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정부-대우, ‘짜고 치는 빅딜’ 의혹
  • 朴在權 기자 ()
  • 승인 1999.07.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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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자동차 처리, 정부·재벌 담합 의혹…삼성생명 상장은 ‘예정된 수순’
당신이 정책 결정자라고 가정하자. 당신은 삼성자동차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이 때 기본 전제는 △삼성자동차 부채를 완전 정리하고 △채권 금융기관에 부담을 주지 않고 △이건희 회장에게 부실 경영의 책임을 지우고 △국내 자동차 산업을 현대·대우 양사 체제로 재편하려는 정부 복안을 충족시켜야 한다.

첫 번째 방법은 이건희 회장을 ‘족치는’ 것이다. 부실 경영의 책임을 물어, 보유한 상장사 주식을 모두 내놓게 하고, 그것도 모자라면 비상장사 주식·부동산·현금을 내놓게 하는 것이다. 그런 뒤 아예 그룹 경영에서 손을 떼게 할 수도 있다.

“정부와 재벌이 짜고 치는 고스톱”

부실 경영의 책임을 묻기에는 이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이 방안은 너무 가혹하고, 현실성도 부족하다. 우선 이회장이 보유한 4개 계열사, 즉 삼성전자·삼성물산·삼성화재·삼성증권 주식의 시가 총액은 4천7백억원 정도이다. 그런데 삼성자동차 부채를 완전 변제하려면 2조8천억원이 필요하다. 이회장 주식 매각 대금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비상장사 주식을 추가로 내놓으면 적정 주가 논쟁이 일 것이고, 부동산을 내놓더라도 매각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렇다고 부족한 금액을 전부 삼성그룹 계열사에 떠넘길 수도 없다. 국내외 투자가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유한 책임을 기본 정신으로 하는 주식회사 제도의 기본 원칙과 정면으로 배치한다는 점이다. 주식회사인 경우, 대주주에게 무한 책임을 지울 법적 근거가 없다. 두 번째 방안은 법대로 처리하는 것이다. 채권 금융기관들이 삼성자동차를 청산한 뒤, 채권 순위에 따라 나누어 갖도록 하는 안이다. 이 경우 담보 채권을 갖고 있는 금융기관이 먼저 채권을 행사하고, 남은 돈을 무담보 채권을 갖고 있는 금융기관들이 나누어 가지면 된다.

이 방안은 금융기관의 도덕적 해이를 방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재벌에 빌려주면 돈을 떼이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보고, 무작정 돈을 빌려준 채권 금융기관들에게 경종을 울릴 수 있다. 이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채권 금융기관들이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된다는 점이다. 국내 금융기관들은 그동안 재벌에 돈을 빌려줄 때 ‘삼성’이라는 간판을 보고 빌려주었다. 금융기관들이 재벌 계열사의 신용을 따질 수 있을 정도로 우위에 있지도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법대로 처리하면, 재벌은 부실 경영으로 인한 손실을 모두 채권 금융기관에 떠넘길 수도 있다.

정부가 이 방안에 극력 반대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막대한 공적 자금을 투입해 간신히 금융기관의 국제결제은행 (BIS) 자기자본 비율을 맞추어 놓았는데, 또다시 커다란 충격파가 가해지면 정부도 감당하기 힘들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해법이 가능할까. 지난 6월30일 정부와 삼성은 △이건희 회장이 보유하고 있는 삼성생명 주식 4백만 주를 내놓고 △삼성생명을 증시에 상장시키며 △삼성자동차를 법정 관리에 넘기는 방안을 제시했다. 삼일회계법인과 삼성증권이 추정한 삼성생명의 적정 주가는 70만원을 약간 넘는다. 이 주식 4백만 주면 단순 계산해도 2조8천억원. 삼성자동차 부채를 단숨에 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삼성생명 주식이 증시에 상장된다는 것을 전제할 때에만 가능하다. 6월30일 삼성자동차 처리 방침이 발표된 직후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삼성·교보 생명의 증시 상장 계획을 밝혔다. 세간에 떠도는 특혜설에 대해서도 그는 딱 잡아떼었다. 생보사의 증시 상장 건은 삼성자동차 처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것이었다.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의 한 관계자도 똑같은 주장을 펼쳤다. ‘제2 금융권 구조 조정의 핵심 사안으로 떠오른 부실 생보사 문제를 해결하는 최선의 해법은 해외에 매각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외국인 투자가에게 투자 이득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결국 생보사 상장이 불가피하다, 공교롭게도 이런 논의가 삼성자동차 처리와 맞물려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지만 사실은 별개 사안이다.’

