 경영평가위원회 의견을 묵살한 채 장은·동방페레그린 증권은 불승인 처리하고, 재벌 계열 두 증권사만 조건부 승인했다. 이에 대해 금감위 한 관계자는 “장은증권의 증자 계획은 대주주인 장기신용은행이 5백억원을 출자한다는 것이었는데, 영업 정지된 증권사가 국민 세금이나 다름 없는 공적 자금을 사용하겠다는 것을 용납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장은증권 직원들은 이에 대해 의도적인 죽이기라고 반발한다. 장기은행에 대한 정부 지원은 대출이나 출자도 아니고 부실 채권을 성업공사가 매입한다는 것이었는데 이를 공적 자금이라는 말로 둘러댄다면 제일은행과 서울은행에 정부가 수조원씩 출자한 것은 무엇 때문이냐는 것이다. 더구나 SK증권도 그룹 계열사들의 출자를 통해 2천억원 유상 증자를 실시한다는 계획이었는데, 이는 용인하면서 유독 장은증권의 증자 계획만 문제 삼은 것은 재벌 계열사만 보호하겠다는 ‘반개혁적’ 자세라는 것이 이들의 시각이다.

장은증권 직원들은 금감위로부터 경영개선계획 불승인 조처가 내려지자 다음 단계로 연세대·경방·세종기술투자 등으로부터 7백억원에 달하는 투자의향 합의서를 받아냈다. 그러나 금감위가 불승인 방침을 고수하자 이들이 주춤해 투자 건은 성사되지 못했다.

금감위의 서슬 앞에 장은증권 직원들은 철석같이 믿었던 ‘증자를 통한 살아 남기’를 포기했다. 그 대신 대통령이 권장하는 외자 유치 작업에 나섰다. 마침 장은증권에는 외국인 투자자의 문의가 잇따랐다. 미국계 투자회사인 퍼스트 머천트 뱅크 카드 서비스가 재경부에 투자의향서를 제출하는가 하면, 대만 쿠스 그룹의 홍콩 법인인 KGI가 장은증권 인수 의사를 타진해 왔다.

그러나 이같은 희망적 사태 전개는 정부가 서둘러 장은증권을 인가 취소하고, 금감위가 파견한 장은증권 관리인이 외자 유치를 추진하던 장은증권 노조원들을 전원 해고함으로써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인가 취소 결정이 내려진 지난 3월15일은 금감위 관계자들과 장은증권 노조가 외자 유치 논의 일정을 잡은 날이었고, 노조원들을 전원 해고한 3월31일은 이헌재 금감위원장과 박강우 노조위원장이 만나 외자 유치를 협의한 끝에 이위원장이 “법률적 문제가 없으면 협조하겠다”라고 답변한 날이었다.

결국 장은증권 사태가 전개된 과정은 관료 조직이 한번 ‘죽이기’로 결정한 회사는 끝까지 살려둘 수 없다는 전형을 보여주었다. 현재 장은증권은 금감위가 청산인을 보내 청산 절차에 들어갔고, 직원들은 인가 취소 결정에 불복하는 행정 심판을 제기한 상태이다.

이런 상황에서 진형구 전 대검공안부장의 조폐공사 파업 유도 발언 파문이 터지자 노동계는 장은증권 사태까지 유사한 맥락으로 간주하고 각종 집회에서 쟁점화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에게만 일방적으로 고통을 강요하고, 인권 유린·사건 조작 등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등 조폐공사와 장은증권의 구조 조정 과정이 신통하게 닮은꼴이라는 것이다. 민주노총은 6원13일부터 조폐공사 사건과 함께 장은증권 사태에 대해 전면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며 원상 회복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고 나섰다. 전국사무금융노련 역시 정부의 장은증권 죽이기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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