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지 주민들의 아우성 "이대로는 못 살겠다"
  • 군산·대구·평택/丁喜相 權銀重 高在烈 기자 ()
  • 승인 2000.06.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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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 인근 주민들 아우성…SOFA 개정 운동 ‘활활’
전국 1백6개 시민·사회 단체가 서울 명동성당에서 불평등한 주한미군 ‘주둔군 지위 협정’(SOFA·일명 한·미 행정협정)을 개정하라고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간 지난 5월19일 전북 군산시 옥서면에 자리한 미군기지(CAMP WOLF) 앞에 이 지역 주민 50여명이 나타났다. ‘미군 범죄 근절’과 ‘불평등한 SOFA 개정’이라고 쓴 피켓을 든 이들이 등장하자 초병은 ‘또 몰려와 귀찮게 하느냐’는 표정으로 정문을 굳게 닫았다. 두 달 전부터 미군들은 정문 주위 철조망에까지 천막을 씌워 시선을 차단했다. 미군 트럭들은 집회가 계속된 한 시간 동안 줄줄이 시위대를 우회해 부대를 드나들었다.

“군산 앞바다 살려내라”

보는 이로 하여금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을 연상케 하는 양측의 대결은 이 날로 2백16번째. 1997년 10월10일부터 매주 금요일 오후 2시면 이 자리에 나타나는 이들은 ‘군산 미군기지 우리땅 찾기 시민모임’(시민모임) 관계자들이다. 비록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이들의 집요한 금요 집회는 주둔군지위협정 개정 운동을 요원의 들불처럼 번지게 만들었다. 이들의 활약으로 지난해에는 미군 위조지폐범이 법정에 섰고, 1997년에는 이 지역 미국 제7공군 전투비행단이 한국 민항기의 공항 사용료를 대폭 인상하려던 계획을 포기했다.

그러나 이들은 금요 집회를 멈출 수 없다. 시민모임 관계자는 취재진에게 군산 앞바다에 한번 가보라고 권유했다. 미군기지와 마주하고 있는 군산 앞바다에 이르자 심한 악취가 확 풍겼다. 곳곳에 폐사한 조개와 떼지어 죽은 물고기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조개를 채취하던 한 어민은 “미군기지가 폐수를 방류하는 바람에 바다 오염이 심해져 몇 년 전부터 연안 어업이 불가능해졌다”라고 말했다. 군산 시민이 이 문제에 팔짱을 끼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시민모임은 폐수를 지난해 매일 3천여t씩 바다와 주변 하천에 무단 방류하는 주한미군을 군산시에 고발했다. 당시 오·폐수를 측정한 결과 생화학적 산소 요구량(BOD)이 하수종말처리장 요구 수준인 20ppm의 7배가 넘는 135ppm에 이르렀다. 그러나 미군측은 시정하기는커녕 사람이 폐수 방류구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철조망을 쳐버렸다. 결국 군산 시민은 주둔군지위협정을 개정하는 것만이 죽어가는 군산 앞바다를 살릴 수 있다고 깨달았다.

불평등한 주둔군지위협정으로 인해 군산 시민이 겪는 피해는 환경 오염뿐만이 아니다. 잊을 만하면 불거지는 미군 범죄와 그 처리 과정을 지켜보며 지역 주민이 겪는 수모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지난 5월2일 저녁 군산 미7공군 소속 신디 마이클 특무상사는 만취 상태로 차를 몰고 가다가 신호 대기하던 김성곤씨(38)의 차를 뒤에서 들이받았다. 마이클 상사는 브레이크도 밟지 않고 김씨의 차를 50m나 밀어붙였다. 가해자인 마이클 상사의 전화를 받고 신속히 달려온 미군 구급대는 김씨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리 골절상을 입은 마이클 상사만 태우고 떠나버렸다. 마이클 상사는 그날 밤 헬기로 서울 용산에 이송된 뒤 치료를 핑계로 미국으로 날아가 버렸다. 한참 뒤 한국 경찰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피해자 김씨는 찌그러진 차에 낀 채 죽어 있었다. 유족과 시민단체는, 가해자뿐 아니라 미군 당국의 비인도적 처사에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한국 경찰이 먼저 도착했다면 가해자이지만 다리를 다친 마이클 상사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냥 가버렸겠느냐는 항변이다. 아울러 가해자를 서둘러 미국으로 빼돌린 미군의 행위에 대해서도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런 현상이 되풀이되다 보니 군산 시민이 미군을 바라보는 눈도 험악하다. 심지어는 미군기지를 근거지로 장사하는 상인들조차도 과거와 달리 시위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협정 개정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은다.