과연 이 말이 사실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최근 제일생명 인수 작업에 참여한 알리안츠생명의 한 관계자는 “제일생명을 인수하기 위해 정부가 오랫동안 협상을 벌였지만, 한번도 생보사 상장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삼성이 자동차 문제를 처리하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정부가 생보사 상장이라는 혜택을 안겨주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삼성자동차 처리 방안을 두고 전문가들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삼성의 고스톱 파트너가 대우에서 정부로 바뀐 것이다.삼성생명 상장 되면 이회장 일가 ‘돈방석’

삼성생명 주식을 상장시킬 경우, 이건희 회장 일가가 엄청난 평가 이익을 누리는 점도 부정적인 인식을 증폭시킨다. 삼성자동차를 처리하면서 이회장의 삼성생명 지분은 6%로 줄어들 것이다. 그렇지만 삼성그룹 계열사에 대한 지배력에는 전혀 손상을 입지 않는다. 게다가 삼성생명 상장으로 6천4백억원의 평가 이익을 얻을 수 있다. 한편 이회장의 네 자녀가 62.9% 지분을 나누어 갖고 있는 삼성에버랜드는 2조7천55억원의 평가 이익을 얻게 된다. 그 밖에도 신세계가 1조8천9백77억원, 제일제당은 1조5천50억원의 평가 이익을 얻는다. 부실 경영의 책임을 지기는커녕, 정부의 증시 상장 허용으로 인해 되레 엄청난 이득을 거머쥐게 되는 것이다.

이같은 비판에 대해 삼성그룹 관계자는 억울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건희 회장이 갖고 있는 재산의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삼성생명 지분 20%를 내놓는 것은 대단한 결단인데도, 사람들이 이를 너무 가볍게 여긴다는 것이다. “삼성생명은 삼성그룹의 지주회사이다. 안정적인 그룹 운영을 위해서는 50% 이상 지분을 확보해야 하는데, 현재 우호적인 지분까지 합쳐서 52%밖에 안된다. 아무리 주식 값이 올라도 경영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팔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별로 주목을 끌지 못한다. 대다수 전문가는 오히려 주가 상승의 혜택을 어떻게 배분하는 것이 적정한지를 놓고 논란을 벌이고 있다. 신수식 교수(고려대·경영학)는 “생명보험사도 주식회사이므로, 투자 이익은 당연히 투자자 몫이다”라고 주장한다. 반면 민상기 교수(서울대·경영학)는 “생보사의 수익은 현재의 보험 계약자와 과거 계약자·투자자가 나누어갖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맞받아친다. 모든 이익이 주주 몫이 아니라는 얘기이다.

국내 시장에 진출한 외국 보험사의 한 관계자는 한 술 더 떠서 삼성의 책임론을 강조했다. “삼성의 부실 경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보사 상장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삼성이 수익을 얻는다는 것은 도덕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주가 상승으로 인해 이건희 회장 일가가 얻는 혜택을 기존 계약자나 과거 계약자, 사회 전반으로 이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적정 주가를 놓고도 의견이 엇갈린다. 삼성생명의 주가가 70만원에 이를 것이라고 산정한 삼성증권은 손보사와 생보사 주가 간에 커다란 차이가 없다고 보았다. 삼성생명 주가를 삼성화재 주가에 견주어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대우도 교보생명 상장으로 큰 이득 얻게 돼

하지만 대다수 분석가는 생보사와 손보사를 구분한다. 손보사 상품은 모두 보장형이기 때문에, 만기가 되더라도 원금이나 배당금을 돌려줄 필요가 없다. 운용 수익이 고스란히 주주 몫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반면 저축형 상품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생보사는 수익이 생기면 계약자에게 배당을 해야 하고, 만기가 되면 원금에 배당금까지 얹어서 돌려주어야 한다(24~25쪽 참조). 대우증권의 한 관계자는 “금융 당국이 생보사 수익의 85%를 계약자에게 돌려주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주주 몫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삼성생명의 적정 주가를 15만∼20만원 정도로 본다”라고 밝혔다.

생보사 상장을 둘러싸고 논란이 들끓자, 금융감독위원회는 교보생명과 삼성생명의 상장 마감 시한을 늦추더라도 객관적이고 공정한 잣대를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89년부터 보류해 온 생보사 상장 문제를 더 이상 지연시킬 수 없고 삼성자동차 처리 문제도 절박하지만, 특혜 논쟁에는 휘말리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은 “재벌에게 제2 금융기관을 소유하도록 하는 것은 문제이다. 하지만 이들이 투명하게 운영되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가급적 공개 법인 형태로 운영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정부는 공개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라고 못박았다.

현재 사람들의 관심은 삼성생명 상장 문제에 쏠려 있다. 하지만 대우그룹도 생보사 상장에 그룹 운명을 걸고 있다. 교보생명 지분 35%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우측은 그룹 구조 조정 차원에서 지분 매각 작업을 벌여 왔고, 상당한 진척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이헌재 위원장의 귀띔이다. 이런 상황에서 증시 상장이라는 호재가 터져, 매각 대금이 다소 늘어날 공산이 크다. 이것이 성사된다면, 자금난에 시달리는 대우로서는 가뭄 끝에 단비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21쪽 상자 기사 참조).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있는 정부는 지금 시간적으로 쫓기고 있다. 악재가 연이어 터지는 것도 사실은 국민들이 재벌 개혁이 미진하다고 불만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이 때문에 당분간 재벌 개혁의 강도는 더 높아질 수밖에 없다. ‘재벌 특혜설’이라는 뜻밖의 암초를 만난 ‘재벌 개혁호’가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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