미국 공군이 주둔한 군산과 달리 육군이 주둔하고 있는 대구시도 골머리를 앓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올해 봄 대구 민심을 들끓게 하고 있는 미군 관련 화두는 초등학생 집단 성추행 사건이다. 지난해 가을부터 4월 중순까지 한 미군 군속이 대구 시내 여자 초등학생 38명을 자기집으로 유인해 성폭행을 일삼은 사실이 적발되어 대구 시내가 발칵 뒤집힌 것이다.대구 시민 분노케 한 어린이 성추행

범인은 캠프 워커 어린이서비스센터에서 군무원으로 일해온 알폰소 메이스(59)이다. 한국 어린이 사이에 ‘헬로 아저씨’로 불리던 그는 우연한 계기로 파렴치범으로 밝혀졌다. 집에 들어오지 않고 늦게까지 놀이공원에서 놀고 있는 아이를 발견한 부모들이 돈이 어디서 났는지를 추궁해 알폰소의 범행 일체가 드러난 것이다.

경찰 조사 결과 그는 귀가하는 고학년 여자 초등학생들에게 접근해 만∼3만 원 정도를 쥐어주고 집으로 유인해 방문을 잠그고 성추행을 일삼은 것으로 드러났다. 학교측이 파악한 피해 학생 수는 38명에 이르지만, 경찰은 현장 조사 결과 알폰소의 컴퓨터에 3천여장 정도의 어린이 사진이 나온 것으로 보아 피해 범위가 훨씬 클 것으로 보고 있다. 그의 범행은 학부모들에게도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대구여성의전화 강혜숙 홍보부장은 “자녀가 성추행당한 사실을 안 학부모들이 개인적으로 복수하겠다고 나서 이를 말리느라 애를 먹고 있다”라고 밝혔다.

이 사건의 충격에서 헤어나기도 전에 대구 지역 주민들은 최근 또 다른 미군 고급 장교의 성폭행 사건 소식을 접하고 경악했다. 지난 3월20일께 용의자인 미군 제20지원단 부사령관 윌리엄 트룹스 중령이 대구시 남구 이천동의 한 클럽 여종업원을 집으로 유인한 뒤 자기 아들과 함께 윤간하고 폭행한 뒤 돈까지 뺏은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밖에 미군 부대가 주택가에 자리잡고 있어 입는 크고 작은 피해도 대구 민심을 험악하게 만들고 있다. 특히 관내에 미군 기지 3개가 위치한 대구시 남구에서는 주민은 물론 자치단체장까지 앞장서서 미군기지 반환 운동을 벌이고 있다.

미군 헬기장 주변에 사는 대명5동 주민 차태봉씨(64)는 7년째 일기를 쓰고 있다. 바로 헬기장 소음으로 인한 피해 상황을 기록하기 위해서이다. 그의 일기에는 하루 동안 헬기가 몇 대 뜨고 내렸는지, 소음 정도는 어땠는지가 자세히 적혀 있다. 유난히 소음이 심한 날은 특별히 별표를 그려 놓았다. 여기저기 맞춤법이 틀리기는 하지만 그의 일기는 자신과 이웃 주민의 증상에 대한 고독한 기록이기도 하다. 주민이 집단으로 앓고 있는 신경성 위염·불면증·소화 장애 등을 빼곡히 적은 그는 그 원인을 소음으로 인한 스트레스라고 주장한다. 차씨는 이를 토대로 미군 당국에 수없이 문제를 제기했지만 문전에서 박대당했다. 그의 일기 말미에는 ‘38년이라는 긴 세월을 하루가 멀다하고 고통을 겪으며 불안과 공포에 시달려왔다. 참을 수가 없어서 집단으로 신경안정제를 복용하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 주민의 고통을 하늘이나 알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라는 절규로 끝맺고 있다.그러나 이들의 호소에 대해 미군 당국과 정부는 이렇다 할 대책 마련도 피해 조사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얼마 전 주민들이 동네 PC방에서 대학생들에게 부탁해 피해 사실을 인터넷에 띄운 다음에야 언론이 비로소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들 피해 주민의 활동은 대구에서 미군기지 이전 운동에 불을 붙이는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시민운동가 출신인 남구 이재용 구청장이 나서서 기지 반환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25쪽 상자 기사 참조). 미군기지를 둘러싸고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는 주둔군지위협정을 개정해 풀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인식이다. 이재용 구청장은 “이제 많은 사람이 주한미군 문제를 당당하게 해결하기를 바라고 있다. 미군 문제는 더 이상 성역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주한미군 공군기지가 있는 평택과 오산 지역에서도 불평등한 주둔군지위협정으로 인한 피해 호소는 끊이지 않는다. 오산 공군기지는 51전투비행단 아래 2개 비행대대를 두고 있는데, 훈련기인 A 10기 20여 대와 F 16전투기 30대가 배치되어 있다. 화성군 매향리에서 사격 연습을 하고 있는 A10기가 바로 이 오산기지에서 이륙하는 것이다.

오산 공군기지는 최근까지도 기지 확장을 꾀하고 있다. 미군은 오산기지에 패트리어트 미사일 기지를 설치하겠다며 국방부에 공여지 17만평을 제공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정부는 미군이 토지 이용 계획조차 제출하지 않은 데다 이 일대가 농지라는 이유로 난색을 표명했다. 평택시도 미군의 평택기지 확장을 반대하고 있다. 시의 한 관계자는 “현재의 미군기지만으로도 도시 계획이 어려운데 더 확장된다면 평택시 발전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와 더불어 평택시는 미군기지의 환경 오염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늘어지고 있다. 오산기지가 하수 기준치인 30ppm보다 3배나 많이 오염된 폐수를 하루 5천t씩 진위천과 오산천으로 무단 방류해 수질을 오염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SOFA 개정 않고는 문제 해결 힘들어

미군은 이 지역에 폐유만 버리는 것이 아니다. 기지 북쪽을 끼고 흐르는 진위천을 따라 폐 콘크리트와 폐 아스콘을 대량으로 불법 매립하고 있지만 역시 주둔군지위협정에 환경 관련 규정이 없어서 당국의 단속을 전혀 받지 않는다. 참다 못한 평택시는 1993년부터 줄기차게 미군 기지의 환경 오염을 지적하며 대책을 마련하라고 요구했지만 큰 성과가 없었다. 미군이 주둔군지위협정 조항을 들이대며 협상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최근 들어서야 미군은 오는 2003년 완공하는 평택 지역 하수종말처리장의 공사비 일부를 부담한다는 데 마지 못해 합의했다.

경기도 지역의 다른 미군 주둔 지역에서도 민원이 끊이지 않는다. 동두천시가 지난 3년간 여름철마다 막대한 홍수 피해를 입은 것도 미군기지와 무관하지 않다. 동두천시 신천 양안을 차지한 미군기지가 하천 흐름을 방해해 범람해도 손을 쓸 수가 없어 매년 똑같은 재해가 되풀이된다. 동두천시는 지난해 물난리를 겪은 뒤 미군과 협상을 벌이면서 하천 양안을 일부 파헤쳤다. 그러나 미군측이 먼저 군용 건물을 지어준 뒤 하천 확장 공사를 하라며 버텨 장마철을 앞둔 현재까지 땅을 파헤친 채 방치하고 있는 형편이다.

수도 서울 역시 불평등한 주둔군지위협정으로 인해 시민이 겪는 피해가 적지 않다. 이태원을 중심으로 미군 범죄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고, 한복판에 용산기지가 버티고 있어 서울은 기형 도시가 된 지 오래다. 용산 미군기지 부지는 1백5만평인데, 이는 용산구 전체 면적의 16%에 달한다.

서울 시민 전체가 보는 피해는 막심하다. 1979년 착공한 동작대교가 미군기지를 관통하지 못해 효용 가치가 반감되었고. 지하철 4호선도 불필요하게 구부러졌다. 기지 주변에는 3층 이상 건물도 짓지 못한다. 모두가 불평등한 주둔군지위협정 조항 때문이다. 그러나 미군은 버젓이 주둔군지위협정을 어겨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다. 현재도 미군은 주둔군지위협정 규정에 따라 군사 목적으로만 제공된 용산 기지 100여만 평 안에 민간인용 미국대사관 직원 숙소를 8만평이나 할애해 쓰고 있는 실정이다.이 때문에 용산 미군기지를 반환받는 문제는 서울 시민의 오랜 숙원이다. 정부도 1988년부터 왜곡된 한·미 관계를 바로잡겠다며 용산기지와 미국대사관 이전 계획을 발표하고 미국측과 협상에 들어갔다. 그 결과 1991년에 미국측이 이전 비용으로 17억 달러를 산정하는 등 양국은 기지 이전 계획에 대한 구체적 원칙 합의안까지 발표했다. 그러나 미국은 그 뒤로 이전 비용을 95억 달러로 높여 달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미국대사관 직원 숙소 부지 8만평은 이전 대상에서 제외해 달라고 조건을 달아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졌다.

용산 미군기지 이전 문제가 다시 불거진 것은 최근 들어서이다. 경실련·환경운동연합 등 시민단체들이 주축이 되어 용산기지를 시민공원으로 만들기 위해 오는 8월까지 국민운동본부를 발족키로 한 것이다. 이들은 예전처럼 용산기지 문제를 정치·군사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는다. 도시 공간 구조를 바로잡고 서울 시민의 생활권을 확보하기 위해 기지 반환 천만명 서명운동에 돌입하기로 했다.

취재진이 둘러본 전국의 미군기지 주변 주민과 환경은 이처럼 불평등한 주둔군지위협정으로 인해 극심한 몸살을 앓고 있었다. 각종 미군 범죄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고, 폭격 훈련이나 비행기 이착륙으로 인한 소음에 시달리고 있었다. 도시계획 왜곡, 지하수와 하천 오염 등 지역마다 미군 기지의 성격에 따라 사정이 약간씩 다르지만 별다른 피해 구제 수단이 없다는 점은 똑같았다.

이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문제점 외에도 현행 주한미군 주둔군지위협정 체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피해도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주한미군 관련 동식물 검역권을 행사하지 못해 보는 손해가 대표적이다(왼쪽 상자 기사 참조).

사유 재산권 침해도 심각

이밖에 전국적으로 방대한 지역 주민이 겪고 있는 사유 재산권 침해 문제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이 협정의 폐해이다. 이른바 미군 공여지 문제가 그것이다. 1967년부터 발효된 주둔군지위협정에 의거해 주한미군에 공여된 땅은 전국적으로 여의도 면적의 80배에 달하는 7천4백여만 평이다. 문제는 이들 땅 가운데 대부분이 개인 사유지라는 점이다. 사유지를 미군이 정당한 보상 없이 차지할 수 있도록 법적 근거를 마련해 준 것이 주둔군지위협정 제2조와 4조이다. 이른바 ‘시설과 구역’에 관련된 이 조항에 미군기지와 시설에 대한 공여가 규정되어 있는데, 미군은 1967년 주둔군지위협정이 발효되기 전에 불법 점유한 사유지까지 사용권을 소급해 인정받고 있다. 결국 토지 소유주들은 강제로 땅을 빼앗긴 채 발만 구르고 있는 셈이다. 이는 헌법 제23조에 규정된 재산권 보호 조항과 정면으로 배치하는 것이다. 최근 시민단체들과 대한변협이 주둔군지위협정의 일부 조항에 대해 헌법소원을 내기로 한 것은 이를 염두에 둔 것이다.

주한미군 주둔군지위협정을 개정하는 문제에 대해 미국측이 계속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한 한국민의 반미 감정은 어느 순간 폭발 임계점에 달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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